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 건국 전부터 살았는데 ‘불법 체류’ 딱지…쫓겨나는 바자우족

한겨레 2024. 7. 6.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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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홍명교의 이상동몽
‘바다 유목민’의 비극
9~13세기 정착, 보르네오섬 50만명
육지 나가면 ‘미등록 체류’ 탄압
정부, 수상가옥 부수고 불태워
그 자리엔 고급 리조트 들어서
지난달 말레이시아 정부 철거단원들이 보르네오섬 바자우족의 집을 부순 뒤 불태우고 있다. ‘보르네오 콤라드’ 페이스북 동영상 갈무리

말레이시아 보르네오섬 사바주 해안가에는 약 50만명의 바자우족 사람들이 산다. 바자우족 아이들은 걸음마를 떼기 전부터 수영을 배우고, 성인이 되면 최대 8분까지 잠수를 할 정도로 바다와 친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다 집시’ 혹은 ‘바다의 유목민’이란 별칭이 붙은 것도 이 때문이다.

바자우족은 말레이시아와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남중국해 일대에 약 130만명이 흩어져 있는데, 말레이시아 정부는 무국적 신분인 바자우족 다수를 ‘불법 이민자’로 간주한다. 그렇다 보니 교육·의료 등 기초적인 복지 혜택에서 동떨어져 있고, 최근에는 당국에 의해 추방되거나 구금될까봐 두려워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바자우족은 말레이시아 건국 훨씬 전부터 그곳에서 살아왔다. 인류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바자우족은 9~13세기에 걸쳐 동남아시아 해안 일대에 정착했고, 이후 힌두 문화와 이슬람 문화, 화교 무역의 영향을 통해 지금의 생활양식을 갖추었다. 그러니 어찌 이들의 삶을 ‘불법’이라 치부할 수 있는가.

어획량 줄어 뭍에서 일거리 찾지만

지난 몇년 사이 바자우족의 일상이 송두리째 파괴되고 있다. 무엇보다 기후위기는 바자우족의 생계 수단인 풍부한 해산물을 고갈시켰다. 수온이 오르면서 산호초의 백화 현상을 야기했고, 이것이 주요 어류의 서식지를 무너뜨린 것이다. 2012년 세계자연기금(WWF)은 당시 하루 100t의 어획량을 기록했던 사바주 툰 무스타파 해양공원에서의 고기잡이가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예측했다. 2012년께 한번에 30㎏의 랍스터를 잡을 수 있었던 조호르해협 어민들은 10년 뒤 4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든 어획량을 보며 한탄해야 했다.

어획량이 줄어들자 바자우족 인구 상당수가 육지로 이동해 일거리를 찾았다. 평생 바다에서 살아온 그들은 어디에서든 ‘국외자’나 ‘불법 체류자’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산재 빈도가 높은 위험 작업이 떠맡겨지기 일쑤였다. 말레이시아의 인종주의적 변화 속에서 바자우족은 “시민권 취득 자격이 없는 필리핀 이민자”로 오해되곤 한다. 천년 전의 이주를 아직까지 딱지 붙이는 것이다.

이런 문제로 인해 많은 바자우족 사람들은 체류허가증 없는 미등록 신분이라는 이유 하나로 수용소에 체포됐다. 육지에서 열악한 일터와 수용소 등을 떠돌아다니다 바닷가 고향으로 돌아온 그들을 맞는 것은 파괴된 수상가옥과 새로 들어선 고급 리조트뿐이었다.

6월4일 사바주 당국이 “보안 강화와 국경 범죄 퇴치”를 명목으로 셈포르나 해양공원 내 바자우족 가옥들을 무자비하게 철거했다. 이 지역 7개 섬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강제 철거로 인해 200채 이상의 집들과 138개의 구조물이 파괴됐고, 500여명이 평생 살던 집을 잃어버렸다. 또 해안가에서 재배하던 농작물도 마구 짓밟혔다.

현지 사회운동단체인 ‘보르네오 콤라드’의 묵민 난탕 활동가에 따르면, 상당수 수상가옥은 대형 선박에 의해 파괴됐고 나머지는 불태워졌다. 보르네오 콤라드의 소셜미디어 계정에 업로드된 영상에는 군복을 입은 철거단원이 수상가옥을 부수고 불태우는 모습이 담겨 있다. 묵민 난탕 활동가는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바자우족은 국경이 생기기 전부터 그 지역에 살고 있었다”며 “이번 강제 철거는 너무 잔인하다”고 말했다. 말레이시아의 반차별 엔지오(NGO) ‘푸삿 코마스’의 활동가 제럴드 조지프는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퇴거 조처에 대해 “정부가 정치적으로 이길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마을을 부수는 것만이 정부의 유일한 대책이었을 것”이라고 논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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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초축적’과 같은 국가폭력

지난달 말레이시아 정부 철거단원들이 보르네오섬 바자우족의 집을 부수고 있다. ‘보르네오 콤라드’ 페이스북 동영상 갈무리

셈포르나 해양단지의 한 구호단체에서 일하는 아맛 카밀은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인터뷰에서 “일부 마을에선 퇴거 전 통지를 받았지만 통지 내용도 이해하지 못한 채 철거당했다”고 폭로했다. “바자우족은 현지 법률을 모릅니다. 안다고 한들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휴먼라이츠워치 보고서에 따르면 말레이시아 정부는 2020년 5월 이후 불법 이주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여 지금까지 4만5천명의 미등록 주민을 구금했다.

이와 같은 강제 철거와 추방, 체포의 과정은 자본주의 시스템이 어떻게 형성됐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인문학자 한디디가 쓴 책 ‘커먼즈란 무엇인가’를 보면, 수백년 전 영국에서 ‘커먼즈’(commons)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사용하는 개방된 땅” 혹은 “보통 사람들”이란 의미를 가졌다. 이들에게 숲과 농지는 삶의 기반이었는데, 귀족과 신흥부르주아들은 ‘생산성 향상’을 위해 조상 대대로 모두의 것으로 존재하던 땅과 숲을 무자비하게 강탈하고 사유화했다. 이런 탈커머닝(de-commoning)의 결과, 17세기 말 잉글랜드 토지의 4분의 1, 스코틀랜드 토지의 대부분이었던 공유지는 200여년 뒤 5%밖에 남지 않게 됐다. 바자우족에 행해지는 잔혹한 퇴거 과정 역시 지난 수백년 동안 함께 나누고 공유하며 살아가던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파괴해온 과정과 다르지 않다.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의 드넓은 숲을 왕의 소유로 선포할 때 그곳에서 수백년간 살던 평민들에게 동의 여부를 물어본 적 없었듯, 과거 일제가 조선의 농지를 강탈할 때 무자비한 폭력을 가했듯, 말레이시아 정부 역시 바자우족 사람들에게 그들의 고향을 무너뜨릴 권한이 있는지 물어본 적이 없다. 카를 마르크스는 이처럼 체제에 포섭되지 않았던 생산자 공동체를 기존의 생산 수단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국가폭력을 ‘시초축적’이라고 규정했다. 강제 철거와 노예화, 정복, 대량 학살, 강탈, 살인….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폭력의 역사가 인류를 짓눌렀다. 과거의 제국주의자들이 그랬듯, 이제 말레이시아의 자본가들은 아주 저렴하게 부릴 수 있는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비판 목소리에 대한 공격도 이뤄지고 있다. 6월27일, 바자우족의 권리를 위해 캠페인을 벌여온 묵민 난탕 활동가는 페이스북에 강제 철거 영상을 업로드한 것이 ‘선동죄’에 해당될 수 있다는 이유로 기소됐다. 이 지역 활동가들은 “소외된 공동체에 대한 인정을 촉구하기 위해” 행동에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또 말레이시아의 선동죄가 1948년 식민주의에 맞선 해방운동을 억압하기 위해 제정된 악법이라며 “당장 폐지되어야 한다”고 규탄했다. 이런 수탈을 막지 못하면 바자우족이 자연과 공생하며 지켜온 아름다운 해안가에는 이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관광 리조트들이 즐비해질지도 모른다.

동아시아 연구활동가

플랫폼C 활동가. 동아시아 이야기를 씁니다. 각 사회의 차이를 이해하고, 같은 꿈을 지향하자(異牀同夢)는 의미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상을 품은 동아시아의 꿈(理想東夢)이라는 뜻도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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