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브-어도어 사태, ‘뻘짓’ 아닌 K팝 멀티레이블 ‘성장통’ 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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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언론과 소셜미디어를 통틀어 가장 뜨거운 화제는 ‘하이브-어도어’ 사태였다. 국내 최대 케이(K)팝 그룹 내 인기 걸그룹 보유 기업의 경영권을 두고 수장들이 나서 격한 공방을 벌였기 때문이다. 서로 던지는 폭로 속에는 여느 기업에나 있는 갈등도 있지만, 묻어두었던 K팝 산업의 모순들도 있었다. 대중문화라면 한마디 쉽게 던질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저마다 전문가로 돌변해 의견을 개진했다. K팝의 영광이 마뜩잖던 사람들은 이럴 줄 알았다며 K팝 산업의 부정적인 면들을 부각시켰고, 산업 논리를 이해하는 사람들은 날선 공방 뒤에 숨겨진 본질을 캐내느라 바빴다.
산업이 성장하는 과정에는 성장통이 있기 마련이다. 하이브-어도어 사태 역시 여느 산업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투자자와 경영자, 혹은 경영자와 핵심개발자 간의 갈등이었다. 실제로 많은 산업에서 투자자와 경영자 사이에 내분이 일어난다. 게임 산업에서도 핵심개발자가 성공적으로 게임을 제작한 뒤 경영진과의 불화로 회사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다른 점이 있다면 K팝 산업은 상품이 대중들에게 친근한 ‘스타’이고, 핵심개발자도 ‘스타’인 탓에 이런 갈등을 대중에게 직접 공개해 호소했다는 것뿐이다.
그럼에도 하이브-어도어 사태가 산업 성장에 꼭 필요했던 성장통으로 자리매김하려 한다면 몇 가지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있다. 왜 다른 K팝 기업이 아닌 하이브에서 이런 사태가 일어났을까 하는 점이다. 다른 K팝 기업의 경영진과 달리 유달리 하이브 내 경영진이 인간적 성숙이 덜 되어 이런 사태가 난 것일까?
산업화 과정 속 K팝 기업들의 고민
결코 그렇지만은 않다. 다른 K팝 기업들도 산업화 속에서 수많은 ‘뻘짓’을 해왔다. 그런 ‘뻘짓’을 반복하지 않으려는 과정에서 하이브-어도어 사태도 발생한 측면이 있다. 이후 K팝 산업이 한발짝 더 나아가려 한다면, 어떤 시행착오들이 있었는지 복기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다. 그리고 이때 기억해야 할 중요 키워드는 K팝은 ‘산업화’를 거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가요기획사들은 1990년대 이후 K팝 기업으로 변화하면서 산업화를 진행해왔다. 국어사전에서 ‘문화산업화’를 찾으면 “문화 생산물이나 서비스를 상업적·경제적 입장에서 상품으로 생산해 판매하는 산업의 형태가 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즉 산업화란 순수한 예술적 열정이 아니라 경제적 이윤을 위해 생산자가 문화상품을 만드는 것이며, 이것이 시장에서 많은 소비자에게 판매될 수 있도록 자본이 투여되는 일이다. 90년대 이전 가요기획사 시절에도 ‘가수’라는 문화상품은 있었지만, 자본이 매개되지 않아 더 많은 이윤을 추구하는 것도, 시장을 더 크게 확대하는 것도, 상품을 더 고도화시키는 것도 어려웠다. 소비자들은 겉으로 보이는 문화상품에만 관심이 있지만, 이를 통해 이윤을 추구하는 생산자와 투자자 없이는 ‘산업화’가 완성되지 못한다.
우리나라 기획사들이 산업화의 길로 들어선 것은 아이돌이라는 문화상품이 생겨나면서부터다. 1996년 에스엠(SM)엔터테인먼트가 HOT라는 아이돌 상품을 선보이면서 K팝 시장은 확대됐고 이후 많은 기획사들이 시장에 뛰어들었다. 치열한 시장 경쟁 속에 완성도 높은 아이돌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많은 자본이 필요했고, 기획사들은 더 많은 생산활동을 보장받기 위해 자본투자를 받기 시작했다. SM이 2000년 코스닥에 등록하면서 가장 먼저 자본 수혈을 받았고, 1998년 설립된 와이지(YG)엔터테인먼트가 2011년에, 1996년 설립된 제이와이피(JYP)엔터테인먼트가 2013년에 코스닥 시장에 등록되면서 산업화는 가속화했다.
자본 투자를 받은 K팝 기업들은 이전과는 다른 고민에 빠졌다. K팝 기업들의 수익구조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음원·음반 수익/ 광고나 출연료, 굿즈 판매와 같은 지식재산권 활용 수익/ 공연 수익이다. 전통적으로 한국 K팝 기업들은 음원·음반 수익 의존도가 높았고, 국내 공연 문화 정착이 늦어 공연 수익 비중이 낮았다. 3대 수익구조가 균형을 잡은 것은 방탄소년단(BTS) 해외 성공 이후인 2010년대 후반부터다. 즉, 그 이전까지 K팝 기업들의 수익은 매우 들쭉날쭉한 불안정한 상태였다는 이야기다.
투자자들은 기업 수익구조가 불안한 상태로 유지되는 것을 용납하기 어렵다. 하지만 아이돌 한 팀이 완성되는 데 최소한 3~6년, 아무리 여러 그룹을 돌려도 K팝 기업들이 분기마다 안정적 수익을 거두는 것은 어려웠다. 때문에 코스닥에 등록한 K팝 기업들은 대부분 사업 다각화를 시도했다. 외식업, 뷰티, 패션, 게임, 여행, 영상 콘텐츠 제작 등 K팝과 큰 연관 없는 분야들이었다. ‘버닝썬 게이트’가 터졌던 2019년까지 YG에서 클럽 운영에 계속 관심을 가졌던 이유도 안정적 현금흐름 창출이라는 매력 때문이었다. 이런 시도는 대부분 큰 성과 없이 마무리됐다. K팝 기업들은 많은 투자금을 수업료로 낸 뒤 음악 외 분야에서 돈을 버는 것은 더 어렵다는 교훈을 얻어야 했다.
하이브의 산업화 전략, 멀티레이블
이러던 즈음 K팝 산업에 새로운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2017~2018년 BTS가 큰 성공을 거두면서 이를 만든 빅히트엔터테인먼트가 단번에 국내 최대 K팝 기업으로 등극했다. 덕분에 2018년에는 게임업체인 넷마블로부터 2천억원이 넘는 지분투자를 유치했고, 2020년에는 코스피에도 상장했다.
기업공개를 하면서 빅히트는 사명을 하이브로 바꾸고 새로운 전략을 꺼내들었다. 바로 멀티레이블 체제에 기반한 플랫폼 기업이었다. 하이브는 3대 기획사들이 기업공개 이후 어려움을 겪었던 과정을 이해했다. 현재 음악을 만드는 속도로는 투자자를 만족시킬 수 없고, 비관련 사업에서도 별 기대할 것이 없었다. K팝에서 승부를 보기 위해서는 더 빠른 속도로 상품 공급을 늘려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한 회사가 아니라 여러 회사에서 상품을 만들어 속도감 있게 출시하는 것이 효율적이었다. 그런 다양한 상품을 위버스라는 플랫폼에 올려 다양한 수익을 창출하는 것이다. 게임개발사들의 멀티 스튜디오 체제와 유사했다.
사실 멀티레이블 체제를 먼저 도입한 것은 JYP였다. 2011년까지 미국 진출을 추진하다 잇따라 실패했던 JYP는 2018년 경영 방향을 재편하면서 멀티레이블 체제를 도입했다. 당시 박진영 대표는 “회사 규모가 커지는데 성장 속도에 비해 콘텐츠 제작 프로세스가 신속하지 못하다”며 회사를 아티스트별 5개 본부로 분리했다. 이후 JYP에서는 해당 본부에서 아티스트별로 마케팅과 기획, 매니징 등을 독립적으로 수행했고, 박진영 PD에 대한 음악적 의존도도 낮추기 시작했다.
SM도 2022년부터 멀티 프로듀싱 체제로 바뀌었다. SM은 K팝 기업 가운데 가장 많은 그룹, 즉 지식재산권(IP)을 보유했지만 단일한 체제에서 제작이 이뤄져 수익성 확대가 저조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그러던 SM도 2022년 이수만 PD를 그룹에서 분리한 뒤 멀티 프로듀싱 체제로 변신했다. K팝이 1인 프로듀서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서 움직이는 체제를 벗어나 공급량을 늘리기 위해서는 멀티레이블 형태로 바뀌는 것은 분명 필요한 변화였다.
시장 헤게모니는 ‘사람’인 K팝 산업
하이브가 멀티레이블 체제로 가기 위해선 넘어야 할 산이 있었다. JYP나 SM은 이미 오랜 기간 많은 그룹을 제작한 경험도 있고 보유한 IP도 많아 멀티레이블로 분리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쉬웠다. 하지만 하이브에게는 BTS가 전부였다. 이를 위해 하이브는 쏘스뮤직, 플레디스, 빌리프랩, 케이오지 등과 같은 기존 기획사들을 인수하거나 어도어 같은 자회사를 설립해 멀티레이블 체제를 꾸렸다. 또한 IP를 많이 가진 SM 인수에 나서기도 했다.
그 결과, 멀티레이블이라 해도 JYP, SM과 하이브에는 차이가 있다. 장성한 자식들을 여럿 두어 각기 분가를 이룬 대가족과 각기 달리 성장한 가족들을 하나의 대가족으로 엮은 것과 비슷하다. 후자의 운영 난이도가 당연히 높다. 특히 모회사, 자회사 구조인 하이브의 경우 자회사의 독립성 보장 범위, 모회사의 자회사에 대한 통제와 영향력의 수준 등에 대한 명확한 기준도 없다. 가보지 않은 길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 지붕 안 레이블들이 서로 경쟁하는 형태라 갈등도 피할 수 없다. 각자 역할이 다른 기업들이 수직계열화를 이룬 기존 재벌 체제와 달리 모두가 ‘동등한 레이블’이기 때문이다. 갈등을 피하려면 서로 색깔이 다르고 관계가 보완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 아이돌 그룹에 초점을 두는 K팝 산업에서 이는 쉽지 않다.
이런 구조에서 더 독특한 색깔을 낼 수 있는 생산자, 즉 레이블은 더 높은 보상과 권한을 요구할 수 있다. 낡은 관행이 부당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게다가 K팝은 생산자도 ‘스타’인 산업이다. K팝의 뛰어난 상품은 사람의 손끝에서 만들어져 사람으로 구현된다는 것을 소비자도 알고 있다. 소비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특유한 색깔을 만들고 구현하는 사람이며, 결국 이 시장의 헤게모니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투자자들은? 아마도 뒷짐 지고 소비자가 택한 스타 생산자에게 투자할 기회를 엿보고 있을 터다. 이 또한 산업화의 비정한 논리다. 긴 싸움이 이어지겠지만 누군가는 수업료를 치러야 한다. 그래야 K팝 산업도 다음 단계로 넘어갈 것으로 보인다.
김윤지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yzkim@koreaexi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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