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서 말 더듬은 바이든...“음파 공격 탓” 아바나 증후군 음모론
과거 쿠바 주재 외교관들 신체 이상 호소
美정보·보건 당국 “외부 공격 가능성 낮아”
지난달 27일(현지 시각)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맞붙은 첫 TV토론에서 수차례 말을 더듬고 힘 없는 표정을 지는 모습을 보이자 소셜미디어에는 바이든 대통령이 ‘아바나 증후군’ 피해자와 매우 유사한 증상을 보였다는 게시글이 잇따라 올라왔다.
아바나 증후군은 2016년 말 쿠바 수도 아바나에 있는 미국 외교관과 가족 20명이 집 주변에서 귀를 찢는 소음에 노출된 후 어지럼증, 두통, 난청, 집중력 장애를 호소한 것을 말한다. 사건 초기 미국에선 외교관과 가족에 대해 음파 공격이 가해졌다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됐다. 이번에도 바이든 대통령이 유사한 공격을 받았다는 주장이 퍼졌다.
과연 눈에 보이지 않은 지향성 에너지 무기(Directed Energy Weapon)가 아바나 주재 미국 외교관에 이어 바이든 대통령까지 공격한 것일까. 미국 정부는 이미 쿠바 대사관에 대한 외부 공격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결론을 냈다. 이를 근거로 미 대선이 또 다시 음모론에 얼룩지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지향성 에너지 무기는 실제 있어
바이든 대통령에 대한 에너지 무기 공격설에 불을 지핀 주인공은 전 소련 스파이이던 유리 슈베츠이다. 슈베츠는 1980년대 워싱턴DC에서 옛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의 스파이로 활동하다가 1993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러시아 소식에 정통한 인플루언서인 이고르 수슈코는 자신의 X계정에 “바이든 대통령이 겪은 증상은 아바나 증후군 피해자 증상과 유사하다”며 “전직 KGB 스파이인 슈베츠로부터 바이든이 아바나 증후군을 앓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전해 들었다”고 올렸다.
수슈코는 “에너지 빔이 상당한 거리에서 사람의 뇌를 정확하게 조준할 수 있고 바이든이 토론 중에 보여준 것과 같은 증상을 유발하도록 조절할 수 있다”며 “슈베츠가 러시아 정부의 대형 수송기인 IL-76 기가 대선 토론 하루 전인 6월 27일에 미국에 착륙했다가 29일에 떠났으며 우연을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미국 기술전문 매체 기즈모도는 X와 다른 소셜미디어 플랫폼에서 바이든에게 뭔가 수상한 일이 벌어졌다는 주장이 확산하고 있다고 전했다.
음모론자들이 지목한 지향성 에너지 무기는 실제 있다. 고출력 마이크로파나 레이저 같은 강력한 전자기파를 전자기기에 쏘면 갑자기 높은 전압이 걸리면서 칩과 전자기판이 타버린다. 전차와 항공기, 함정 같은 첨단 무기에 전자부품이 많이 들어가면서 이를 무력화할 값싸고 효과적인 비살상 무기로 떠올랐다.
미 중앙정보국(CIA)이 공개한 문서를 보면 미국은 1960년대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무기를 개발하는 계획을 세웠다. 러시아도 소련 시절인 1980년대 미국의 스타워즈 계획에 맞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격추할 지향성 무기 연구를 추진했다. 세계 각국도 지향성 에너지 무기를 미래형 무기로 보고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한국도 8㎞ 거리에서 날아오는 물체를 레이저로 떨어뜨리는 실험을 진행한 일이 있다.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지향성 무기도 실제로 개발되고 있다. 미국 군수업체인 레이시언의 접근억지무기체계(ADS)는 시위대나 군중을 통제할 목적으로 개발됐다. 사람에게 직접 고출력 전자파를 쏘아 전자레인지처럼 피부에 순간적으로 열을 가해 고통을 준다. 미군 당국은 상처가 나기 전에 고통을 주기 때문에 인체에 유해하지 않다고 주장하며 소형화를 추진하고 있다.
◇정보기관 보건당국 “외부 공격 가능성 낮아”
에너지 무기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은 전자파에 세포가 노출됐을 때 나타나는 변화에 주목한다. 일부 연구에 따르면 사람의 비만세포에 전자기장을 가하면 히스타민을 분비한다. 히스타민은 상처가 난 곳이 부어 오르고 통증을 느끼는 염증반응을 유발한다. 히스타민 수치가 높으면 설사와 메스꺼움 두통, 가려움, 호흡곤란 같은 증상이 나타나 전자파 무기의 과학적 근거가 되고 있다.
제임스 린 미국 일리노이대 전기전자공학과 교수는 2021년 가디언과 인터뷰에서 “에너지를 좁은 영역에 집중시켜 뇌의 조직을 손상시키는 압력파를 발생시키는 데 큰 장비가 필요하지는 않다”며 에너지 무기의 실존 가능성에 무게를 더했다. 린 교수에 따르면 압력파는 처음에는 소리로 느껴지는데 실제 조사 결과 아바나 증후군을 겪는 미국 외교관들이 공격을 받은 순간 이상한 소리를 들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정부는 다른 입장이다. 미 중앙정보국(CIA)을 포함한 정보기관들은 지난해 “아바나 증후군 환자들이 외부의 공격을 받았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보고서를 공개했다. 미국립보건원(NIH)도 지난 3월 미국의사협회지(JAMA)에 아바나 증후군 환자의 뇌와 신체 능력에서 일반인과 별다른 차이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내용의 논문 2건을 공개했다.
NIH에 따르면 연구진은 자기공명영상(MRI) 장치를 활용해 환자 81명의 뇌를 촬영했지만 뇌 손상의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 또 다른 연구에서 증후군을 겪는 환자 86명을 정상인 30명과 비교한 결과 청력과 균형감각, 인지, 시력, 혈액에서 별다른 차이를 찾지 못했다. 이는 지난 2018년 펜실베이니아대 연구진이 같은 학술지에 아바나 증후군 환자에서 뇌진탕과 뇌 손상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내용과 정면 반대되는 내용이다.
◇스트레스 상황에서 집단 히스테리 가능
일부 신경병리학자들은 아바나 증후군 환자가 겪는 증상은 과거에 겪은 부상과 스트레스, 환경 문제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집단 내 한 구성원에게서 이상 증상이 나타나자 주변 구성원들도 영향을 받아 비슷한 증상을 겪는 집단 히스테리일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쿠바 신경과학센터 미카엘 벨데스 소사 센터장은 2018년 사이언스지 인터뷰에서 “외교관들이 히스테리에 걸렸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커뮤니티 안에서 심리적 전염을 배제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적성 국가인 쿠바에서 일하는 미국 대사관 직원들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상황이고 소극적인 사회 활동을 할 수밖에 없다 보니 외교관들을 심리적으로 병들게 했을 수 있다는 해석이다.
심리적 전염을 뒷받침하는 유사한 사례들은 실제로 있다. 지난 2012년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2개 고교에선 학생들 사이에서 특이한 딸꾹질이 집단적으로 발생했다. 독특한 소리를 내는 딸꾹질이 전염병처럼 퍼져 나갔다. 당시 미국 보건 당국은 최종 보고서에서 학생들의 딸꾹질이 전염된 주요 원인으로 집단 히스테리를 지목했다.
참고 자료
JAMA(2024), DOI: https://doi.org/10.1001/jama.2024.2424
JAMA(2024), DOI : https://doi.org/10.1001/jama.2024.2413
JAMA(2018), DOI: https://doi.org/10.1001/jama.2018.1742
한국전자기파학회논문집 DOI: http://doi.org/10.5515/KJKIEES.2016.27.1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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