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칼럼] 두고 볼 수만은 없는 ‘급발진·고령 사고’
정부와 정치권 적극 나서 억울한 피해·희생자 없게 법과 대책 마련 서둘러야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터져 나와 사람들을 충격에 빠지게 하는 일들이 많다. ‘차량 급발진 의심 사고’와 ‘고령 운전자 사고’도 여기에 포함된다. 최근 서울의 시청역 인근에서 일어난 비극은 이 두 가지 사안을 다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했다. 60대 후반이 운전한 차량이 일방도로에서 200m가량 역주행하다 인도를 덮쳐 9명이 목숨을 잃고 7명이 다쳤다. 사상자 규모가 워낙 커 어떤 요인이 참사로 이어졌는지에 대해 국민의 시선이 쏠린다.
운전자는 급발진을 주장하고 있다. 사고 위험을 알아챈 뒤 급하게 제동했지만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제시했다. 목격자 중에서도 급발진으로 보인다는 증언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반론도 적지 않다. 이들은 고령 운전자의 상황 판단 미숙 등을 거론한다. 현재 경찰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수사 중이다. 사안의 심각성 및 파장을 고려해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결론을 내릴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비극은 곧 밝혀질 원인 규명과는 별개로 우리 사회 내의 해묵은 논쟁에 재차 불을 붙였다. 우선 급발진 의심 사고와 관련해서는 차량 제조사에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그 중심에는 ‘제조물 결함으로 인한 손해의 배상책임은 손해를 입은 피해자가 손해의 존재 및 손해액 규모 등을 입증해야 한다’고 명시된 현행법 조항을 바꿔야 한다는 요구가 자리한다. 이 법을 적용하면 대부분의 자동차 정보를 제조사가 갖고 있는 현실에서 운전자가 자신의 책임이 없다는 증거를 내놓기는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시민단체 등에서는 오래전부터 업체와 운전자 간 ‘정보 불균형’을 해소 못 하면 급발진 의심 사고 당사자가 법정 공방까지 해야 하는 지루한 다툼에서 이길 가능성은 전무하다는 논리를 전개한다. 이들의 주장은 수치로도 증명된다. 더불어민주당 윤종군 의원이 교통안전공단으로부터 받은 자료를 보면 2017년부터 올해 6월까지 236건의 급발진 의심 신고가 접수됐다. 하지만 운전자의 책임이 아니라는 답변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법원 판결에서도 운전자의 손을 들어준 사례는 없다.
정치권도 이런 여론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21대 국회 때 의원 4명이 급발진 의심 사고와 관련된 5건의 법안을 발의했다. ‘결함 및 손해의 증명 또는 손해액 산정에 꼭 필요한 경우 제조업체는 영업비밀이라고 하더라도 자료를 제출해야 한다’는 것 등이 주요 내용이다. 이들 법안은 이른바 ‘도현이 법’으로 불렸다. 지난 2022년 12월 할머니가 몰던 차량에 탔다가 급발진 의심 사고로 숨진 12살 이도현 군의 비극이 재연되지 않게 하자는 의미에서 이런 명칭이 붙었다.
그러나 발의된 법안들은 제대로 논의되지 못한 채 21대 국회 임기 종료와 함께 자동 폐기됐다. 이렇게 되자 국민의 시선은 다시 정치권으로 향한다. 최근 도현 군의 아버지가 올린 법안 제정 재청원에는 5만 명 이상이 찬성했다. 사사건건 충돌하는 여야지만 법 제정에는 찬성하는 분위기다. 더불어민주당은 급발진 의심 사고 발생 때 제조사가 차량 결함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등을 규정한 ‘제조물 책임법’ 개정안을 이르면 이달 중에 발의하기로 했다.
고령 운전자 사고와 관련된 법안은 지난 5일 국민의힘 한지아 의원이 대표발의했다. 자동차에 급가속 억제 장치를 장착하거나 구비된 차량을 사면 비용의 일부를 국가가 지원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정부는 지난달 내놓은 ‘2024년 교통사고 사망자 감소 대책’에 ‘고령 운전자 조건부 면허제’를 담았다. 그러나 교통약자의 이동권을 지나치게 제한하는 것이 아니냐는 역풍이 불자 하루 만에 이를 거둬들이는 촌극을 빚기도 했다.
물론 도현이 법 제정에 대해서는 제도 남용 우려 등 부정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자신의 잘못으로 사고를 낸 운전자가 무작정 급발진 때문이라고 우길 수 있어서다. 또 자동차 제조업체는 증거 공개 조항으로 인해 영업비밀과 관련된 자료가 노출될 가능성이 크다는 걱정을 할 수밖에 없다. 아직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고령자가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나이를 이유로 운전을 제한하자는 취지의 정책 역시 우리 사회에서 공감대를 얻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급발진 의심 사고와 고령 운전자 사고가 앞으로도 계속 첨예한 쟁점으로 떠오를 것이 분명한 만큼 어떤 식으로든 해결책이 나와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법 악용 가능성 등은 철저한 관리와 상응하는 엄벌을 통해 적극적으로 대처하면 된다. 교통약자 이동권 보장 대책은 지속적인 국민 여론 수렴을 통해 마련할 수 있을 터다. 가장 중요한 것은 더는 억울한 운전자·희생자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정부와 정치권의 발 빠른 움직임을 바란다.
염창현 세종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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