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 주문 필수입니다”…‘비주류’ 울리는 요즘 식당 생존‘술’

노정연 기자 2024. 7. 6.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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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물가·불황이 낳은 요즘 식당가 새 풍속도
임신부·운전자·선택지 없는 비음주인들 소외
업주 입장선 경영난 타개 ‘고육책’

서울 마포구에 사는 정우석씨(가명)는 얼마 전 아내와 자주 가던 동네 레스토랑을 찾았다가 당황했다. 음식만 주문하면 별다른 제약이 없었던 곳이 인당 주류 주문 필수 레스토랑으로 바뀌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이볼과 생맥주 등 주류 메뉴 한 잔 가격은 5000~8000원 선. 문제는 두 사람 모두 술을 잘 마시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술을 전혀 못 마시는 아내 것까지 주문해 한 잔은 거의 남기고 식당을 나왔다”며 “나름 단골이었는데 앞으로 못 가게 됐다”고 아쉬워했다.

맛집 탐방이 취미인 직장인 최현아씨(가명)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요즘 떠오르는 한 인기 식당을 찾았다가 ‘1인 1주류 주문 필수’라고 적힌 메뉴판을 보고 발걸음을 돌렸다. 함께 간 친구가 차를 가져온 데다 최씨 역시 술을 마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주말이긴 했지만 저녁 시간이 아닌 오후에도 주류 주문을 해야 하더라고요. 30분 넘게 대기한 게 아까웠지만 식당 방침이라니 어쩔 수 없죠.” 최씨는 그 이후로 식당에 가기 전 주류 주문이 필수인지 꼭 확인한다고 말했다.

요즘 ‘1인 1주류 주문 필수’를 내건 식당들이 많아졌다. 술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바나 술집이 아닌, 일반 식당과 레스토랑도 1인 1주류 주문을 요구하는 곳들이 생겼다. 선택권이 줄어든 소비자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은 상황. 차를 가져왔거나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이 사전에 이 같은 정보를 모르고 식당을 찾았다면 낭패를 볼 수 있으니 유의해야 한다. 모르고 갔다가 대리운전 비용이 음식값만큼 나올 수도 있다.

1인 1주류를 넘어 보틀(병) 주문이 필수인 식당도 있다. 이러한 식당들은 보통 와인이나 고급 소주, 사케 등 술 한 병(2인 기준)을 주문해야 잔술 추가 주문이 가능하다. 전망 좋은 호텔 라운지 창가 좌석이나 유명 칵테일바의 ‘명당’ 자리에 앉으려면 샴페인 또는 와인 한 병을 ‘자릿값’으로 지불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긴 하지만 작정하고 술을 마시러 가는 곳이 아닌 이상 보틀 주문은 부담이 꽤 크다.

인터넷 맛집 커뮤니티에는 ‘주류 주문 필수’ 식당 방문 후기가 쏟아진다. 비(非)음주 ‘맛집 탐방러’들은 갈 수 있는 맛집이 줄어드는 이 상황이 슬프기만 하다. “요즘 좀 괜찮아 보이는 식당들은 주류 주문이 필수”라며 “음료 가격을 올려도 좋으니 1인 1음료로 팔아주면 좋겠다”는 하소연도 눈에 띈다. 건강을 중시하는 트렌드가 확산하며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술 주문을 의무화하는 것은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방문 전 주류 주문이 필수인지 꼭 확인해보고 가라는 조언부터 보틀 주문 후 따지 말고 가져와 지인에게 선물하라는 ‘팁’까지, 저마다의 ‘주류 주문 필수 식당에 대처하는 방법’들이 공유되지만 뾰족한 수가 없다. 결국 식당 운영은 주인 마음인데 다른 식당을 찾아봐야지 별수 없다는 결론으로 마무리 지어진다.

■식당들 속사정은?

식당들이 주류 주문을 의무화하는 이유는 물가와 함께 상승한 식당 운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것이 가장 크다. 임차료와 인건비를 비롯해 식자재 가격, 전기요금까지 줄줄이 오르며 어떻게든 마진을 늘려야 살아남을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 인력과 시간이 투자되는 요리 메뉴보다 잔에 따라 바로 손님에게 서빙할 수 있는 술은 가장 안정적으로 마진을 남길 수 있는 품목이다.

자영업자들은 코로나19 이후 외식업계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말한다. 인력수급이 어렵다보니 업장 공간을 줄이고 퀄리티를 높여 운영하는 곳들이 많아졌다. 테이블 단가가 비교적 낮은 대규모 업장보다 테이블 수가 적은 소규모 업장이 늘어난 대신, 팔아야 할 평균 테이블 단가가 높아졌다는 설명이다.

서울 은평구에서 5년째 레스토랑 겸 바를 운영하는 최영민씨(가명)는 “체감상 코로나 이전보다 테이블 단가가 20~30% 정도 높아진 것 같다”며 “임대료가 비싼 서울 주요 상권에서는 부담이 더 클 것”이라고 말했다. 주요 상권 식당의 경우 손님이 식사만 하고 술을 시키지 않으면 손해가 날 수 있다는 말이다. 서울 압구정동의 한 일식당 업주는 “저녁 시간에 손님이 메뉴만 두 개 시키고 몇 시간씩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곤혹스러운 게 사실”이라고 토로했다.

주류 주문 의무화는 식당 주인들이 메뉴 가격 상승을 방어하기 위한 방안이기도 하다. 가격 인상에 대한 손님들의 저항감이 크기 때문에 음식 가격은 그대로 두고 술 한 잔을 더 파는 전략을 택하는 것이다. 이 같은 방침은 각종 비용 상승으로 어려움에 처한 자영업자들의 고육지책으로도 여겨진다. 홍준의 한국주류수입협회 고문은 “주류 주문 필수를 요구하는 것은 식당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쉽지 않은 선택”이라며 “손님 중에는 술을 좋아하고 잘 마시는 사람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그럼에도 이를 세우는 건 그만큼 자영업자들의 상황이 절박하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해외선 ‘논알코올’ 옵션 확대 중

해외 식당들은 어떨까. 주류 주문 의무화는 미국과 영국, 일본 등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문화다. 전 세계적으로 음주량이 감소하고 있는 데다 특히 젊은 세대들의 주류 소비가 줄어들며 오히려 소프트드링크와 알코올 함량 1% 미만의 논알코올 음료를 늘리는 것이 요즘 해외 식당들의 전반적인 추세다.

미국의 주류칼럼니스트인 레지 솔로몬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식당이 음식보다 술로 더 많은 마진을 남긴다는 것은 알지만 고객에게 술 주문을 강요하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다”며 “오히려 무알코올이나 논알코올 주류 옵션을 제공하는 곳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식당들의 주류 주문 의무화가 차별을 강화할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술을 마실 수 있는 사람만 식당에 들어오라는 건 비음주인을 배제하는 방침이라는 것이다. 영국에서 와인 컨설턴트로 활동하는 엘리 스콧은 “손님이 운전자이거나 임신 중이거나 건강상의 이유로, 또는 술을 마시고 싶어하지 않을 수 있다”며 “영국에서 주류 주문을 강요하는 것은 건강에 관한 조언 및 기타 법률 등에 위배될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방침을 둔 식당을 찾기 매우 어렵다”고 전했다.

해외와 우리나라의 식당 문화를 단편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미국과 영국 등에서는 손님이 자리를 잡으면 마실 것부터 주문받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백반 문화에 기반한 우리나라는 음료 주문에 인색한 편이다. 음료 문화가 발달한 외국 식당의 경우 주류보다 고가의 비주류 음료 라인업을 갖춘 곳도 흔하다. 개인의 취향이 강화되고 주류 소비가 줄어드는 시대 상황에 맞춰 국내 식당들도 더욱 다양한 음료 옵션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 주류전문가들의 조언이다.

명욱 세종사이버대 바리스타·소믈리에학과 교수는 “외국에 비하면 우리나라는 식당에서 술이나 음료를 시키는 경우가 적은 편”이라며 “물가와 원재료 가격 상승으로 식당들이 음식만 팔아서는 운영이 어려운 시대가 된 것도 맞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나라에서도 주류 주문을 필수로 해야 하는 식당 중 논알코올 음료를 갖춰 놓는 곳들이 생겨나고 있다”며 “다양한 음료 선택지를 제공해 소비자들의 선택 폭을 넓힐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노정연 기자 dana_f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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