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시인 K·J·Q에 대한 보고서

성윤석 시인 2024. 7. 7.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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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1990년대만 하더라도 수도권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시인들과 지방에 거주하는 시인들 간에 거리감이 별로 없었다. 오히려 큰 시인들은 지방에 다 살았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권위 있는 문학잡지를 펴내는 문학 전문 출판사 편집위원들도 뛰어난 시인을 발굴하기 위해 지역에서 나오는 문예지나 동인지를 샅샅이 들춰보던 시기였다. 일례로 문학과지성사 사무실 서가에는 지역에서 나오는 기관 문예지들이 꽂혀 있었다. 나는 그게 신기했고 감동했다. 아마도 고(故) 김현 선생의 유지가 아니었을까 싶다. 김현 선생의 뒤를 이어 소설가 이인성, 평론가 정과리 선생 같은 분들이 '지역에서 시인 찾기' 같은 일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필자 또한 1990년에 등단해 아무런 인맥도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문학과지성사로부터 호명됐고 1996년 첫 시집 출간으로까지 연이 이어졌으니, 지방에서 혼자 쓰는 젊은 시인이던 내겐 선물 같은 일이었다. 위에서 말한 분들의 '시인 찾기' 수혜자가 된 셈인데 그때는 치기 어린 오만이 있었는지 미처 그 고마움을 알지 못했다.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새 시집도 여러 권 냈지만, 문학 행사나 문단에는 나가보지 않았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혼자 쓰며 살았다. '문학은 혼자 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지만, 찾아오는 후배 시인들을 만나게 된 계기가 생겼다.

[Gettyimage]

경상도 시골시인의 의기투합

2020년 여름쯤으로 기억한다.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덮쳐 모두가 우울하던 시기, 경남 창원시에 사는 필자를 찾아온 젊은 시인 여섯이 있다. 모두 처음 보는 이들로 각기 서울, 경주, 진주, 고성, 창원, 하동에 거주하는 이필, 권상진, 유승영, 서형국, 권수진, 석민재 시인이다.

모두 마스크를 낀 채 시장통 막걸릿집에서 술을 마시며 얘기를 나눴다. 나는 주로 듣는 입장이었다. 문학 선배로서 나를 찾아와 준 후배들이 고마웠다. 또 젊은 시인들의 얘기를 듣고 싶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뒤 두 번째 만남에서 이들의 얘기를 깊이 있게 들었다.

예전과 달리 수도권 중심으로만 흘러가는 문학판, 줄어든 지면, 시인의 대폭 증가, 지방에서 시 쓰는 시인의 고독감에 대한 얘기가 오갔다. 듣다 보니 이들에게 미안해졌다. 이들에 비해 나는 유리한 위치에만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시골시인-K(경상도의 약자)'라는 이름을 내걸고 일회성 모임이 이뤄졌다. 우리는 각자 시 10편, 산문 1편씩 써서 밴드에 올리고 이듬해 봄에 서울에서 합동 시집을 내기로 뜻을 모았다. 선배인 나는 출판사를 알아보고 발문을 쓰겠다고 했다.

‘시골시인-K'라는 작명은 필자가 서울에 일 보러 갔을 때 친구 주일우(국제도서전 대표)가 "시골시인 부스를 만들어 참가 안 할래?" 라는 말에서 착안했다. 사실 동인지 형태로 시집을 내면 서점에선 아예 100부도 팔리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아는 터라, 좀 더 전략적 접근이 필요했다.

"시골시인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잘 가요, 황인숙, 이성복, 전윤호, 그리고 젊고 예쁜 도성 안 시인들이여/ 오늘은 연탄불고기 식당도 일찍 문 닫는/ 이름 불러줄 이라곤 가까운 가족밖에 없는/ 그런 시인들 하나둘 모여/ 늦은 저녁, 빈대떡에 막걸리로 목 축이는 시간/(후략)"
-이필 시인의 '웰컴, 시골시인' 中



이듬해 봄인 2021년 4월 서울 도서출판 '걷는사람'에서 시골시인-K 합동시집이 세상에 처음으로 나왔다. 수록 작품의 높은 수준과 지역 시인들의 경쟁력 있는 가치를 알아본 중앙과 지역 일간지에서 보도가 이어졌다. 문예지와 시인들의 관심도 전국적으로 이어져 뜨거운 반향을 일으켰다. 시집 판매가 호조를 보였고, 그해 세종도서에 선정되기도 했다. 더욱 즐거운 일은 전혀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일어났다.

제주도에 거주하는 김효선, 김애리샤, 고주희, 허유미 시인이 제주도 이니셜 J를  붙여 '시골시인 J' 합동 시집을 내고 싶다며, 출판사 연결 및 관련 일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해왔다. 시골시인 합동 시집이 '시골시인 프로젝트'가 되는 순간이었다.

밥하고 빨래하고 노동한 손의 글맛

그 뒤 시집 판매로 생긴 수익금 중 일부를 K들이 뜻을 모아 J들에게 시집 제작 비용으로 전달하는 아름다운 일이 일어났다. 한국 문단사에선 처음 있는 일이었다. 

2022년 5월  '걷는사람'에서 시골시인 J 합동 시집이 나왔다. 이 시집은 육지와 단절된 제주에 사는 시인들이 가장 외로운 영역의 장르인 '시 쓰기'를 릴레이 형식으로 함께하면서 서로의 고통과 분투를 손으로 터치하고 연대하는 수준 높은 시들을 선보였다는 평가를 받으며, 역시 호응을 얻었다.

수도권 중심으로 흘러가는 문단의 흐름에 저항하는 지역 시인들의 반란 아이콘이 된 '시골시인' 프로젝트는 2021년 경상도(시골시인K)에서 시작해 2022년 제주도(시골시인J)로 이어졌고 2023년 7월엔 경남과 전남에서 거주하는 시골시인들의 합동 시집 '시골시인Q'로 이어졌다. 경남과 전남 지역 시인 7인이 각자 색깔을 내며 나로부터 확장해 가는 질문을 시에 담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 맥락에서 시집에 붙은 Q는 질문(question)을 의미한다.

‘시골시인Q'(걷는사람)에 참가한 남길순(순천), 김한규(창원), 문저온(진주), 박영기(진주), 조행래(진주), 서연우(창원), 심선자(진주) 시인은 진주에서 오랜 기간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면서 각자의 시가 되는 자리를 만들었다. 이들이 서로 추구하는 시의 세계가 다르지만, 각자의 색깔을 내고 나로부터 확장해 가는 질문(question)을 멈추지 않고, 낡지 않게 쓰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이 세 권의 합동 시집 시골시인 시리즈가 남긴 것은 무엇일까. 표면적으로는 시골시인 시리즈에 참여한 시인들의 그 후 활동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는 점이다. 누구는 아르코 창작기금을 받았고, 누구는 두 번째 시집을 서울의 유수한 출판사에서 펴냈고, 또 누구는 모두가 선망하는 문학상을 받아 서울의 명문 출판사와 계약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 모든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뛸 듯이 기뻤고 내 일보다 더 좋았다.

하지만 이보다 더 가슴 두근거리는 일은 따로 있었다. 비록 시골시인 시리즈엔 참여하지 못했지만, 주변의 시골시인들이 그간의 좌절감에서 서서히 벗어나 '시골에서 시 쓰기'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필자를 찾아오는 전국의 젊은 시인도 대폭 늘고 e메일로 작품을 봐달라는 요청도 많아졌다.

바쁜 일상이지만, 시간을 쪼개가며 그들의 시편을 읽고 선배로서 조언을 기꺼이 해주고 있다. 시 세계에 맞는 출판사를 알려주고 적극 투고하기를 권했고, 출판사에서 승인 연락을 받았다는 소식도 들었다. 미인과 맛집의 공통점은 산골 오지에  있어도 어떻게든 찾아간다는 말이 있다. 시인도 그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시골시인 프로젝트를 기획한 계기다.

가끔 시골시인 4번째 시집은 어느 지역이고 언제 나오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그럴 때마다 필자의 대답은 '모름'이다. 시골시인 K를 낼 때 시골시인 J를 염두에 두지 않았듯이, 그다음 해에 시골시인 Q를 생각하지 않았듯이, 예측 불가능한 것이 시고 또한 시골시인 4번째 시집이다. 올해나 내년에 나와도 좋고 아니 나와도 좋다. 필자 또한 지방에 사는 시골시인으로서 앞으로도 이 나라의 시골시인들이 중앙 문단만을 향해 서 있지 말고 자존심을 지키며, 시골시인만이 쓸 수 있는 독창적 시를 쓰기를 바랄 뿐이다.  

시골시인 시리즈의 첫 합동 시집인 '시골시인 K'의 발문을 쓸 때가 생각난다.  시집에 수록된 여섯 분의 시에 대해 "밥하고 빨래하고 노동하고 사람을 만나고 온 손으로 쓴 시들"이라며 "책상에서 공부하고 대학원 가고 인맥 쌓아 상 받고 메이저 출판사에서 시집 내고 비슷한 경로를 밟아온 문학평론가들에 의해 상찬을 받아온 분들의 시가 아니다"라고 썼는데, 지금도 그때의 신선함과 감동이 남아 있다. 시골시인 만세!

성윤석
●1966년 경남 창녕 출생
●경남대 국문학과 졸업
●1990년 한국문학 신인상 등단
●저서: 시집 '2170년 12월23일' '멍게' 외 다수

성윤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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