[청년의 소리] 외로운 죽음이 없는 ‘배웅공동체’를 꿈꾸며
저출산, 고령화, 인구소멸. 부산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슈들이다. 고향을 떠나 부산에 정착한 나는 그동안 ‘정주 결정 요인’이나 ‘청년 인구 유입 정책’에 대한 질문을 종종 받았고, 관련 좌담회에도 몇 번 초대됐다. 거기에 더해 기혼 여성으로서 자녀 계획에 대한 질문도 수차례 받아왔다. 그럴 때마다 ‘나’라는 존재의 취·창업과 결혼, 출산이 단지 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이 도시의 인구에도 영향을 끼치는 거구나, 하고 깨달으면서도 무언가 찜찜한 기분을 느끼곤 했다. 그리고 최근에서야 그 찜찜함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2024년 현재, 부산에서는 평균적으로 한 달에 1000명 남짓한 아기가 태어나고 2000여 명이 생을 마감한다. 소멸위험지수가 가장 높은 영도구는 지난 6월 한 달간 24명이 태어났고, 120명이 사망했다. 새로 태어난 생명의 숫자보다 고인이 되신 분들의 숫자가 최소 두 배, 지역에 따라서는 다섯 배까지도 더 많다는 뜻이다.
‘인구소멸’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대개 부산의 미래를 떠올린다. 미래를 바꾸기 위한 정책들을 고심한다. 거기에는 인구 유입과 출산율 증대가 필수적으로 따라붙는다. 그동안 내가 받았던 질문들은 인구통계를 이루는 수많은 ‘1’ 중의 하나로서, 어떻게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거나 ‘플러스 1’을 만들어 낼지에 대한 것이었다. 통계에 존재했다가 사라지는 무수한 ‘마이너스 1’들에 대한 질문은 받지 못했고, 나 역시 궁금해한 적이 없었다. 우리 모두는 통계 연보의 숫자나 국가의 생산력이기 전에 ‘사람’인데 말이다.
올 상반기 흥행작 ‘파묘’에는 ‘죽음’에 연관된 일로 돈을 버는 지관과 장의사, 무속인이 나온다. 오컬트 장르가 익숙하지 않아 영화를 보는 내내 벌벌 떨면서도 나는 이들의 직업이 흥미로웠다. 종교가 무엇이든, 사후세계를 어찌 생각하든, 이들이 하는 업의 본질은 누군가의 마지막을 배웅하는 역할, 떠나는 길이 서럽거나 외롭지 않도록 달래주는 역할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지관이 자신의 딸 결혼식에서 단체 사진을 찍을 때, 죽을 고비를 함께 넘긴 동료들을 불러다 가족 자리에 세우는 마지막 장면도 좋았다. 혈연 중심으로 치러지던 우리의 관혼상제가 앞으로 어떻게 달라져야 할지 친절하게 일러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국 사회는 혼인과 혈연에 의해 형성된 구성원만을 가족으로 인식해 왔다. 누군가가 세상을 떠나면 가족이 장례를 주관하고 대개 장남이 상주가 되며, 친척과 이웃 지인들이 참석해 함께 슬퍼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문화였다. 그러나 가족의 형태가 다양해지고 1인 가구가 늘어가는 현 상황에서, ‘탄생’보다 ‘죽음’이 더 잦은 이 도시에서, 이제 우리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죽으면? 내 장례식에는 누가 와서 슬퍼해 주지?”
김혜순 시인은 가족을 ‘작별의 공동체’라 칭했다. 지금 함께 있지만, 결국은 헤어져야 하는, 떠나고 떠나보내는 고통까지도 견뎌야만 하는 운명의 공동체. 이걸 바꿔 생각해 보자. 나와 무관하다고 여겼던 타인의 죽음에도 함께 아파하고 애도할 수 있다면, 가족보다 자유롭고 느슨하면서도 따뜻한 또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이 비현실적인 이상을 현실로 바꾸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부산반빈곤센터의 최고운 대표와 임기헌 활동가는 부산시 공영장례 사업을 알리는 운동을 펼치면서 공영장례 부고가 있을 때마다 빈소를 찾아 고인의 마지막을 배웅한다. 지난봄 ‘부산 시민 공영장례 조문단 양성 과정’을 운영한 후로는 수료생을 포함해 다수의 인원이 조문 활동을 계속 이어 나가고 있다. 나 또한 양성 과정을 수료했지만, 실제 빈소를 방문한 숫자는 한 번에 그쳐 부끄럽다. 앞으로는 한 달에 한 번이라도 꾸준히 공영장례 조문을 실천해 볼 작정이다.
만약 당신도 관심이 있다면, 부산시 16개 구군 홈페이지의 공영장례 부고 게시판을 찾아보길 권한다. 그곳에서 누군가의 부고를 확인하게 된다면, 마음으로나마 고인을 애도해 보자.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 우리 어느 빈소에서 마주치자. 함께 절을 올리자. 서로가 서로의 상주가 되어주고 서로가 서로의 조문객이 되어주는 ‘배웅공동체’를 꿈꾸며. 먼저 떠난 누군가의 죽음도 언젠가 닥쳐올 나의 죽음도, 모두 외롭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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