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살 두봉 주교가 웹툰 그리는 청년에게

한겨레21 2024. 7. 7. 09:13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엄기호의 이야기 사회학]희망과 위로하는 이야기를 만드는 법
2019년 가톨릭 안동교구청에서 <한겨레> 종교전문기자를 만나 인터뷰하는 두봉 주교의 모습. 한겨레 자료

“누구도 자신이 가지지 않은 것을 나누지는 못합니다!”(Nemo dat quod non habet)

가톨릭 전 안동교구장 두봉(프랑스 이름 르네 뒤퐁) 주교는 청년 콘텐츠 창작자들이 희망과 위로를 전하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듣고 뛸 듯이 기뻤다면서 “그게 바로 제가 하는 일”이라며 이 라틴어 격언으로 말씀을 시작했다. 희망을 전하고 싶은 사람은 자기 자신이 희망이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결코 희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그러면서 학생들에게 자기 삶에 희망을 품고 있는지 물었다.

내 몸과 마음을 돌아보게 하는 물음

이 질문에 강의 시작부터 학생들 표정이 어두워졌다. 몇몇은 고개를 떨궜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학생도 있는 듯했다. 95살 은퇴한 주교에게 동시대에 무엇이 희망과 위로인지 물었지만, 오히려 그는 학생들이 지금 삶에서 희망과 위로를 느끼는지 되물었다. 학생들은 자기 삶을 돌아봐야 했다. 내 삶이 지금 전혀 기쁘지 않은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작품을 만들 수 있겠는가.

자기를 돌보지 않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돌보는 이야기를 만들 수는 없는 법이다. 장시간 앉아 하루 종일 모니터를 바라보며 일주일에 80~120장씩 그림을 그려야 하는 학생들은 이미 어깨며 허리며 근골격계에 ‘직업병’을 가진 경우가 허다했다. 연이은 공모전 일정에 맞춰 100m 달리기를 하듯 전력 질주하지만 ‘성공’하는 경우는 소수다. 많은 학생은 이미 좋은 자질과 실력이 있음에도 계속되는 경쟁 속에서 열패감에 시달린다. 우울과 불안 등 정서적 문제 또한 적지 않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돌아보며 씁쓸해하는 학생들을 보며 두봉 주교는 자신에게는 ‘웹툰’이라는 말 자체가 낯설어 학생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알고 싶어 인터넷에서 찾아봤다고 했다. 그 일이 힘들고 고되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안쓰러워했다. 그런 상태에서 타인을 위로하고 희망을 전하는 이야기를 만들기는 쉽지 않다. 그러면서도 학생들이 ‘위로와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것 자체가 자기는 너무 고맙고 기쁘다며 ‘아기’처럼 좋아하며 웃었다.

그 기쁨에 가득 찬(joyful) 웃음을 보며 몇몇 학생은 다른 사람이 희망을 이야기한다는 것, 그것 하나 때문에 저렇게 좋아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누군가가 선한 마음을 내었다는 것만으로도 저렇게 아기처럼 기뻐할 수 있는가? 그러기는커녕 우리는 누구를 보든지 자기 처지만을 생각하며 근심하고 괴로워하고 자기 안으로 가라앉아 있다. 그렇게 자기 안에 틀어박혀 있으므로 남은 아예 보지도 못한다. 그런데 어떻게 희망과 위로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단 말인가.

두봉 주교는 학생들에게 자신의 키가 형제들과 비교해 작을 수밖에 없는 이유인 가난한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며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한 것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이어갔다. 자기가 만약 작은 키에 불만을 품고 원망하기만 했다면 결코 좋은 신부가 되지 못했을 것이고 그게 평생 당신을 괴롭혔을 것이라며 키가 작아 재밌었다고 말했다. 그게 당신이 성직자로서 배우고 체득한 삶의 지혜였다. 모자람과 부족함이 어떻게 삶을 재밌게 하는지를 말이다. 그는 당신 삶의 고비마다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며 “재밌었어요!”라고 경탄했다.

웹툰·애니메이션을 창작하는 학생들 앞에서 강의하는 두봉 주교의 모습. 청강문화산업대학 제공

그러다 그는 말을 멈추고 한참을 준비한 원고를 들여다보며 무언가 찾고 있었다. 이야기가 끊기고 어색함이 제법 흘렀다. 그는 고개를 들고 탄식하듯 말했다. “못 찾겠어요!” 그제야 무슨 말인지 알았다. 두봉 주교는 강의 전에 당신의 눈이 아주 어두워졌다며 스탠드를 밝혀달라고 했다. 밝은 빛을 비춰야 글을 읽을 수 있다고 했다. 준비한다고 했지만, 강당의 크기에 비해 빛의 밝기가 부족했다. 준비한 원고 사이에서 이어갈 말씀을 찾지 못하자 탄식이 터져나온 것이다.

성공에 쫓기는 비참한 삶을 깨달았을 때

그리고 반전이 있었다. 그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당신이 95년을 살았다면서 60살, 80살까지 잘 보고 잘 들은 것만으로도 얼마나 고맙고 다행한 일이냐고 말씀하셨다. 역시 그렇게 보고 듣고 한 것이 여간 즐겁고 재밌지 않았다고 말했다. “재밌었어요!” 지금 잘 보이지 않고, 잘 들리지 않는 것 때문에 힘들어하는 게 아니라 그때까지 보고 들은 것이 얼마나 재밌었냐는 말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나이가 들어서도 청년들을 만날 수 있으니 또 얼마나 좋으냐며 손뼉을 치면서 크게 웃었다.

나중에 한 학생은 이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 가졌다가 잃어버린 것 때문에 한탄과 탄식에 젖을 텐데 그 순간조차 짧게 흘려보내고 재밌다고 말할 수 있음이 경이로웠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말했다. 늘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에 쫓기는 ‘비참한 삶’을 깨달았을 때의 부끄러움이자 참담함이다. 물론 비참함을 깨달아도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현실이 더 비참하지만 말이다.

두봉 주교 역시 모든 것이 다 좋다고 말씀하지는 않았다. 없어도 만족하고 살라는 말이 ‘전혀’ 아니다. 그는 사회에 문제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으며 그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말했다. 문제가 있는데도 별문제 아닌 것처럼 다 좋게 보면서 살라는 말이 아니었다. 문제는 해결해야 한다. 다만 두봉 주교는 어디에서 무엇을 보는가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부정적인 것에서 긍정적인 것을 찾아봤자 그 긍정적인 것도 부정적으로 보일 뿐이다. 거기서는 나눌 수 있는 것이 없다. 자기가 가지지 못한 것만 볼 뿐이니까 말이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라도 자기가 가지고 있기에 나눌 수 있는 자리에 서야 한다. 나눌 수 있는 자리에 서면 부족하더라도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보인다. 어떤 문제든 해결의 시작점은 나눌 수 있는 것이 있는 곳이다. 뭔가를 시작할 수 있는 곳은 ‘나눌 수 있는 것이 있는 곳’이다. 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뭔가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희망이 아닌가. 뭔가를 시작한다는 것은 새로운 것이 탄생한다는 것이고 새로운 것의 탄생은 세계에 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가능성이 들어오는 ‘기쁜 뉴스’니까 말이다.

두봉 주교의 말처럼 부정적인 곳에서 보면 세상은 불만족스럽다. 내가 가지지 못했거나 가진 것을 잃어버렸으니 말이다. 그러면 인간의 삶의 목표는 없는 것을 가져서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 된다. 이것이야말로 프랑스 철학자 알렉상드르 코제브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서 본 인간의 진화한 모습인 ‘동물’이 아닌가. 자신과 세상을 판단하는 기준이 오직 만족과 불만족인 존재 말이다.

‘따를 수 있는 사람’ 있으면 희망도 있다

나눌 수 있어 무엇인가를 시작할 수 있는 곳, 그곳에 행복이 있다. 인간은 불만족과 만족 사이의 존재가 아니라 불행과 행복 사이의 존재다.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것은 행복이며 행복은 나눔을 통한 만남이며 만남을 통한 해방이다. 나누는 자리에 있어서 타인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타인과의 만남’만이 우리 삶에 새로운 것이 들어오게 하고 삶을 경이롭게 한다. 두봉 주교는 그래야 삶이 “재밌어요”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고 말씀한 것이다. 95살의 당신이 웹툰을 그리고 애니를 만드는 이 듣도 보도 못한 신기한 청년들을 만난다고 눈을 반짝이며 ‘로만칼라’를 하고 낡았으나 매무새가 단단한 옷과 가방, 구두를 신고 한 시간이나 차를 타는 수고(주교님의 연세에 결코 쉽지 않은)를 기꺼이 한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두봉 주교는 이 청년 창작자들에게 세계로 나갈 것을 권면했다. 세계로 나갈 때 필요한 것이 바로 ‘본’이 되는 사람이다. 그는 매우 조심스럽게 “믿으라는 말이 아니다”라고 강조하면서 당신은 가톨릭의 사제이기에 당신의 ‘본’은 예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예수가 당신의 ‘본’이라서 얼마나 다행이고 행복한지 모른다고 말씀하셨다. ‘본’이 있기에 늘 자기가 향해야 하는 곳이 어디인지 생각할 수 있고 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가 ‘따를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희망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되고 싶은 사람도 아니고 따를 수 있는 사람(=스승)이라는 말이 학생들에게도 나에게도 큰 울림이었다. 반대로 생각해보니 삶의 본이 되어 따를 수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은 얼마나 외로운 사람인지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나아가 어떤 이가 이 시대에 따를 수 있는 사람, 본이 되는 사람인지를 돌이켜보면 바로 거기서 동시대가 보이지 않을까에 생각이 미쳤다. 바로 그 지점에서 두봉 주교를 다시 봤다.

희망과 위로를 말하기에는 혼란한 세상이다. 도파민 충만한 것은 넘쳐흐르지만, 정작 서로에게 아귀가 되어 잡아먹을 듯이 덤벼드는 아수라장 같은 세상이다. 이런 세상이 도래한 지는 이미 오래다. ‘침착맨’으로 잘 알려진 웹툰 작가 이말년은 이미 그의 작품 <서유기>(2013~2016년 연재)에서 “혼란하다 혼란해! 하하하”라고 말하는 혼세마왕을 통해 동시대를 단적으로 표현했고, 그것은 오랫동안 인터넷에서 밈이 됐다. 나무위키에는 여기에 대한 ‘베댓’(다른 사용자 추천을 많이 받은 베스트 댓글의 줄임말) 중 하나가 “혼세마왕 대한민국에 오면 불사신”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만큼 동시대 한국은 ‘혼란함’과 ‘하하하’가 결합한 초현실적인 사회라는 말일 것이다.

‘혼란함’과 ‘하하하’ 결합한 동시대 한국

그렇기에 두봉 주교의 저 기쁨에 가득 찬 모습이야말로 동시대 모든 사람에게서 실종된 가장 낯선 얼굴이다. 두봉 주교의 저 얼굴이 ‘혼란하다’와 ‘하하하’ 사이에서 동시대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그것은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고,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못하게”(대데레사 성녀 말씀에서 따온 가톨릭 생활 성가의 한 구절) 해 기쁨으로 충만한 모습이다. 어쩌면 우리가 가장 따르고 싶은 모습 아닌가? 그 불가능한 모습이 가능함을 두봉 주교는 학생들에게 보여줬다. (내 오랜 친구의 표현처럼) “그럼 된 것이다”. 가능성을 본 창작자들이 가능성을 증언하는 이야기를 교실로 돌아가 지어낼 것이니까.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생겨나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고민을 같이 나눕니다. 격주 연재.

Copyright © 한겨레2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