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전성기 맞은 허정한 “우승이 정말 고팠다. 19년 당구인생 최고의 순간과 버금가”
6년2개월만에 국내 1위 자리도 탈환
“붕 떠있는 기분, 다시 할 수 있다 자신감”
김행직 조명우 김준태 젊은후배 부상에
“내 당구 경쟁력 있을까” 의구심 들기도
지난 6월 허정한은 몇 년만에 최고의 순간을 보냈다. 7년반만에 3쿠션월드컵 우승트로피를 들어올렸고, 또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 전국대회까지 석권했다. 이 결과 6년여만에 국내랭킹 1위 자리도 탈환했다.
주목할 영건 정예성 손준혁 김영원 하샤시
“최종 목표는 세계3쿠션선수권 우승”
▲제2의 전성기다. 요즘 기분은 어떤가.
=솔직히 계속해서 붕 떠있는 기분이다. 오랜만에 겹경사를 맞으니 날아갈 것 같은데, 좋은 기분이라도 흔히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이게 무슨 감정이지?’란 생각이 들 정도다. 내가 앞으로 당구를 치면서 다시 (3쿠션)월드컵이란 큰 무대에서 우승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확신이 없었다. 그런데 늦게나마 다시 우승해 너무 행복했다.
▲선수생활 하며 이렇게 짧은 기간에 이런 성과를 낸 적이 있나.
=아마 지난 2014년 때었을 것이다. 당시 제주도에서 열린 전국체전에서 3쿠션 우승을 한 기억이 있는데, 그 대회를 포함해 앞뒤로 이어진 3개 전국대회를 모두 석권한 적 있다. 기억이 확실치는 않지만 당시 18~19연승을 했다. 물론 일주일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이렇게 큰 두 대회를 우승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솔직히 선수생활하며 가장 짜릿했던 순간은 전국대회에서 처음 우승했을 때다. 2010년 고 이상천 회장님이 주최한 ‘쌍리오픈’이 춘천에서 열렸는데 그때 선수생활 5년만에 첫 전국대회 우승컵을 들었다. 그때 기분은 잊혀지지 않는다. 이후로는 2016년 후루가다3쿠션월드컵에서 처음 월드컵 정상에 올랐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물론 오랜만에 다시 월드컵 정상에 서고, 연이어 전국대회서도 우승한 최근도 과거 최고의 순간들과 비견할 만하다.
▲앙카라3쿠션월드컵 우승은 무려 7년 반만이다. 우승 직후 어떤 기분이었나.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순간적으로 가족, 지인 등 주변 분들이 얼마나 기뻐할지 생각하니 기분이 너무 좋고 뿌듯했다. 특히 ‘해냈다. 다시 할 수 있다’라는 생각이 들며 자신감이 많이 차올랐다.
▲근래 자신감이 떨어져 있는 상태였는지.
=자신감이 많이 떨어졌다기 보단, 내 경쟁력에 의구심을 많이 품었다. 어떤 스포츠 종목이든 세월 앞에선 장사가 없지않나. 어느 순간 젊고 유능한 친구들이 조금씩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었고, 이미 궤도에 올라 있었다. 김행직 조명우 김준태는 이미 월드클래스다. 그런데 나는 점점 나이먹어 가니 ‘이렇게 잘 하는 젊은 친구들이 치고 올라오고 있는데, 과연 내가 이 친구들과 대등하게 시합할 수 있을까’ ‘내 당구가 여전히 경쟁력이 있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선수생활 하며 다시 3쿠션월드컵 우승컵을 들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이번에 우승하면서 자신감을 많이 얻었다. 물론 젊은 친구들이 치고 올라오는 것을 부담스럽게만 생각하는 건 아니다. 젊은 실력자들이 많이 나와야 대한민국 당구 위상도 올라가고, 그들과 경쟁하며 나도 덩달아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조명우는 워낙 잘 치는 선수이니 처음에는 맞붙으면 내가 끌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자주 경기하다 보니 극복하는 방법을 찾았다. 내가 이전만큼 스트로크가 따라주지 않으니, 경기에서 이를 채워줄 만한 다른 요소를 부각하는 것이다. 예컨대 연륜이 많은 점 등을 활용하는 것이다.
서로 자주 만나다보니 조명우 선수가 한번씩 찾아와 얘기해준다. 처음엔 “형, 제발 만나지 마요. 만나려면 결승에서 만나요” 이러다가 점점 맞붙는 횟수가 늘며 “전역 후에 저랑 3승3패네요” “6승5패네요”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전적을 알려주더라. 최근 호치민3쿠션월드컵에서 내가 이기자 “이제 7승7패 됐네요” 하더라. 하하. 사실 돌아보면 조명우 선수뿐 아니라 그처럼 잘 치는 젊은 선수들과 많이 시합 하는건 내게 긍정적인 요인이다. 이들과 만나 이기고지고 하며 많은 걸 배웠다. 이번 월드컵 우승에도 밑거름이 됐다고 본다.
▲앙카라3쿠션월드컵 이야기로 돌아가서 전반적으로 경기 내용이 좋았다. (허정한은 7경기 평균 애버리지 1.839를 기록했다) 이번 대회에선 선전한 계기가 있었나.
=선전할 수 있었던 요인은 많다. 가장 큰 요인을 꼽으라면 두 가지다. 첫째 가족과 지인, 동료선수들, 팬 등 주변 사람들의 진심어린 응원이 정말 큰 힘이 됐다. 또 장비(용품)가 큰 몫을 했다. 최근 10년 넘게 쓰던 큐와 이별하며 이번 대회에 새 큐를 들고 출전했다. TPOK 후원을 받게 돼 ‘루츠케이’ 큐를 사용했는데 나와 정말 잘 맞았다. 예전 한창 기량이 좋을 때 스트로크로 돌아간 느낌이랄까. 대회 일주일 전에야 내 큐가 나와 연습시간이 짧았음에도 느낌이 너무 좋았다. 더불어 최근 프로라젝스라는 라사지업체 신제품인 ‘에비앙’ 패치도 달게 됐다. 이렇게 대회 전 좋은 소식들이 많아 마음이 편안해져 더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다.
▲바오프엉빈과의 결승전에선 전반 끝날 때까지만 해도 접전이었으나 후반에 확실히 주도권을 잡았다. (결승서 허정한은 초반 9점 차 열세를 뒤집고 50:31(26이닝) 낙승을 거뒀다)
=바오프엉빈 선수 페이스가 정말 좋았다. 조별예선 전체1위로 본선에 올랐고 애버리지도 높았다. 결승 전에도 바오(프엉빈)가 공 치는 걸 보며 ‘이번 대회에서 분명히 좋은 성적을 내겠다’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결승에서 만났다. 쉽지 않을 것으로 직감했다.
결승 초반만 해도 내 뜻대로 안 됐다. 초반에 점수차가 벌어지며(결승서 허정한은 초반 3이닝만에 1:10으로 끌려갔다) ’이대로 무너지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만 우승이 정말 고팠다. ‘해내야 된다’ ‘이겨내야 된다’ 이런 생각을 하며 집중력을 계속 끌어 올렸다. 그러다 보니 조금씩 감각이 올라왔고, 내 플레이를 되찾게 됐다. 시합에선 자신의 플레이를 펼치는 쪽이 주도권을 잡게 돼 있다. 이번 결승전의 경우, 바오가 자신의 플레이를 하며 치고 나갈 때 중심을 잘 잡았더니 이후 내 플레이를 할 수 있었다.
▲언제 우승을 직감했나.
=어느 순간도 안심할 수 없었다. 결승전서 내가 26:20으로 6점 앞선 채 하프타임에 들어갔는데, 그 정도는 세계적인 선수들이라면 한 순간에 뒤집는 점수차다. 이후 종반에 가며 점수차가 벌어지기 시작했고, 바오의 스트로크와 자세가 흔들리는 걸 보며 ‘이건 쫒아오기 힘들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때 승기를 잡았다는 느낌을 조금 받았다. 시합때 ‘이건 우승이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 당구는 망가진다. 1점이 남았어도 끝까지 방심해선 안된다. 그런데 이번 결승전 종반엔 나도 모르게 이길 수 있겠다는 생각을 잠시 가졌다. 하하.
▲앙카라3쿠션월드컵 직후 집에도 들르지 못하고 남원대회에 참가했다고. (앙카라3쿠션월드컵은 6월16일 일요일(한국시간) 새벽 마무리 됐고, 이어 19일 수요일부터 남원 전국당구선수권이 열렸다)
=상황이 녹록치 않았다. 현지 공항에서 10시간 가까이 대기했고, 인천공항에 도착한 시간도 퇴근시간대여서 청주에 있는 집으로 가기에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공항 근처에 숙소를 잡아 하루 푹 쉬고 다음날 바로 남원으로 향했다. 정말 피곤했다. 그런데 3쿠션월드컵에서 우승한 기쁨이 그 피로를 가시게 했다. 남원대회 결승까지도 월드컵에서 우승했을 때 그 기운이 몸에 남아 있었다. 지금은 시간이 좀 흘러 기운이 좀 날라갔을 것 같은데, 모두 사라지기 전에 다른 시합을 하나라도 더 빨리 치렀으면 좋겠다. 하하.
▲이번 남원대회 우승으로 6년 2개월만에 국내랭킹 1위에 복귀했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조명우 선수가 제대 후 폼이 워낙 좋고, 밥 먹듯 우승하다 보니 나로서는 국내 1위를 노려볼 생각조차 못했다. 다만 나도 대부분 전국대회서 입상권에 들었기 때문에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겠단 생각을 한 적은 있다. 남원대회에서 우승하면 국내 1위에 오를 수 있다는 사실도 얼핏 알고 있었다. 앙카라3쿠션월드컵 때 동료 선수들과 랭킹표를 한번 확인한 적 있는데, 그때 보니 결과에 따라 랭킹 1, 2위가 바뀔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결국 1위를 탈환해서 기분은 좋은데 자주 1위에 올랐던 과거를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최근 긍정적인 흐름으로 자신감을 많이 회복했겠다.
=그렇다. 현재 햇수로 19년 째 당구선수 생활을 하고 있고, 쇠퇴기라 해도 무방한 나이다. 근래 앞으로 당구를 얼마나 더 칠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도 있었다. 그런데 최근 흐름을 계기로 ‘당구를 생각보다 좀 더 오래 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좀 더 들어도 적당히 경쟁력을 갖춘 선수가 되고 싶다.
▲강동궁 조재호 최성원 등 동료선수들이 프로당구로 갔는데, 본인은 연맹을 지키고 있다.
=주변에서 이와 관련한 이야기를 정말 많이 듣는데, 다른 이유는 없다. PBA 출범 당시엔 내 후원사와 관련한 이해관계가 있어 프로행을 생각하지 않았고, 지금도 내가 몸담은 곳에 만족한다. 그렇다고 프로화를 부정하는 건 아니다. 스포츠는 분명 프로화가 돼야 발전할 수 있고, 선수 처우도 개선된다. 다만 개인적인 계기로 다른 선택을 했을 뿐이다. PBA에 대해선 지금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PBA든 연맹이든 한 쪽이 무너지면 당구발전에 도움이 안된다. 지금 당구계는 발전을 위한 과도기를 겪고 있다고 생각한다. 당구선수이기 이전에 당구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두 단체가 잘 협력해 시너지를 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미 월드클래스 반열에 오른 김행직 조명우 김준태를 제외하더라도 많다. 현재 군복무 중인 정예성 선수가 눈에 띈다. 어리지만 여러모로 당구를 잘 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다. 손준혁 박정우 정재인도 마찬가지다. 고등학생인데도 수지가 40점인 김건윤 선수도 눈에 띄고, 이번에 PBA서 준우승한 김영원 선수도 유망해 보인다. 외국 선수 중엔 (부락)하샤시, 프랑스의 그웬달(마르쉘)도 좋은 선수들이고, 바오, 타이홍치엠 등 베트남쪽 젊은 친구들도 재능이 굉장하다. 조명우 김행직 김준태 등 국내 톱클래스 선수들과 향후 대등하게 경쟁할 선수들이라 생각한다.
▲젊고 유망한 후배 선수들에게 조언해주고 싶게 있다면.
=조언할 만한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생각보다 간단한 문제라 생각한다. 일단 기본적으로 시간을 정말 많이 할애해야 한다. 이는 비단 당구뿐 아니라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다. 정말 큰 열의와 열정을 가져야 한다. 당구 자체를 소중히 여기고, 그 안에서 모든 걸 쏟아부을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갖춰야 정상권에 오를 수 있다고 얘기해주고 싶다.
▲많은 선수를 상대하는데 그중 까다로운 선수는.
=국내에선 김행직 조명우 김준태이고 외국에선 (딕)야스퍼스와 (제레미)뷰리다. 연륜이 쌓이며 최근엔 괜찮아졌지만, 예전엔 본인의 루틴이 명확한 선수를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그런 선수와 경기하면 상대방 페이스에 말려 들어가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야스퍼스와 뷰리가 그렇다. 특히 뷰리는 대결한지 꽤 됐는데, 옆에서 경기를 지켜볼 때도 ‘내가 저걸 헤쳐나갈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하하.
▲당구용품은 뭘 쓰는지.
=큐와 장갑은 루츠케이, 초크는 명품초크를 쓴다. 팁은 다이아몬드 킹블랙과 큐스코팁을 함께 쓴다.
▲청주에서 당구장을 운영하는데.
=청주 동남지구에서 엠블캐롬클럽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해 7월 개장했으니 딱 1년 됐다. 테이블은 가브리엘 2.0 6대와 중대 5대가 있고, 룸도 하나 있다.
▲앞으로의 목표는.
=일단 올해 목표는 확실하다. 세계3쿠션선수권에서 우승하는 것인데, 최종 목표라 할 수 있다. 올해가 아니어도 선수생활하며 세계3쿠션선수권 우승컵은 분명 들어보고 싶다.
▲나에게 당구란.
=식상한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당구는 내게 뗄레야 뗄 수 없는 동반자다. 나중에 선수생활을 마무리하더라도 당구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역할을 계속 하고 싶다. 그곳이 어디든, 당구 근처엔 내가 있을 것이다. [청주=김동우 MK빌리어드뉴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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