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가 힘주는 '장주기 ESS'…세계 전력시장 패러다임 바꾼다

김리안 2024. 7. 7.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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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EP INSIGHT
전기차 캐즘·공짜전기 급증…ESS 산업 '탄력'
테슬라, 에너지저장이 '효자'
재생에너지 발전량 넘치지만
전력망 부족으로 '공짜' 방출
ESS가 대안으로 급부상
높은 신뢰성 '장주기 ESS'
8시간 이상 방전하고 대용량
20년 내 2230억弗 시장 예고
리튬 포함 안돼 화재에 안전
중국산 배터리 견제 효과도
美, 장주기 ESS 보조금 지급
日, NaS 배터리 첫 상용화
韓 에이치투, VRFB로 美 수출
이 기사는 국내 최대 해외 투자정보 플랫폼 한경 글로벌마켓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최대 규모 에너지저장장치 단지의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잉여 전기를 싼 가격에 저장했다가 비쌀 때 되파는 에너지저장장치(ESS)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유럽과 미국 등에서 들쭉날쭉한 신재생에너지 전기 공급을 안정화하기 위해 남는 전기를 저장하려는 발전사들의 ESS 수요가 급증하고 있어서다. 배터리업계는 최근 성장세가 주춤한 전기차 시장의 ‘캐즘’(일시적 수요 둔화)을 극복하기 위해 ESS 생산량을 빠르게 늘리고 있다. 양쪽의 이해관계가 맞물리며 시장이 급격히 확대되는 양상이다.

 주목받는 ESS 시장

미국 상장사인 ESS 기업 플루언스에너지의 줄리언 네브레다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파이낸셜타임스(FT)에 “우리의 최대 경쟁사는 테슬라”라고 말했다. 전기차로 유명한 테슬라지만 배터리와 에너지저장업계에서도 최강자라는 점을 언급한 것이다. 테슬라는 2015년 배터리·에너지저장 사업을 시작한 후 파워월(가정용), 파워팩(기업용) ESS 등을 생산하며 입지를 넓혀왔다.

동서발전 울산화력에 설치된 에이치투의 바나듐레독스플로 배터리(VRFB) 에너지저장장치 솔루션. 에이치투 제공


매출 비중은 아직 미미하다. 테슬라 전체 매출에서 전기차 사업 비중은 지난해 기준 81%였는데 배터리·에너지저장 비중은 6.24%에 불과했다. 하지만 두 사업의 성장세는 확연히 다르다. 연간 전기차 매출 증가율은 2021년에는 70%였지만 이듬해 51%로 줄었고 지난해에는 16% 늘어나는 데 그쳤다. 반면 배터리·에너지저장 부문 매출은 2021년 50%, 2022년 80%, 지난해 74%로 폭발적인 성장세다. 파워월은 올 1분기에도 16억달러에 달하는 역대급 판매액을 기록했다. 테슬라는 “에너지저장 부문이 가장 높은 수익률을 거두는 사업부가 될 전망”이라고 했다.

수요가 폭증하고 있는 것이 원인이다. 유럽과 미국, 중국, 호주 등에서는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 발전량이 전력망에 연결할 수 있는 수준을 초과하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다. 공급 초과 시기에 남아도는 전기를 받아줄 ESS가 필요한 이유다. 유럽에선 전기 가격이 ‘0원’ 이하로 떨어지는 ‘마이너스 전기료(negative price)’ 기간이 지난해 총 542시간에 달했다. 사상 최고치다. 1년에 22일 동안은 전기값을 내기는커녕 전기를 소비하는 쪽(주로 전력망 업체)이 되레 돈을 받는다는 얘기다.

정책 지원도 뒤따르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2022년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통해 ESS 프로젝트에도 사상 첫 세금 공제 혜택을 부여했다. 자국의 배터리 공급망을 강화하고 친환경 전기 생산량을 늘리기 위한 조치였다. 지난 5월엔 무역법 301조에 따라 2026년부터 중국산 배터리 관세율을 25%로 높이기로 결정했다. 종전 관세율의 3배 수준이다.

 美, 중국 배터리 침공 견제

미국 정부의 배터리 관세율 인상 조치는 대(對)중국 무역 통제라는 목표도 있지만, 배터리업계의 ‘표준 싸움’과도 관련이 깊다. 미국이 지원하는 배터리 산업이 업계의 우위를 선점하도록 하려는 조치라는 것이다.

현재 중국은 리튬·인산철(LFP) 배터리를 대량 생산해 밀어내기식으로 수출하고 있다. 리튬이온 배터리는 통상 방전(발전) 시간이 4시간 이하인 단주기 ESS용으로 쓰인다. 미국은 중국과 달리 장주기 ESS(LDES)를 지원하고 있다. 업계는 이번 중국산 배터리에 대한 관세율 인상을 단주기 ESS 시장을 겨냥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ESS 운영사 스피어민트에너지의 앤드루 워랜치 최고경영자(CEO) 등은 “중국산 저렴한 배터리를 써야 ESS 설치량을 늘릴 수 있는데 정부의 관세 조치가 이를 방해할 것”이라는 우려를 제기하기도 했다.

미국은 2020년 10월 세계 최초로 장주기 ESS 입찰을 진행하기도 했다. 당시 캘리포니아는 500㎿(메가와트)의 용량과 8시간의 방전 지속 시간을 가진 프로젝트를 발주했다. 이후 뉴욕, 텍사스 등에서도 8시간, 10시간 이상 방전하는 ESS 사업을 잇달아 시작했다. 높은 발전 신뢰성을 가진 장주기 ESS를 확충해 전력망 안정성을 개선하겠다는 취지에서다. 미국은 중국산 배터리 침공을 견제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2022년 1월 캘리포니아 주정부는 3억8000만달러에 달하는 장주기 ESS 보조금 지급안을 발표할 때 아예 ‘리튬이온 기반 배터리는 지원 대상에서 제외한다’고 선을 그었다. 이미 중국 기업들이 장악한 LFP 배터리가 덤핑 공세로 미국 ESS 산업에 침투하는 것을 막으려는 목적으로 해석됐다. LFP 배터리도 셀 설계 과정에서 조합 비율을 조절하고 운영 단계에서 소프트웨어를 통해 충·방전 속도를 조절하면 장주기 ESS 시장에 진출할 수 있기 때문에 이에 ‘견제구’를 던졌다는 것이다.

 한국은 VFB에서 두각

미국의 견제구엔 기술적인 이유도 있다. 리튬이온 기반 배터리는 짧은 방전 시간 외에도 근본적으로 화재에 취약하다는 단점을 안고 있다. 가연성 유기 전해질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9월 테슬라의 호주 퀸즐랜드주 메가팩공장에서 발생한 화재는 사흘간 지속될 정도로 강한 폭발력을 발휘했다. 바이든 행정부가 작년 9월 발표한 3억2500만달러 규모의 장주기 ESS 지원 프로그램도 리튬이온 배터리 이외의 ESS 기술을 중점적으로 육성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미국 북서부에너지효율위원회(NEEC)에 따르면 향후 20년 안에 장주기 ESS 시장은 2230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됐다.

장주기 ESS에 쓰이는 대표적인 것은 나트륨황(NaS) 배터리, 바나듐레독스플로 배터리(VRFB) 등이 있다. NaS 배터리는 일본 세라믹 기업 니혼가이시가 최초로 개발해 상용화하는 데 성공했다. 니혼가이시의 NaS 배터리는 독일 바스프가 판매를 독점하고 있다. 한국이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VRFB다. 광물 바나듐을 기반으로 한 VRFB는 에너지 밀도가 낮아 크기가 크지만, 화재 위험성이 극히 드물다는 평가를 받는다. 방전 시간은 최소 6시간 이상을 자랑한다. 한국 VRFB 제조사 에이치투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20MWh(메가와트시)짜리 장주기 ESS 프로젝트를 수주한 데 이어 3월 스페인에도 8.8MWh 장주기 ESS를 수출하기로 했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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