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선 133척 속으로 파고든 진격…31척 격파하자 왜군 퇴각
*이달 4일부터 10월 8일까지는 일기가 두 개로 중복되는바, 뒤에 적은 일기를 앞의 것과 대조해 보기 편하도록 지면 기사에서는 밑줄을 그어 표시하고, 인터넷 홈페이지에서는 첫머리에 # 표시를 별도로 한다.
- 왜선 200척 들이닥친 명량해전
- 여러 장수들 겁에 질려 뒷걸음
- 이순신 “도망간들 살 것 같으냐”
- 호통에 김응함·안위 적진 돌격
- 승전 후 당사도로 옮겨 밤 보내
9월14일[10월24일]
맑았으나 북풍이 크게 불었다. 임준영이 육지를 정탐하고 달려와서 말하기를, “적선 55척이 벌써 어란 앞바다에 들어왔다”고 하였다. 또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쳐 온 김중걸(金仲乞)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다. “이달 6일에 달마산(達摩山)에서 피란하다가 왜적에게 붙잡혀 묶여서 왜선에 실렸다. 이름 모르는 김해 사람이 왜장에게 청하여 결박을 풀어주더라. 밤에 김해 사람이 내 귀에 입을 대고 몰래 말하기를 「조선 수군 십여 척이 우리(왜군의) 배를 쫓아와서 혹 사람을 죽이고 혹 배를 불태웠으니 보복하지 않을수 없다. 여러 배를 불러 모아 조선 수군을 모조리 죽인 뒤 곧장 경강(京江, 한강)으로 올라가자」고 하더라.” 이 말을 비록 다 믿지는 못하겠으나 그럴 리가 없는 것도 아니므로 전라우수영에 전령선을 보내어 피란민들을 즉시 육지로 올라가도록 당부하였다.
#날이 맑으나 북풍이 크게 불었다. 벽파정 맞은편에서 연기를 올려 신호를 보내기에 배를 보내서 데려왔더니 곧 임준영(任俊英)이다. 그는 정찰한 결과를 보고하기를 적선 200여 척 가운데 55척이 먼저 어란에 들어온 것이라고 하였다. 또 포로 되었다가 도망해 나온 김중걸(金仲桀)의 이야기를 전달하였다. 중걸이 이달 초6일 달야의산(達夜依山)에서 포로가 되어 결박을 당하고 왜선으로 끌려갔는데 다행히 임진년에 포로가 되었던 김해(金海) 사람이 왜장에게 빌어서 결박을 풀어놓고 같은 배에서 지내게 되었다. 한밤중 왜놈들이 잠이 깊이 들었을 때 그 김해 사람은 왜놈들이 서로 의논하던 것을 들은 대로 귀에 대고 다음과 같이 소근소근 이야기해 주었다. “조선 수군 10여 척이 우리 배를 추격해서 쏘아 죽이고 불질러 태웠다. 이것은 아주 통분한 일이다. 각처의 배를 불러 모아 합력해서 조선 수군을 섬멸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바로 서울로 올라가야 한다.” 이 말을 다 믿을 수는 없으나 혹 그럴 수도 없지는 않다. 곧 전령선(傳令船)을 보내서 피란민들을 타일러 육지로 올라 가게 하였다.
9월15일[10월25일] 맑음.
조수의 흐름을 따라 여러 배를 거느리고 우수영 앞바다로 들어가 거기서 머물러 잤다. 밤의 꿈에 이상한 징조가 많았다.
#날이 맑았다. 조수를 타고,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우수영 앞 바다로 진을 옮기었다. 그것은 벽파정 뒤에 명량(鳴梁)이 있는데 적은 수효의 수군으로서는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러 장수를 불러 모아서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고 꼭 살려고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고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능히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곧 오늘의 우리를 두고서 이른 말이다. 너희들 여러 장수들이 오늘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긴다면 군율대로 시행해서 작은 일일망정 용서치 않겠다”고 엄격하게 약속하였다. 이날 밤 꿈에 신인(神人)이 나와 가르쳐 주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저렇게 하면 진다”고 하였다.
9월16일[10월26일] 맑음.
이른 아침에 망군(望軍)이 와서 보고하기를 “적선이 무려 200여 척이 명량(鳴梁)을 거쳐 곧장 진 치고 있는 곳으로 향해 온다”고 했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거듭 약속한 뒤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133척이 우리의 배를 에워쌌다. 지휘선(上船)이 홀로 적선 가운데로 들어가 탄환과 화살을 비바람같이 발사했지만, 여러 배들은 바라만 보고서 지휘선을 구하러 나오지 않아 앞일을 헤아릴 수 없었다.
지휘선 위에 탄 군사들이 서로 돌아보며 얼굴빛이 새파랗게 질리는 것을 보고 나는 부드러운 얼굴로 “적이 비록 천 척이라도 감히 우리 배를 곧바로 공격하지 못할 것이니 절대로 동요하지 말고 힘을 다해 적을 향해 쏘아라”고 타일러 말했다. 다른 여러 배들을 돌아보니, 이미 1마장(馬場, 1마장은 약 400미터임)쯤 물러나 있었고, 우수사 김억추(金億秋)가 탄 배는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
지휘선을 돌려 곧장 중군(中軍) 김응함의 배에 다가가 먼저 그의 목을 베어 효시하고자 하였으나 내 배가 머리를 돌리면 여러 배들이 차츰 더 멀리 물러나고 적선은 점차 다가와서 사세가 낭패될 것 같았다. 그래서 다시 중군에게 명을 내리는 휘(麾, 깃발)와 초요기(招搖旗)를 세우니 그때서야 김응함의 배가 점차 내 배로 가까이 오고 거제현령 안위의 배도 다가왔다.
내가 뱃전에 서서 직접 안위를 불러 말하기를, “안위야! 네가 정녕 군법에 죽고 싶으냐? 물러나 도망간들 살 것 같으냐?”라고 했다. 이에 안위가 황급히 적진 사이를 뚫고 들어가니, 적장의 배와 다른 두 척의 배가 안위의 배에 개미처럼 달라붙었다. 안위의 격군 7, 8명마저 물에 뛰어들어 헤엄치고 있으니 안위의 배는 거의 구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도 나는 배를 돌려 곧장 안위의 배 쪽으로 들어갔다. 안위의 배 위에 있는 군사들도 결사적으로 활을 쏘고 내가 탄 배 위의 군관들도 빗발치듯 활을 쏘아 적선 2척을 남김없이 모두 섬멸하였다. 천행이다. 천행이다.
우리를 에워쌌던 적선 31척도 격파하니 여러 적들이 저항하지 못하고 다시는 침범해 오지 못했다. 그곳에 정박하고자 했으나 물이 빠져 배를 정박하기에 알맞지 않으므로 건너편 포구로 진을 옮겼다가 달빛 아래 당사도(신안군 임태면 당사리)로 옮겨 거기서 밤을 지냈다.
#날이 맑았다. 이른 아침에 특별 정찰 부대가 보고하기를 “적선이 수효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명량(鳴梁)으로 해서 바로 우리가 진치고 있는 곳을 향하여 온다”고 하였다. 곧 여러 배들로 하여금 닻을 올려서 바다로 나가게 하였는 바 적선 130여 척이 우리 배를 에워싸고 대들었다. 우리 편의 여러 장수들은 적은 군사로 많은 적을 대적하는 것이라 스스로 낙심하고 모두 회피할 꾀만 내는데 김억추(金億秋)가 탄 배는 벌써 2마장쯤 밖에 나가 있었다.
내가 노 젓기를 재촉하고 앞장을 서서 지(地)자 및 현(玄)자 등 각종의 총통을 어지럽게 쏘아 탄환은 폭풍우 같이 쏟아지고 군관들이 배 위에 총총히 들어서서 화살을 빗발처럼 쏘니 적의 무리가 감히 대들지 못하고 떨어졌다 가까워졌다 하였다. 그러나 여러 겹 포위 속에 들어서 형세가 아주 위태한 지경이라 배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서로 쳐다보고 얼굴빛이 질리었다. 나는 부드럽게 타이르기를 “적선이 제아무리 많아도 바로 덤벼 들지는 못할 것인즉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더 일층 적을 쏘는데만 전력을 들이라”고 일렀다.
여러 장수들의 배를 돌아 보니 먼 바다에 물러가 있고 내 배를 돌이키어 군령을 내리자니 적들이 더 대어 들 것이라 오도 가도 못할 딱한 형편이 되었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호각을 불어 중군에게 군령을 내리는 기(旗)를 세우라고 하고 또 초요기(招搖旗)를 세우라고 하였다. 중군장(中軍將) 미조항 첨사 김응함의 배가 점점 내 배 가까이 왔으며 그보다 거제현령 안위의 배가 먼저 왔다. 내가 배 위에 서서 친히 안위를 불렀다. “안위야 군률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들 어디서 살수 있을것 같으냐!” 안위가 황망히 적진 속으로 돌진하여 들어갔다. 내가 또 김응함을 불렀다. “중군(中軍)인 네가 멀리 피해 가서 대장을 구하지 않았으니 그 죄를 어찌 면하겠느냐. 당장에 참할 것이나 적의 형세가 급해서 아직은 참는다. 빨리 공을 세워서 죄를 벗어라.”
그래서 두 배가 적선을 향해 공격할 때 적장이 탄 배가 수하의 배 2척과 한꺼번에 안위(安衛)의 배로 대들어서 기어 올라 가려고 하였다. 안위(安衛)와 그 배 위의 사람들이 죽을 힘을 다해서 혹 작대기로, 혹 긴 창으로, 또 혹 멍우리돌로 기어 오르려는 놈들을 수없이 쳐부수다가 기진맥진할 때 내 배가 뱃머리를 돌려 쫓아 들어 가서 빗발치듯 마구 쏘아댔다. 세 배의 적이 거진 다 엎어지고 자빠졌을 때 녹도만호 송여종(宋汝悰)과 평산포 대장 정응두(丁應斗)의 배가 뒤쫓아 와서 합력해 쏘아 죽여 적은 한놈도 살아 내빼지 못하였다.
투항한 왜인 준사(俊沙)는 안골에 있는 적진으로부터 항복해 온 자인데 내 배 위에 있다가 바다에 빠져있는 적을 굽어보더니 그림 무늬의 붉은 비단 옷을 입은 자가 바로 안골에 있던 적장 마다시(馬多時,구루시마 미치후사)라고 하였다. 내가 무상(無上, 물긷는 군사) 김돌손(金乭孫)을 시켜 갈구리로 낚아 올린즉 준사(俊沙)가 좋아서 날뛰면서 분명히 마다시라고 하기에 곧 토막 토막 베어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이를 본 적은 기세가 푹 꺽였다. 때마침 물길이 역류에서 순류로 바뀌자 우리의 배들은 적이 다시 덤벼들지 못할 것을 알고 일시에 함성을 지르면서 쫓아 들어갔다. 지(地)자 현(玄)자의 총통을 놓아 그 소리가 강산을 뒤흔들며 활을 빗발처럼 쏘아대어 밀려가는 적선 31척을 쳐부수었다. 적선은 뱃머리를 돌려 퇴각하고 다시는 우리 수군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전에 있던 곳으로 배를 대려 한즉 물결도 험하고 바람도 거슬리며, 형세 또한 외롭고 위태하기 때문에 당사도로 옮겨 가서 밤을 지냈다. 이야말로 참으로 천행이다.
9월17일[10월27일] 맑음.
여올도(汝吾乙島,신안군 지도읍 어의리)에 이르니 피란민들이 무수히 와서 정박하고 있었다. 임치 첨사(홍견)는 배에 격군이 없어서 나오지 못한다고 했다.
#날이 맑았다. 어외도(於外島)에 이르니 피란선 무려 300 여 척이 먼저 와 있었다. 나주진사 임선(林愃), 임환(林懽), 임업(林業) 등이 와 보았다. 우리 수군의 승전을 듣고 다투어 치하하면서 양식을 가지고 와서 내 놓았다.
9월18일[10월 28일] 맑음.
그대로 그곳에 머물렀다. 임치첨사가 왔다.
#날이 맑았다. 그대로 어외도(於外島)에서 머물렀다. 내 배에 탔던 순천감목관 김탁(金卓)과 영노(營奴) 계생(戒生)이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고 박영남(朴永男), 봉학(奉鶴) 및 강진현감 이극신(李克新)은 탄환에 맞았으나 중상에는 이르지 않았다.
※ ㈔부산여해재단·국 제 신 문 공동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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