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영욱의 올어바웃 스포츠] 1,000,000,000,000원짜리 간판 … LA경기장에 '가상화폐' 떴다
'혁명의 나라' 프랑스에서 열리는 2024파리올림픽은 유치전부터 개막 직전인 최근까지 크고 작은 갈등에 휩싸였습니다. 그중 하나는 올림픽을 위해 신설된 경기장 '아디다스 아레나'의 명칭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환경운동가 등 진보세력은 새 경기장에 여성 스포츠 참여와 여권 신장을 위해 뛰었던 여성운동가 알리스 밀리아의 이름을 붙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파리 시의회는 2022년 12월 아디다스에 경기장 명명권을 준다는 안건을 통과시켰습니다. 아디다스가 최대 7년간 매해 280만유로(약 41억원)의 명명권 사용료를 내는 대가로 말이지요. 밀리아의 이름은 경기장 앞 거리에 붙여졌습니다.
해외 스포츠 시장에서 경기장 명명권 거래는 꽤나 흔한 일입니다. 특히 미국에서는 기업들이 경기장 신축 비용보다 큰 금액의 명명권을 사는 일도 있었습니다. 국내에서도 신생 스포츠팀, 신축 구장을 중심으로 명명권 거래가 슬슬 자리 잡고 있습니다.
반면 이런 거래를 반대하는 팬들도 적지 않습니다. 팀 전력을 강화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다주는 것도 반대하면서까지 말입니다. 명명권은 누가, 그리고 왜 사는 것일까요. 그리고 팬들이 명명권 거래를 막으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북미 5대 리그 91%가 구장 명명권 판매
미국 로스앤젤레스(LA)의 두 프로풋볼팀 LA램스와 LA차저스의 홈구장 이름은 '소파이스타디움'입니다. 건설비용만 6조원 넘게 들며 세계에서 가장 비싼 경기장으로 불리는 소파이스타디움은 이름값도 만만치 않습니다. 2011년 설립된 미국 온라인 전문 금융기업 소파이는 20년간 명명권을 얻는 대가로 매년 3000만달러, 총 6억달러(약 8344억원)를 건네는 계약을 맺었습니다.
하지만 소파이스타디움도 이름값으로는 2위에 불과합니다. 2개의 전미농구협회(NBA) 팀을 포함 4개의 프로스포츠팀의 홈구장인 LA의 '크립토아레나'는 7억달러(약 9733억원)에 2021년부터 20년간 명명권을 얻는 거래를 맺어 이 분야 역대 최고 수준입니다.
이처럼 북미스포츠 경기장의 명명권 거래는 천문학적인 규모를 동반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기장 간판은 이미 팔렸지요. 2023년 기준 북미프로풋볼(NFL)과 NBA팀의 97%가 명명권 계약을 맺었습니다. 북미하키리그(NHL) 팀의 94%, 프로축구(MLS)와 메이저리그(MLB)도 각각 90%, 77%가 간판 이름을 대가로 돈을 받고 있지요. 5개 리그를 통합하면 10개 구장 중 9개(91%)가 이미 매진됐습니다.
명명권 마케팅 효과 '톡톡'
기업들이 돈을 들여 경기장 이름을 사들이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마케팅 효과가 지불한 금액을 상회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죠. 스포츠 경기가 전국으로 중계되면 카메라는 경기장 전경을 시도 때도 없이 비춥니다. 중계진은 이제 막 TV를 켠 팬들을 위해 경기가 벌어지고 있는 구장 이름을 수도 없이 말하곤 하죠. NFL 결승전인 슈퍼볼이 열리면 잭팟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올해 초 열린 슈퍼볼의 TV 광고비는 30초당 최대 700만달러(약 97억원)로 초당 3억원이 넘는 돈이 들어갔습니다. 슈퍼볼이 열렸던 애리조나의 스테이트팜스타디움의 이름은 2024년 포천 500대 기업에서 39위에 오른 보험업체 스테이트팜을 뜻하는 것이죠.
또 경기를 즐기는 팬들은 무의식적으로 구장 기업과 본인들이 응원하는 팀을 동일시할 수 있습니다. 팬들이 팀에 품는 긍정적인 감정이 자연스럽게 브랜드에도 스며들기 마련이죠. 미국 시카고 시민들이 제과업체 리글리에 호감을 갖는 것에는 MLB의 시카고컵스의 홈구장이 리글리 필드라는 것과 관계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설문에서도 이런 경향은 발견됩니다. 미국 티케팅 전문 사이트 일레벤트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59%는 좋아하는 스포츠를 후원하는 기업의 제품을 구매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답했습니다. 응답자의 21%는 특정 제품 브랜드가 스포츠 또는 스포츠단체를 후원한다는 이유만으로 해당 브랜드와 거래하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15%의 응답자는 마음에 들지 않는 스포츠나 스포츠팀을 후원하는 브랜드와 거래를 중단했다고도 했습니다.
테크기업까지 달려드는 '명명권'
구장 이름이 마케팅 효과가 있다는 것을 모두가 눈치채다 보니 명명권 계약의 역사를 살펴보면 어떤 기업이 공격적으로 사세 확장에 나서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1990년 초까지만 해도 미국 4대 스포츠(NFL, MLB, NBA, NHL) 경기장의 93%는 기업 스폰서 이름이 걸려 있지 않았습니다.
이 가운데 은행 및 금융 부문이 경기장 이름 지정 분야에 조금씩 개입하기 시작했습니다. 돈이 굴러가는 데 가장 민감한 은행·금융업이 먼저 시장에 뛰어들었고 항공업과 식음료판매업도 점점 구장 간판을 사는 데 속도를 냅니다. 최근에는 앞서 말한 크립토닷컴, 소파이 등 가상화폐와 온라인은행 산업 등 테크놀로지 기업들도 소비자에게 다가가기 위해 명명권 거래에 나서고 있지요.
국내에서도 명명권을 사들이는 구단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국내 명명권 시장의 특징은 구단의 자생적인 운영이 쉽지 않다 보니 모기업이 명명권도 함께 보유하고 있는 경우가 대다수라는 점입니다. 현재 KBO 1위를 내달리고 있는 KIA 타이거즈의 홈구장 이름은 '광주기아챔피언스필드'입니다. 2014년부터 25년간 연간 12억원을 내는 대가로 신축구장 이름에 KIA를 넣은 것이지요. 배구 V리그에 참가 중인 광주 페퍼저축은행 AI 페퍼스의 홈구장 이름도 페퍼스타디움입니다. 2021년 창단한 신생팀 페퍼스 모기업이 염주종합체육관이었던 경기장 이름을 사들였습니다.
유럽 축구팬, 구장 이름 판매에 "글쎄"
구매자는 톡톡한 마케팅 효과를 얻고, 구단과 팬은 대규모 자금을 얻게 됩니다. 명명권 거래는 이처럼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전형적인 윈윈 거래로 보입니다. 그러나 모든 팬들이 이를 반기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유럽 축구리그에서는 열성 서포터들이 이런 움직임을 반대합니다. 최근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PL) 최다 우승팀 맨체스터유나이티드의 새 운영진이 114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올드 트래퍼드의 명명권 판매를 고려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이와 관련해 서포터들은 경기장 명명권을 매각하기 전에 팬들과 협상이 필요하다고 촉구했습니다. 맨유서포터스트러스트(MUST)의 대변인은 "명명권 매각 여부는 오랫동안 팬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매우 감정적인 문제였다"며 "팬들은 이런 결정의 중심에 있어야 하며, 구단이 결정을 내리기 전 협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맨유의 전설 중 한 명인 에리크 캉토나는 "올드 트래퍼드에 특정 브랜드 이름이 들어간다면 더 이상 맨유의 팬이 아닐 것"이라며 반대 의견을 강하게 비치기도 했지요.
2021년 스페인 축구의 거함 FC바르셀로나가 자금난을 극복하기 위해 역사상 최초로 음원스트리밍 업체 스포티타이에 구단 명명권을 매각했을 때도 팬들의 반발이 거셌습니다. 실제로 유럽 축구 5대 리그(영국·이탈리아·스페인·독일·프랑스)의 구장 명명권 거래 수치는 북미 스포츠와 유의미한 차이를 보입니다. 영국은 30%, 스페인은 25%, 이탈리아도 25%에 불과합니다. 프랑스는 20%뿐이고 유일하게 독일(83%)만 활발하게 계약이 체결된 상황입니다.
이는 북미 스포츠와 달리 유럽의 스포츠팀들은 경기장의 역사와 전통이 살아 있는 오랜 터전에 자리 잡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북미 5대 프로스포츠 리그의 경기장 153개 중 1990년 이전에 공식 개장한 구장은 20개에 불과합니다. 21세기 들어서 문을 연 경기장이 절반이 넘는 84개에 달하죠. 반면 PL은 19세기에 문을 연 경기장이 20개 구장 중 9개에 달할 정도로 전통이 서려 있습니다.
"올드팬 향수 부르는 배려 있었으면"
스포츠 구장 명명권을 둘러싼 논쟁에 정답은 없습니다. 어린 시절 추억이 깃든 해태 타이거즈의 무등경기장이 그리운 만큼 광주기아챔피언스필드를 내달리는 기아타이거즈 선수들의 연봉에 명명권 거래로 벌어들인 수익이 들어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죠. 다만 거래에 앞서 오랜 팬들을 위로할 수 있는 배려가 스며들었으면 떠났던 팬들도 더 많이 돌아왔을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무등기아챔피언스필드'였다면 말이지요.
[올어바웃스포츠]는 경기 분석을 제외한 스포츠의 모든 것을 다룹니다. 스포츠가 건강증진을 위한 도구에서 누구나 즐기는 유흥으로 탈바꿈하게 된 역사와 경기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문화, 수백억 원의 몸값과 수천억 원의 광고비가 만들어내는 산업에 자리 잡은 흥미로운 내러티브를 알게 된다면, 당신이 보는 그 경기의 해상도가 달라집니다.
[류영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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