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환 시대, ‘생산적 부채’를 늘려라
파이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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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공공부채 증가 추세에 대한 우려는 하루 이틀 된 얘기는 아니다. 늘어나는 부채로 패권국 지위를 잃을 수 있다는 경고 역시 마찬가지다. 사실 미국의 공공부채 증가 추이를 보면 아찔하기까지 하다. 2024년 5월29일 미 재무부에 따르면 공공부채는 4월 말 기준 27조4800억달러(약 3경7850조원)다. 2023년 국내총생산(GDP)의 99%에 이른다. 의회예산국(CBO) 전망은 암울하기까지 하다. 이 비율이 2034년이면 116%에 이르러 제2차 세계대전 수준을 넘어설 것으로 본다.
미국의 부채 위기에 대한 경고는 전방위적이다. 학계, 월스트리트는 물론 경제사학자들까지 나서서 과거 사례를 들며 위기를 강조한다. 이 중 ‘퍼거슨의 법칙’이라는 이론을 제시한 니얼 퍼거슨 하버드대 교수의 주장은 그럴듯해 보인다. 그는 “어떠한 위대한 국가도 정부 부채 이자 비용이 국방 예산보다 커진다면 오래 지속될 수 없다”라며 “스페인 제국이나 혁명 전 프랑스, 대영제국이 그랬다. 미국은 이제 시작 단계에 있다”고 단언한다. 의회예산국에 따르면 2024년 미국 정부의 이자 비용은 GDP 대비 3.1%다. 국방 예산이 3.0%이니 이를 초과한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미국의 쇠락은 피할 수 없어 보인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의 래리 핑크 최고경영자(CEO)도 지속해서 미국 부채 문제에 대해 경고한다. ‘눈덩이처럼 늘어난 부채’(Snowballing Debt)라 표현하며 미국 경제를 타격할 거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다른 사람과 결이 다르다. 해결책을 제시한다. 투자자들이 계속 미국 부채를 사줄 거라는 점을 당연시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한편 부채 위기는 피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다른 사람들처럼 세금을 올리고 지출을 줄이자는 뻔한 얘기가 아니다. 그의 해법은 의외로 들리지만 설득력이 있다. 에너지 산업에 대한 인프라 투자가 활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슨 얘기일까?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력 수요 급증
미국 전력망 투자는 지난 몇 년 동안 급증한 전력 수요에 대응하지 못했다. 전기차의 확산, 인공지능(AI) 시대의 도래, 비트코인 채굴 지속 등에 의해 천문학적으로 늘어나는 전력 수요를 따라잡기엔 역부족이었다.
비트코인 채굴에는 많은 전력이 필요하다. 통계에 따르면 미국의 비트코인 채굴 일일 소비 전력은 145.6GWh(기가와트시)에 이른다. 이는 미국 전체 일일 전력 소비량의 1.34%다. 1년으로 추산하면 5만3144GWh나 된다. 미국의 5백만 가구가 일 년 동안 쓸 수 있는 전기다. 미국의 모든 전기차를 223번 충전할 수 있으며 구글이 2년 4개월 동안 쓸 수 있는 양이다.
최근엔 전기 먹는 하마, 아니 공룡이 등장했다. 바로 생성형 인공지능이다. 데이터센터 전력 소비량은 2030년까지 두 배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로이터〉 통신은 미국 전력연구소(EPRI)가 발표한 보고서를 인용해, 2030년에는 데이터센터가 미국 전력 생산량의 9%를 소비할 것이라 보도했다. 현재보다 두 배 늘어나는 것이다. 투자은행 웰스파고 역시 인공지능 데이터센터만으로 2030년까지 미국에서 약 323TWh(테라와트시)의 전력 수요가 추가될 것으로 예상한다. 뉴욕시의 현재 연간 전력 소비량인 48TWh보다 7배 더 많다.
신용평가기관 에스앤피(S&P)에 따르면 인공지능 에너지 수요는 2023~2032년 CAGR(연평균복합성장률)가 23.9%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금액으로 환산하면 2022년 약 5억2740만달러에서 2032년까지 42억6140만달러로 급증한다. 유틸리티 시장 역시 2023~2032년 33.1%의 가공할 CAGR를 보이며 2022년 5억3400만달러에서 2032년 86억7600만달러로 크게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전기차 성장 역시 전력 수요를 늘리는 중요 요소다. 2024년 160만 대인 전기차는 2030년엔 480만 대로 3배 급증한다. 미국 내 판매 차의 50% 이상이 전기차가 될 전망이다. 2035년에는 800만 대에 이를 것이라는 게 시장조사업체의 판단이다. 이런 추세라면 전력 수요는 향후 수십 년 동안 20~40% 증가할 수 있다.
생산적 투자와 부채
그렇다면 이것이 부채 문제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부채라고 해도 다 같지는 않다. 생산적인 부채가 있고 그렇지 않은 게 있다. 투자로 인한 수익이 발생해야 생산적인 부채가 된다. 기업이 빚을 낼 때, 투자로 미래 수익이 보장된다면 이는 지극히 생산적이다. 향후 그 기업은 부채 조달 원가를 능가하는 이익을 거둘 수 있기에 부채 상환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반면, 기존 빚을 갚거나 운영비 조달을 위한 부채라면 비생산적이다. 부채는 늘어날 수밖에 없고 언제 갚을 수 있을지 요원하기 때문이다. 정부 부채 역시 비슷하다. 케인스가 정부의 적자 지출이 효과가 있으려면 부채를 통해 이뤄진 투자수익률이 부채 조달 원가보다 높아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다.
현재까지 미국은 부채를 비생산적으로 운용해왔다. 적자 지출 대부분을 사회복지프로그램에 사용했다. 성장에 이바지한 바는 분명히 있겠지만 그 효과는 미진했다. 부채는 누적되기만 했다. 이에 따라 장기적 성장 전망은 부정적이다. 미국은 1980년 이후 경제성장이 둔화하면서 자본지출이 감소했다. 미국의 성장은 주로 소비에 의존하는 구조다. 따라서 성장 둔화는 소비 정체·침체와 연결된다. 소비가 둔화하면 자본지출 수요 역시 감소할 수밖에 없다. 기업들은 부족한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임금을 억제하고 해외로 외주화하거나 투자를 늘리게 된다. 고용 역시 줄이는 게 일반적이다. 고용 확대 대신 자동화 등 생산성 향상에 집중한다. 결과적으로 성장은 정체, 둔화한다. 악순환에 빠지는 것이다.
전력망 확충은 인프라 투자다. 인프라 구축의 성격은 기업과 정부의 투자가 동시에 이뤄진다는 데 있다. 기업은 전력망 구축을 위해 자본투자를 늘리고 정부 역시 투자에 나서게 된다. 무엇보다 전력망 구축은 노동집약적 자본지출이라 경제성장 역학을 바꿀 수 있다. 기존 소비에 의존하던 구조 자체가 생산 및 투자에 집중되고 이는 쇠락해가던 노동시장 구조를 변화시킨다. 기존의 부채 발행이 비생산적 요소가 있었던 반면 새로운 부채 발행은 노동 창출을 통해 경제성장을 이끌 수 있다. 무엇보다 거대한 인프라 투자는 인공지능 등 생산성 높은 분야의 성장을 가속해 투자수익률이 부채 원가를 능가할 수 있다. GDP 성장이 평균 이상이 되면 자연스레 GDP 대비 부채 비율은 하락한다. 현재 계획된 인프라 투자가 이뤄진다면 이 비율은 2026년부터 감소하기 시작해 2030년경에는 현재보다는 지속가능한 수준이 될 것이다. 이게 일반적인 전망이다.
생산성 향상, 생산적인 자본투자, 인프라 구축을 위한 노동 수요 증가로 임금이 오르면서 미국 성장을 촉진할 수 있다. 이로써 미국이 앓는 사회·경제적 질병 중 일부가 해결될 수 있다. 1970년대에 볼 수 없었던 활황 국면이 펼쳐질 수 있다. 모두가 염려하는 미국 병, 과다 부채 질환은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건전재정에 발목잡힌 독일
반대로, 미국과는 달리 건강한 재정을 유지하고 있지만 건전재정에 발목이 잡혀 미래 성장을 담보할 수 없는 국가도 있다. 독일이 대표적이다. 독일은 최근 ‘국가부채 제동장치’로 몸살을 앓고 있다. 독일은 부채 한도를 헌법에 정해놓고 있다. 한 해 재정적자가 GDP의 3%를 초과하지 못한다. 물론 자연재해와 같은 비상시기엔 예외가 적용된다. 코로나19 대유행과 같은 비상시기가 이에 해당한다. 이에 독일 정부는 코로나19 대응에 쓰고 남은 600억유로(약 89조원)를 기후변환기금에 전용하는 방식의 예산안을 편성했다. 위기 대응이 아닌 미래 투자에 쓰겠다는 거였다. 편법이었지만 미래 성장을 위해 불가피했다. 하지만 이 예산안은 헌법재판소로부터 위헌 결정이 나 무용지물이 됐다.
돈은 있지만 쓸 수 없는 상황이 되면서 전기차 보조금이 사라졌고 연구개발 예산까지 손봐야 할 정도가 됐다. 독일의 미래 정책에 있어 재생에너지 사업은 핵심 중 핵심이다. 디지털전환 시대에 전력 수요에 대한 투자는 필수적이다. 이 흐름이 막히면 미래는 불투명하다. 독일은 반도체, 전기차 자율주행 플랫폼, 배터리 등 미래전략 산업에 대한 전후방 산업이 취약하다. 이런 때 연구개발 투자마저 줄어든다면 미래는 불 보듯 뻔하다.
독일은 역성장과 저성장을 반복하고 있다. 2024년 경제성장률도 하향 조정되고 있다. 독일의 기업과 가계는 계획된 보조금 및 인프라 구축 프로젝트 관련해 불안을 느낀다. 이에 따라 투자 활동은 위축되고 임금이 오르는데도 소비는 둔화하고 있다. 경기침체 및 산업전환 대응에 정부의 역할이 필수적이지만 독일은 건전재정에 막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국가부채 제동장치의 역습에 독일이 흔들리고 있다.
현재는 대전환 시대다. 과감한 정부 투자는 필수다. 이때 건전재정을 고집하는 건 미래를 망가뜨리는 행위일 수 있다. 2030년 미국과 독일의 미래는 과연 어떻게 갈릴까? 우리는 또 어떤가. 연구개발비를 삭감하고 재생에너지 투자에 미적거리면서 대전환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윤석천 경제평론가 maporive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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