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이 돈 풀자 이불집·반찬집·정육점 사장님 줄줄이 검찰청으로

한겨레 2024. 7. 6.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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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정명원의 사건 외곽의 풍경들
견물생심
전통시장 앞 대형 백화점 진출
상권활성자금 상인들 분배 과정
상가연합회 간부들이 떼어먹어
삶의 터전 잃고 돈에 흔들리고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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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범죄는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어 어떻게 완성되는가. 그것의 시작은 오직 인간의 악한 마음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범죄자가 될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정해져 있는가. 그런 것이 아니라 범죄는 온갖 정치·경제·사회적 맥락 속에서, 자본과 힘의 흐름 속에서 인간이라는 미약한 존재의 욕망 한 스푼이 작용하여 발생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이때 그 욕망을 품은 인간의 책임은 얼마만큼인가.

유통그룹이 건넨 돈에서 시작된

시장에서 일하는 상인들을 줄줄이 소환한 적이 있다. 동네마다 작은 전통시장이 제법 상권을 유지하는 지방 도시에 대규모 백화점이 들어오면서 일은 시작되었다. 지역 상권을 파괴할 공룡 같은 대기업의 백화점 유치에 상인들은 항의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백화점은 상당한 액수의 지역상권활성자금을 내어놓는다. 거액의 자금이 시장마다 배분되었는데, 이를 나누는 과정에서 상인들이 얼마씩 횡령을 한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시장마다 분배된 자금은 시장 입점 상인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야 하는데, 회장이 총무에게 인계하면서 일부, 총무가 운영위원회에 보고하면서 일부, 운영위원들이 평상인들에게 나누면서 일부 떼어먹은 것이다. 처음에는 상가연합회 회장의 횡령 사건이었는데, 수사를 할수록 판이 커졌다. 결과적으로 작은 시장의 상인 상당수가 횡령범으로 입건되기에 이르렀다.

이불집과 정육점, 건어물 상가 사장님과 포목집, 반찬집 사장님 등이 소환되었다. 손님이 가장 뜸하다는 오후 어중간한 시간에 상인들은 조사를 받으러 줄줄이 검찰청에 왔다. 검찰청에 온다고 그에 맞는 옷을 골라 입거나 할 사이도 없이 입고 있던 앞치마만 벗어 던지고 그대로 온 차림이어서, 그들이 풍기는 냄새와 분위기를 보면 어떤 일을 하는 상인 누구인지 대략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기름집 사장님에게서는 고소한 기름 냄새가 났다. 정육점 사장님의 손등에는 긴 흉터 자국이 있었고 반찬집 사장님의 옷소매에는 고춧가루 양념이 말라붙어 있었다. 지역의 작은 시장이 터를 잡을 때부터 20, 30년씩 장사를 해왔다는 상인들은 모두 조금씩 자신들이 매일 만지고 파는 물건의 자취가 묻어 있었다.

상인들은 모두 범행을 순순히 자백했다. 장사도 점점 시들해지고 이 장사를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고심하던 차에 대형 백화점에서 나온 큰돈 앞에 그만 욕심이 생겨버리고 말았다고, 어차피 너나 나나 거저 생긴 돈인데 그거 좀 떼고 준다고 해서 누군가에게 피해 주는 건 아니지 않냐는 어리석은 생각을 했다고 인정하며 건어물집 사장님은 마른 얼굴을 쓸었다. 그러면서도 그 돈이 자신에게 오기 전 단계에서 떼어먹은 다른 놈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그러다가 이것이 모두 자신들의 삶의 터전에 밀고 들어온 대형 유통그룹의 백화점이 던진 돈에서 시작된 일이라는 것에 생각이 미치면 어떤 무력감이 먼저 일어나는 것 같았다. 이제 대형 백화점이 들어왔으니 안 그래도 안 되던 장사를 이참에 접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나에게 하는 말인지 혼잣말인지 모르게 말했다. 후회와 민망함과 억울함과 씁쓸함이 비율을 나눌 수 없이 뒤엉킨 얼굴이었다. 어쨌거나 빨리 또 점포로 돌아가봐야 한다며 조서에 도장을 찍고 상인들은 서둘러 돌아갔다. 거리에는 백화점 오픈 기념 이벤트 광고판에 화려하게 불이 들어오고 백화점으로 향하는 차량들로 이른 정체가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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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 매장 매니저들도 법정에

대형 백화점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이후에는 조금 다른 형태의 횡령 사건이 지역의 법정에 올랐다. 피고인은 백화점에 입점한 명품 브랜드 매장의 매니저들이었다. 명품에 대해 무지한 나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브랜드들이었는데, 그들이 빼돌렸다는 물품의 이름은 알 수 없는 외국어나 숫자의 조합으로 되어 있어서 이름만 보고는 도대체 그것이 옷인지 가방인지조차도 모를 지경이었다. 어쨌거나 물건들이 워낙 고가다 보니 횡령의 액수가 훌쩍 높았다. 들여다보니 명품 매장의 매출 시스템은 생각보다 복잡했고 투명하지도 않았다. 횡령죄로 재판을 받는 매니저들은 그 복잡한 시스템 속에서 매출 실적을 올리느라 장부에 허위로 기재한 부분과, 단골 고객을 잡기 위해 외상을 주거나 안 되는 할인을 해주면서 돌려막기한 부분이 자신의 횡령금에 섞여 있다고 억울해했다. 물론 그들 스스로 명품 옷과 가방과 시계를 소비하는 사람인 양 과시하기 위하여 빼돌린 물건들이 그들의 원룸방 옷걸이나 에스엔에스(SNS) 사진 속에서 발견되기도 했지만, 그건 이런 일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수반되는 부수적인 업무의 영역 같은 것이라고 했다. 깨끗하게 세탁해서 다시 태그를 달아 돌려놓으면 될 일이라고…. 그가 법정에 입고 온 깔끔한 저 셔츠도 어느 명품 브랜드의 옷일까? 억울하다며 피고인이 쏟아내는 말들 역시 온통 외국어로 표기된 상품명처럼 이해하기 힘들다고 생각할 무렵 나보다는 명품계의 유통구조를 잘 아는 듯한 재판장이 말했다.

“그래요. 억울할 수 있겠죠. 그런데 그렇게 복잡한 구조를 이용해서 횡령을 한 사람은 당신입니다. 당신이 억울하다고 하는 부분은 당신의 횡령을 완성하기 위해 들어간 일종의 비용이라고 볼 수 있는 것 아닐까요?”

끝내 승복할 수 없었던 매니저는 자신으로부터 공짜 선물이나 외상을 받아간 고객들을 증인으로 신청했다. 그러나 백화점의 브이아이피(VIP) 고객일 그들은 좀처럼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 언뜻 보아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코트를 걸친 노부인 한분만이 법정에 나왔으나 매니저의 억울한 부분을 입증하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길고 긴 설명과 질문을 들은 노부인은 간단히 말했다.

“글쎄요. 제가 워낙 그 매장에 자주 가기도 하고, 물건도 많이 사는데…. 그런 물건을 선물 받은 기억이 없네요. 모르겠어요….”

사람의 마음이 온통 뒤엉킨 듯한 어떤 범죄들에 비해 횡령죄 같은 경제범죄는 훨씬 간명하고 마음 편한 측면이 있다. 어쨌든, 타인의 재물을 탐한 욕심에 대해서는 죄를 물어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간혹, 주차장에 들어가려는 차량들 때문에 항상 길이 막히는 그 백화점 앞을 지나는 어떤 날에는 지역에 백화점이 들어오고 나서 횡령범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만났던 사람들을 떠올리며 조금 복잡한 심경이 된다. 이 모든 것은 저 백화점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생기지 않았을 일이었을까. 글로벌 경제와 지역 활성화 정책과 명품의 유통 구조와 시장 좌판에 놓인 쪽파 한 단 사이에서 인간의 욕심은 얼마만큼 유죄일까.

부산지검 부장검사
대한민국 검찰청의 귀퉁이에서 이끼처럼 자생하던 19년차 검사 정명원이 일하면서 만난 세상과 사람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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