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유국과 보릿고개 [윤지로의 인류세 관찰기]

한겨레 2024. 7. 7.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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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유국' 석 자에서 나는 왜 '보릿고개'를 떠올렸을까.

가을에 수확한 쌀이 똑 떨어지고 보리는 여물지 않은 봄, 하는 수 없이 초근목피로 주린 배를 채웠다는 보릿고개, 태산보다 높다던 그 보릿고개에서 해방된 건 불과 50년 전의 일이다.

변변한 부존자원 없는 이 땅에서 인적자원 하나로 오늘의 대한민국을 일궜다는, 자랑스럽지만 동시에 서러운, 온 국민이 밤낮없이 공부하고 일하며 아등바등 살아내야 했던 그 기억이 산유국 석 자에 희망의 불씨를 지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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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6월3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브리핑실에서 열린 국정브리핑에 참석해 동해 석유·가스 매장과 관련해 설명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윤지로 | 에너지·기후정책 싱크탱크 ㈔넥스트 미디어총괄

‘산유국’ 석 자에서 나는 왜 ‘보릿고개’를 떠올렸을까. 가을에 수확한 쌀이 똑 떨어지고 보리는 여물지 않은 봄, 하는 수 없이 초근목피로 주린 배를 채웠다는 보릿고개, 태산보다 높다던 그 보릿고개에서 해방된 건 불과 50년 전의 일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신문에는 ‘절량(양식이 떨어짐)의 봄 고개를 넘는 농촌’을 그린 르포 기사가 흔했다.

한 사회가 오랫동안 혹은 강렬하게 겪은 경험은 집단기억을 형성한다. 어느 때건 각자의 희로애락이 있었겠지만 ‘우리 사회’는 1945년 이전을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로, 1990년대 말은 절망적인 국제통화기금(IMF) 시대로, 2002년은 붉은 티를 입고 대동단결했던 해로 기억한다. 어떤 집단기억은 그저 심상에 머물지 않고 특정한 서사를 낳는다. 지긋지긋한 보릿고개와 ‘잘 살아보세’의 구호, 그리고 마침내 이룬 한강의 기적은 “이만큼 먹고 살게 된 건 다 박정희 대통령 덕”이라거나 “당장 입에 풀칠할 걸 걱정하는 판에 민주주의니 인권이니 하는 건 배부른 소리였다”는 어르신들의 서사로 이어진다.

지난달 초 또 하나의 오래 묵은 집단기억이 포항 영일만 앞바다에서 떠올랐다. 윤석열 대통령이 “석유·가스 매장 가능성이 높다”고 발표한 다음 날 각 언론은 사설에서 진보·보수 가릴 것 없이 모처럼 한목소리를 냈다. ‘산유국의 꿈이 현실화한다면 감격스럽고 기쁜 일이다. 그런 만큼 김칫국부터 마시지 말고 차분한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리자.’ 지난 한 달간 만난 사회지도층의 생각도 비슷했다. 경상도에 지역구를 둔 한 국회의원은 “내년 시추 결과가 잘 나와서 지방선거까지 분위기가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했고, 한 대기업 임원은 “2002년처럼 온 국민이 하나로 뭉치는 계기가 되지 않겠냐”고 했다. 산유국의 꿈이 잘 영글길 바라는 마음이다.

보릿고개만큼이나 깊이 각인된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라는 집단기억이 산유국 세 글자에 조건반사처럼 ‘만세’라는 반응으로 이어졌다. 변변한 부존자원 없는 이 땅에서 인적자원 하나로 오늘의 대한민국을 일궜다는, 자랑스럽지만 동시에 서러운, 온 국민이 밤낮없이 공부하고 일하며 아등바등 살아내야 했던 그 기억이 산유국 석 자에 희망의 불씨를 지폈다. 그러나 집단기억은 박제된 표본이 아니다. 미국의 역사사회학자 제프리 올릭은 ‘기억의 지도’에서 ‘집단기억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일어나는 능동적인 지각과정으로 이해돼야 한다’고 말한다.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통해 새롭게 빚어가야 한다는 뜻이다.

모처럼 타오른 불씨에 찬물을 붓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지만, 화석연료의 시대는 저물고 있다. 프랑스와 덴마크, 그린란드, 스페인, 아일랜드는 시추를 이미 중단했거나 그럴 계획을 밝혔다. 얼마 전 방한한 노르웨이 국영 에너지회사 에퀴노르 회장이 “노르웨이도 북해 석유·가스 개발에 우여곡절이 많았다. 한국도 끈기 있게 하다 보면…”이라고 했다는 인터뷰가 언론에 실렸는데 기실 그가 한국을 찾은 목적은 해상풍력 사업 논의였다. 에퀴노르는 2030년 전체 설비투자의 과반을 재생에너지에 배정할 계획이다. 덴마크의 국영 석유·가스 회사로 출발한 동에너지는 재생에너지로 점차 전환해 2017년엔 간판까지 바꿔 달았는데 그게 바로 세계 해상풍력 1위 기업 오스테드다.

기름차는 전기차로, 가스레인지는 인덕션으로, 가스보일러는 히트펌프로, 나프타는 청정메탄올로 바뀔 세상에서 석유·가스의 위상은 지금과 같을 수 없다. 2035년의 석유·가스는 황금알이 아니라 계륵이 될 공산이 크다.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를 보릿고개처럼 애석하게 여기는 마음은 과거에 남겨두고 이제 기후위기 시대에 어울리는 새로운 집단기억을 만들어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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