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병, 우울증, 공황… 모든 질병은 사회적이다 [전쟁과 문학]

이정현 평론가 2024. 7. 7.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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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쿠프 전쟁과 문학 26편
그레이스 M. 조 「전쟁 같은 맛」
전쟁 겪고 미국으로 이주한 군자
미국에 닿았지만 차별에 시달려
조현병 걸려 외부 세계와 단절
그런 엄마의 과거 추적하는 딸
“모든 질병은 사회적인 것”

강제 노동, 한국전쟁, 기지촌, 미국 이주…. 사회학자 그레이스 M. 조가 저술한 「전쟁 같은 맛」에는 그의 엄마 '군자'의 삶이 들어 있다. 유년기에 겪은 공포, 낮은 사회경제적 지위, 성적 트라우마, 이민 경험과 인종 차별 속에서 조현병을 앓은 군자는 낯선 미국 땅에서 한국 음식을 만들며 고통을 이겨내려 했다. 이 책은 엄마의 애달픈 삶을 따라가면서 '모든 질병은 사회적이다'는 메시지를 남긴다.

한국전쟁 당시 여성들이 선택할 수 있었던 일자리는 공장과 기지촌이었다. 사진은 쇠락한 동두천 기지촌.[사진=연합뉴스]

1970년대 미국의 시골 마을에서 엄마는 '블루베리 여사'로 불렸다. 엄마는 숲에서 달래와 우엉, 블루베리를 땄고, 지붕에서 고사리를 말렸다. 엄마는 김치를 담그려 '나퍼 캐비지'라고 부르는 배추를 찾으러 다녔다.

이방인을 경계하는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이 만든 한국음식을 나눠줬다. 엄마는 한국에서 상선 선원인 미국인 남성과 결혼했다. 1972년 여름, 부산에서 자녀들을 데리고 미국 워싱턴주 작은 마을 셔헤일리스로 이주했다.

"함 묵자." 어머니는 김치 한 통을 손에 들고 '모국어'로 말했다. 당시 미국에는 한국전쟁 후 이주한 다문화가정 자녀나 전쟁 고아들이 늘고 있었다. "엄마는 이 아이들에게 김치만은 떨어지지 않게 하겠노라 작심했다. 엄마는 아이들을 보자마자 당신이 먹여야 할 입이라는 걸 알아봤고, 잠시나마 그 애들이 잃어버린 한국 엄마가 돼줬다."

어머니의 한국 이름은 '군자(1941~2008년)'였다. 군자의 딸 그레이스 M. 조는 미국에서 성장해 브라운 대학과 하버드 대학원을 거쳐 뉴욕 시립 스태튼아일랜드 대학의 사회학과 교수가 됐다. 엄마가 사망한 후 그레이스는 자신이 몰랐던 어머니의 과거를 조사하는 연구를 진행했다.

엄마의 삶에는 인종과 젠더, 전쟁과 디아스포라(diaspora)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레이스는 오랜 연구 끝에 엄마의 삶을 복원한 저서 「전쟁 같은 맛」을 출간했다. 이 책은 2021년 전미도서상 논픽션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고, 2022년 아시아ㆍ태평양 미국인 도서상을 수상했다.[※ 참고: 디아스포라는 한 민족이 기존에 살던 땅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 집단을 형성하는 것, 또는 그런 집단을 일컫는 말이다.]

군자는 일본으로 강제징용된 한국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군자의 가족은 광복 후 귀국했다. 곧이어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그녀는 아버지와 오빠, 작은언니를 잃었다. 생계를 이어갈 수 없었던 군자는 부산으로 갔다. 군자는 미군기지 앞 기지촌에서 일했다.

"젊은 여성에게 주어지는 일자리라곤 공장 아니면 미군기지뿐이었다. 기지촌 일자리는 공장보다 노동시간이 짧았고, 수입도 더 좋았다. 결정적으로 기지촌은 미국의 화려함을 약속했다. 미군 병사와 가정을 꾸려 미국으로 이민 갈 가망도 줬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엄마를 비롯한 수백만명의 여성에게 이는 해볼 만한 도박이었다."

미군기지에서 여자들은 다양한 일을 했다. 한국인들은 미국을 동경하는 만큼 미군기지에서 일하는 한국 여성들을 혐오했다. 그들에게는 '양공주'라는 낙인이 찍혔다.

미군기지에서 일하는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낙인은 너무도 심각해서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군자는 기지촌에서 한 미국인을 만났다. 그는 한국, 괌, 필리핀, 베트남의 미군기지에 군수품을 공급하는 상선의 선원이었다. 군자는 아들을 낳아 거의 홀로 키웠다.

훗날 남편이 될 미국인은 당시 베트남에 주둔하고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 사회에서 흔히 '혼혈아'라 불리던 다문화가정 자녀들은 철저한 따돌림을 받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양부인과 혼혈 아동'의 존재를 '사회적 위기'라고 명명하면서 '미군 아기 문제'를 입양으로 해결하려는 대통령령을 선포했다. 한국인 남성들에게 군자와 같은 여성은 열등감과 혐오를 동시에 자극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군자는 혼혈인 자식을 포기하지 않았고, 미국에서 새로운 가정을 꾸리겠다고 결심했다. 딸 그레이스를 낳은 후 군자는 마침내 미국으로 갈 수 있었다.

그토록 동경했던 미국에 닿았지만 그녀를 기다리는 건 또 다른 차별이었다. '칭크(Chinkㆍ중국인의 멸칭)' '잽(Japㆍ일본인의 멸칭)'이라 불러대는 멸시를 받은 그레이스는 처음에는 "나는 한국인이야"라고 항변한다. 항변은 차츰 "나는 반半한국인이야" "우리 아빤 미국 사람이야"라는 변명으로 바뀐다.

엄마는 불굴의 의지로 미국 사회에 적응하려고 애썼다. 군자는 마을 사람들에게 한국음식을 만들어주고 미국음식을 익히며 인심을 얻었다. 전쟁으로 제대로 배우지 못했던 군자는 딸이 미국에서 훌륭한 학자로 성장하길 바랐다. 군자의 바람대로 그레이스는 명문 브라운대에 진학했다.

그레이스가 열다섯 살이 된 1986년 무렵부터 군자는 주변인들이 자신을 감시하고 해치려 한다는 강박증이 생겼다. 군자는 집 밖으로 나가길 거부하면서 세상과 스스로 단절했다. 대학 생활과 사업 등으로 바쁜 가족들은 군자를 방치했다.

1990년대에 군자는 공식적으로 '조현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레이스는 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하면서 어머니가 기지촌 여성으로 일하다가 아버지를 만났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어머니의 과거와 사회적 죽음에 부채의식을 느꼈다.

모든 질병은 사회적이다. 군자는 오늘날 정신의학에서 거론되는 조현병 발병의 사회적 요인 대부분을 안고 있었다. 유년기에 겪은 공포, 낮은 사회경제적 지위, 신체적 학대, 성적 트라우마, 이민 경험, 인종차별…. 엄마의 과거를 추적하면서 그레이스는 엄마의 행동에 담긴 의미를 하나씩 알아차린다.

그레이스 M. 조는 어머니 '군자'의 삶을 글로 녹여냈다. 사진은 한국을 방문한 그레이스 M. 조와 아들 펠릭스 군.[사진=연합뉴스]

특히 엄마의 음식 만들기는 아픈 기억들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는 안간힘이었다. 음식을 거의 먹지 않는 엄마에게 밀크 파우더(우유 분말)를 먹이려고 하자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난 이 맛을 참을 수가 없어. 전쟁과 같은 맛이 나."

먹고살려고 미군기지 쓰레기통을 뒤졌던 격렬한 굶주림의 기억은 엄마의 삶을 지배했다. 이주한 한국인들에게 엄마가 계속 김치를 나눠줬던 건 "매일같이 먹고 요리하는 일이, 우리가 남겨두고 떠나온 사람들과 장소에 우리를 연결해 준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연구를 진행하면서 그레이스는 "내 성공은 엄마가 명예를 회복하는 길이요, 내 교육은 엄마에게 다시 주어진 기회"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엄마의 과거를 추적하면서 그레이스는 자신이 살지 않았던 시대의 고통을 '맛'으로 통감한다.

"자, 김치 더 무라. 그레이스야, 우린 생존자야. 너는 무엇이든 견딜 수 있어." 저술을 마친 그레이스는 확신했다. 엄마는 '타락한 여자'나 '정신병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전쟁과 가난, 폭력과 차별을 이겨낸 명예로운 여성이라는 사실을.

이정현 평론가 | 더스쿠프
21cbac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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