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대포로, 울산으로 공짜 당일치기 여행 “자식보다 낫네”
- 바다 보고싶을땐 1호선 종점행
- 동해선 타고 울산 태화강역도
- 삼삼오오 도시락 들고 나들이
- 운동 겸 우울감 사라지는 효과
- “자식한테 어디 가자고 말 못 해
- 눈치 안 보는 도시철이 효자다”
“바다를 보러 다대포에 갈까. 낙동강을 보러 경남 양산에 갈까. 그도 아니면 사람이 많은 서면은 어때?”
국제신문 77번 버스의 이번 행선지는 부산 서면이다. 이곳은 부산 도시철도 1호선과 2호선이 만나는 부산 교통의 중심지다. 조금 옆 부전역은 부산 도심과 울산까지 연결하는 동해선 광역전철도 탈 수 있다. 65세 이상 나이를 증명할 수 있다면 푯값은 ‘공짜’다. 취재진은 어르신의 발이 되어주는 도시철도 속으로 들어가 “도시철도가 자식보다 낫다”고 얘기하는 어르신을 만났다.
▮여행수단 된 도시철도
부산 도시철도 1호선 서면역사 내 한 분수대 앞. 가벼운 옷차림의 노인 김모(80) 할아버지가 연신 휴대전화를 쳐다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마침내 약속 시간이 됐는지, 표 발매기 앞에 서서 노인 우대권을 한 장 뽑았다. 김 할아버지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1호선이 종점인 다대포해수욕장역. 경로석에 앉아 여유롭게 휴대전화를 보고 있지만, 속마음은 외국 여행을 가는 젊은이 못지 않게 설렌다.
긴 비행 끝 기장이 착륙 전 방송을 하듯, 종점인 다대포해수욕장에 도착했다는 기관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침내 도시철도를 벗어나 바닷가와 연결된 출구로 나가자 동년배 노인 3명이 더 와있었다. 네 명의 노인은 각각 부산진구 중구 사하구 서구에서 도시철도를 타고 이곳으로 당일치기 여행을 왔다.
노인에게 도시철도를 타고 하는 여행은 ‘가성비 갑’의 여가 활동이다. 일부 노인은 어느 동네에 행사가 열려 공짜로 점심을 해결할 수 있다면 어디든 간다. 김 할아버지가 이날 다대포로 행선지를 정한 것도 간식을 나눠주는 무료 행사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동해선을 타고 울산 태화강도 가고, 2호선을 타고 양산에도 놀러 간다. 교통비가 안 드니 소화도 시킬 겸 짧은 여행으로 제격이다. 여행 가서도 돈 안 들어가는 걸 주로 하다 보니 우리끼리 ‘거지 같다’고 농담도 한다. 그러나 하루에 쓰는 돈이 1만 원이 안 되는데 교통비까지 나가면 나같은 노인은 정말 갈 데가 없다. 그나마 도시철도로 여행도 하면서 운동도 하니, 우울한 마음도 사라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 할아버지와 함께 온 이모(84) 할아버지는 “보통 월·화요일은 양산, 목·금요일은 서면으로 주로 간다”며 “공짜 공연하는 날에 맞춰 도시철도를 탄다. 혼자 가면 심심하니 동년배 친구끼리 어울려서 다닌다”며 웃었다.
▮동해선도 인기 만점
부산 도시철도뿐만 아니라 동해선 광역전철도 무임승차로 여행하는 노인에게 인기 노선이다. 동해선은 2016년 12월 부산 부전역~일광역이 개통한 뒤 2021년 12월 울산 태화강역까지 연결됐다. 이 덕분에 부산 노인은 울산까지, 울산 노인은 부산까지 무료로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됐다. 실제로 부전역 인근에서는 울산에서 부산으로 여행 온 노인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울산 북구에 사는 박모(79) 할아버지는 거의 매일 울산 태화강역에서 부전역으로 여행을 온다. 박 할아버지는 “전철을 타니 여행은 여행이다. 울산에도 집 근처 공원이 있고 산책할 곳도 있지만 잠깐 있을 정도밖에 안 된다. 전철이 공짜라 이곳까지 오면서 여행 기분 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월남전에 참전했다 고엽제 피해로 국가유공자가 됐다. 그 덕에 연금이라도 나와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진짜 어떻게 살았을까 아찔하다. 돈이 더 있다면 멀리 여행 다니고 싶다”고 말했다.
부전역에서 삼삼오오 모여 기장 바다로 나들이 가는 노인들도 한 손에 도시락을 꼭 쥔 채 해맑은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부산진구에 사는 이모(72) 할머니는 “집에만 있으면 할 것도 없고 답답해서 친구들과 나왔다. 도시락도 그냥 집에서 먹다 남은 음식을 싸 와서 일광해수욕장에서 친구와 나눠 먹으려고 한다”며 “자주 나가지는 못해도 이렇게 한 번씩 놀러 가는데 교통비가 안 들어 부담이 없다. 부전역까지 오는 도시철도도 공짜고, 일광까지 가는 전철도 공짜다”고 말했다.
친구 김모(72) 할머니도 “평소에는 돈이 아까워서 버스도 잘 안 탄다. 주머니 사정 가벼운 우리한테는 도시철도나 전철이 효자”라면서 “자식들한테 어디 태워 달라기도 눈치가 보일 때가 있는데 그럴 땐 그냥 지하철 타는 게 속 편하다”고 거들었다.
영도구에 사는 정모(83) 할아버지는 최근 사회 분위기에 서운함도 토로했다. 그는 “고령의 운전자가 피해를 준 사고가 최근 잇따라 발생하면서 운전 면허를 반납하라는 목소리가 높지만 도시철도 노인 우대 혜택을 바라보는 시선도 여전히 차갑지 않느냐”며 “도시철도라도 이렇게 탈 수 있으니 우리가 밖으로 나가는 거고, 그래야 조금이라도 건강을 챙길 수 있는 것 아니냐. 젊은 사람에게 불편을 주지 않을 테니 도시철도를 이용하는 노인들을 타박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전했다.
※ 이 기사는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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