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돌풍’, 정치는 사라지고 ‘허접한 복수’만 남았다

한겨레 2024. 7. 6.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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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풍’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한국은 짧은 기간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룬 나라다.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한 나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근 몇년 사이에 드라마에서나 사용하는 ‘시간 이동’ 장치가 현실에서 작동한 것처럼, 경제와 정치 모두 퇴행하는 이상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면 이렇다. 세계 10위권의 경제 규모를 자랑하지만 국민의 삶은 궁핍하다. 한국 민주주의에 적신호가 켜졌다는 외신 보도가 끊이지 않고, 언론자유지수 역시 매년 추락하고 있다. ‘추적자’ ‘황금의 제국’ ‘펀치’ 이른바 권력 3부작으로 주목받았던 박경수 작가가 “답답하고 숨 막히는 현실을 리셋하고 싶은 갈망”을 드라마 ‘돌풍’(넷플릭스)으로 토로한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돌풍’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꿈꿨던 민주투사들이 현실 정치에 뛰어들어 집권 세력이 된 이후를 다룬다. 진보 정치 세력이 수구 보수 정치 세력처럼 타락하고 오염된 기득권으로 전락했다는 문제의식의 발로다. 투쟁 의지를 북돋우던 노래와 구호로 뜨거웠던 대학가와 노동 현장은 물론, 공안 세력의 고문 현장도 빛바랜 사진처럼 1980년대 상황을 현상한다. “세상의 불의에는 분노하지만, 자신의 불의에는 한없이 관대한 괴물”을 향해 돌풍을 일으키겠다는 의도였다.

문제는 “정의가 지배하는 나라 만들”기에 실패했다는 작가의 문제의식이 날것 그대로 표출되었다는 점이다. 현실 정치에 관한 문제의식을 교조적이고 선동적으로 쏟아내면서 극적 형상화에 실패했다. 부패한 정치 세력을 향한 분노의 의인화에 가까운 주요 캐릭터들은 정형화되어 개성을 상실했다. 개연성을 담보하지 못한 반전 플롯은 인식과 격변의 극적 상황과 무관하게 매회 반복되면서 절정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진보 정치 세력의 타락을 질타하기 위해 부패한 사법 권력의 극적 형상화에 성공한 ‘펀치’의 캐릭터와 플롯을 답습하면서 예고된 참사에 가깝다. 남은 것은 1980년대 군사정권에 맞서 민주와 정의를 갈망했던 민주화운동 세력을 향한 조롱 섞인 비난뿐이다.

“낡아버린 과거가 현실을 지배하고, 미래의 씨앗은 보이지 않는” 정치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작가가 내세운 주요 캐릭터들의 언행은 민주와 정의를 참칭한 정치 폭력과 다르지 않다. 발단은 인권 변호사 출신의 대통령 장일준(김홍파) 시해 사건이다. 국무총리 박동호(설경구)와 경제부총리 정수진(김희애)이 그들의 정치적 스승인 장일준의 아들이 연루된 고위직 사모펀드 비리로 충돌하면서 발생한 비극이다. 박동호는 장일준의 심장질환을 이용하여 시해를 도모하고, 정수진은 코마 상태에 빠진 장일준의 숨을 막아 시해한다. 이후 “장일준 대통령의 정치적 적장자”를 주장하는 정수진과 “장일준이 남긴 부채를 감당”하겠다는 박동호가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격정적 감성을 자극한다.

개연성 부족을 인식할 겨를도 없이 전개되는 극적 상황은 ‘정치 드라마’가 아닌 ‘복수 드라마’의 장르 문법을 활용한다. 타락하고 오염된 정치적 신념에 기반을 둔 사적 영역의 ‘복수’를 공적 영역의 ‘정치’ 행위로 오인할 수 있게 구성했다. “정의로운 세상”과 “반칙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정치 구호와 “북풍 공작”과 “종북세력 척결”이라는 정치 선동이 난무한다. 하지만 박동호와 정수진의 갈등이 극단으로 치달으면서 ‘정치’는 실종되고, 격정적 ‘복수’의 욕망이 이들을 파국으로 몰아간다.

박동호는 국회의원 서기태(박경찬)에게 누명을 씌워 죽음으로 몰아간 장일준과 정수진을 “세상의 오물들”로 규정하고, 그들과 함께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겠”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의 행위는 정치적 신념을 지켰던 친구 서기태를 애도하기 위한 사적 복수에 불과하다. 전대협 의장 출신의 사업가 남편 한민호(이해영)의 고위직 사모펀드 연루 때문에 정치적 위기에 빠졌던 정수진 역시 검찰 수사를 앞두고 남편이 스스로 세상을 떠나자 복수심에 사로잡힌다. 자신을 고문했던 공안 검사 출신 야당 대표와 운동권 출신 노총 위원장 선배를 이용하는 그의 행동은 ‘정치적 야합’이라는 비난조차 사치스러운, 감정에 치우친 사적 복수일 뿐이다.

박경수 작가는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다시 시작하고 싶다. 숨 막히는 오늘의 세상을 다 쓸어버리고” 싶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표현한다. 현실 정치에서 불가능하니 드라마를 통해 대리 만족하겠다는 모양새다. 하지만 ‘정치’라는 공적 영역의 문제를 ‘복수’라는 사적 영역으로 축소하면서 현실 정치를 향한 작가의 분노와 질타는 공론화에 실패했다. 한편의 드라마로 세상을 바꿀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음에도, 돌풍을 일으켜 세상을 쓸어버리고 싶을 만큼 분노를 이기지 못하는 작가의 심정을 이해 못 할 바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문제의식도 극적 형상화에 성공하지 못하면, 교조적인 선전·선동에 불과하다. ‘돌풍’이 ‘허접한’ 복수 드라마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충남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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