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파 돌풍’ 이란 대선···국내외 변화 바람도 일으킬까

선명수 기자 2024. 7. 7.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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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잡이용 후보’ 평가받았던 유일한 개혁후보
1차 투표 ‘깜짝 1위’ 이어 대통령 당선 기세몰이
극심한 경제난·히잡 시위 탄압 등 여론 불만 반영
이란 권력 구조상 대외정책 급변 가능성 작아
히잡 단속 완화 등 내부적 개혁 추진 가능성
이란 대선 결선투표에서 승리한 마수드 페제시키안 당선인이 6일(현지시간) 테헤란에서 군중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이란 권력 서열 1위인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가 사실상 ‘친서방 후보’라고 공개 저격했던 개혁파 정치인이 이란 차기 대통령에 당선되는 이변이 일어났다.

6일(현지시간) 이란 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전날 치러진 대선 결선 투표에서 온건 개혁 성향인 마수드 페제시키안 후보(70)가 54.8% 득표율로 당선됐다. 하메네이 측근이자 충성파인 강경 보수 성향 사이드 잘릴리 후보(59)는 45.2%를 득표하는 데 그쳤다.

이란 헌법수호위원회가 승인한 6명의 대선 후보 가운데 유일한 개혁 성향으로, 투표율을 끌어올리기 위한 바람잡이·구색 맞추기용 후보란 평을 받았던 페제시키안이 예상을 깨고 1위로 결선에 진출한 데 이어 최종 당선되는 돌풍을 일으킨 것이다. 이란에서 결선 투표로 대통령 당선인이 나온 것은 2005년 이후 19년 만이다.

이번 대선 결선 투표율은 이란 역사상 가장 낮았던 1차 투표율(39.9%)보다 약 10%P 높은 49.8%를 기록했다. 결선에서 보수표 결집이 예상되자 이른바 ‘샤이 개혁’ 성향 유권자들이 투표장에 나왔다는 분석도 있으나, 70%를 넘겼던 과거와 비교하면 여전히 낮은 투표율이다. 선거에 대한 이란인들의 냉소가 여전한 가운데 정부 비판 진영은 선거 보이콧을 요구해 왔다.

이런 상황에서 개혁파 후보의 당선은 서방의 제재로 인한 극심한 경제난과 이란 정부의 히잡 시위 탄압 등으로 누적된 불만이 반영된 결과라는 평가가 나온다. 의사 출신으로 보건부 장관과 5선 의원을 지낸 페제시키안은 대중적인 인지도는 낮았으나, 선거 운동 과정에서 서방과 관계 개선을 통한 핵 합의(JCPOA) 복원과 경제제재 완화, 히잡·인터넷 단속 완화 등 개혁적이고 유연한 공약을 내세워 ‘깜짝 1위’를 했고 기세를 몰아 최종 승자가 됐다.

대통령 4년 임기에 한 차례 연임이 가능한 이란에선 보통 8년 주기로 보수파와 개혁파가 번갈아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번엔 2021년 집권한 강경 보수 성향 에브라힘 라이시 전 대통령이 지난 5월 헬기 추락사고로 급사하며 3년 만에 대선이 다시 치러졌고, 한동안 이란 정치권에서 힘을 쓰지 못했던 개혁파가 빠르게 등판하게 됐다.

개혁 성향 유권자뿐만 아니라 온건 보수파들도 패제시키안에게 표를 던졌다는 분석도 있다. 결선에서 그와 맞붙은 잘릴리 후보가 극단적 강경 보수 성향이라 미국·이스라엘과의 충돌 격화, 국제사회에서 이란의 고립 심화 등 우려를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이란 전문가인 메르자드 보루제르디 미주리 과학기술대 학과장은 “서방에 적대적인 잘릴리는 많은 유권자에게 ‘구시대의 엄격한 이념가’로 여겨졌다”면서 “페제시키안의 승리엔 잘릴리에 대한 반감도 한 요인이 됐으며, 결과적으로 페제시키안은 개혁파와 온건 보수파 모두에게 지지를 얻었다”고 워싱턴포스트(WP)에 말했다.

페제시키안 당선인이 서방과 대화의 물꼬를 틀 수는 있지만, 이란 권력 구조상 대외 정책이 급변할 가능성은 작다는 관측이 많다.

이슬람 신정 일치 국가인 이란에서 대통령은 최고지도자에 이어 권력 서열 2위다. 국방과 외교, 행정, 사법의 최종 결정권은 선출직인 대통령이 아니라 최고지도자인 하메네이에게 있다. 이 때문에 개혁파 당선에도 서방과의 즉각적인 JCPOA 개시 등 관계 개선과 반미·반이스라엘 강경 노선 등이 변화하긴 어렵다는 평가다. 페제시키안 당선인 역시 선거 과정에서 외교 정책에 대한 최고지도자 뜻을 따르겠다며 몸을 낮춘 바 있다.

이란 정치분석가인 모스타파 코셰심은 알자지라에 “이란의 대외 정책에 전략적 변화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지 않는다”면서 “페제시키안은 하메네이가 제시한 국가 정책을 집행할 책임을 맡게 될 뿐”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2018년 JCPOA를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초강력 제재를 시행한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오는 11월 미 대선에서 재집권한다면 이란과 미국의 관계는 평행선을 그을 가능성이 크다.

페제시키안이 이란의 ‘변화’를 주장하며 대통령에 당선되긴 했지만, 그가 하메네이를 정점으로 하는 이슬람 신정체제에 도전하는 인물은 결코 아니며 최고지도자 지휘 아래 있는 이란 체제 핵심인 이란혁명수비대에도 우호적이다. 하메네이에게 충성을 맹세한 페제시키안이 제한적 범위 안에서나마 변화를 시도한다 해도 이란 정계를 장악한 보수파의 벽에 부딪힐 것으로 보인다. 보루제르디 학과장은 “보수파는 취임 첫날부터 페제시키안이 시도하는 모든 것에 제동을 걸 것이고 허니문 기간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란 최고지도자이자 권력 서열 1위인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가 5일(현지시간) 테헤란의 투표장에서 대선 결선 투표 전 손을 흔들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다만 대외 정책엔 큰 변화가 없다고 해도 이란 사회 내부적으로는 제한적인 수준에서 개혁적 조치들이 단행될 가능성이 있다. 도덕 경찰의 히잡 단속 완화 등 페제시키안이 선거 과정에서 주장한 것들이 실행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최고지도자를 위시한 이란 권력 핵심부도 체제 안정을 위해서라도 이번 선거에서 확인된 민심을 달래야 할 과제가 있다. 전임 라이시 대통령의 강경 보수 일변도 정책은 큰 반감을 불렀고, 2022년 전국적으로 확산한 히잡 시위로 반정부 여론이 분출됐다. 그러나 이란 정부는 이를 유혈 진압했고 사회 통제와 민생고에 대한 불만은 ‘선거 보이콧’으로 이어져 올 초 총선과 지난달 대선 1차 투표에서 잇따라 최저 투표율로 나타났다.

하메네이는 페제시키안의 당선을 축하하며 그가 “순교자 라이시의 길을 따르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앞서 하메네이는 선거 운동 기간인 지난달 25일 “미국의 은혜 없이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좋은 동료가 되지 못할 것”이라며 이슬람 혁명 노선에서 벗어난 친서방 후보와 연대하지 말 것을 촉구한 바 있다. 이를 두고 유일한 개혁 성향 후보인 페제시키안을 겨냥한 발언이란 해석이 나왔다.

영국 싱크탱크 채텀하우스의 중동 전문가 사남 바킬은 CNN에 “페제시키안의 당선이 즉각적인 정책 변화로 이어질 가능성은 작지만, 그는 덜 억압적인 환경을 위해 시스템 안에서 노력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며 “사회적 자유 차원에서 변화의 여지가 생길 수 있다”고 내다봤다. 싱크탱크 국제위기그룹의 이란 전문가 알리 바에즈는 WP에 “페제시키안의 유연성은 다른 이들이 대선 출마가 금지됐을 때 살아남아 경기를 계속할 수 있었던 이유”라면서 “이란 지배층 입장에서도 국가와 사회의 격차가 덮고 넘어갈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평가했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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