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부권이란 용어 없어"‥법무부의 속내는? [서초동M본부]
채 상병 특검법이 국회 본회의를 다시 통과했습니다. 밤샘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 끝에 야당 주도로 의결됐습니다. 이제 남은 건 윤 대통령의 결심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거부권을 행사할 거라는 전망이 우세합니다. 특검법 통과에 대통령실은 즉각 위헌에 위헌을 더한 반헌법적 법안이라고 주장하며 강력히 반발했습니다. 채 상병 특검법은 또다시 거부권 수순을 밟을까요?
지난달 28일 오후 2시 27분, 법무부가 기자들에게 공지를 하나 냈습니다.
제목은 '법무부 대변인실에서 알려드린다'. 언론 기사에서 대통령의 '거부권'과 '재의요구권'이라는 용어가 섞여 사용되고 있는데 대한민국 헌법에는 대통령의 법률안에 대한 '거부권'이라는 용어는 없고 '재의요구권'만 있을 뿐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거부권'이라는 용어가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적법한 입법 절차인 '재의요구권'에 대해 자칫 부정적인 어감을 더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법무부가 입법 절차상 용어에 대해 기자들에게 친절한 설명을 하는 건 이례적입니다.
그럼 거부권은 틀린 말일까요?
법무부가 말하는 대통령의 '재의 요구권'은 헌법 제53조 2항에 나와있습니다.
<헌법 제53조 1항과 2항> ① 국회에서 의결된 법률안은 정부에 이송되어 15일 이내에 대통령이 공포한다. ② 법률안에 이의가 있을 때에는 대통령은 제1항의 기간 내에 이의서를 붙여 국회로 환부하고 그 재의를 요구할 수 있다. 국회의 폐회 중에도 또한 같다.
재의 요구권은 다시 말해, 대통령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법안에 이의가 있으면 이를 공포하는 것(1항)을 거부하고, 이의서를 붙여 국회에 다시 돌려보내는 것(2항)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거부의 의미가 있는데다 '거부권'이라는 단어가 직관적이고 이해하기 쉽기 때문에 많은 언론들이 기사에 '거부권'과 '재의요구권'이라는 말을 섞어 써왔습니다.
그렇게 써온 지도 오래됐습니다. 1988년 7월 14일, 경향신문과 동아일보는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국정감사 조사법'과 '국회증언감정법' 개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 확실해졌다'는 내용의 기사를 보도했습니다.
모두 '법률안 거부권'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① 헌법학신론 21판 (고 김철수 교수 저, 2013년 2월 20일) (4) 법률안거부권 1) 법률안거부권의 의의 대통령의 법률안거부권(veto power, Vetorecht)이란 국회에서 의결되어 정부에 이송되어 온 법률안에 대하여 대통령이 이의가 있을 때 이의서를 붙여 국회의 재의에 부치는 제도이다.
② 한국헌법론 15판 (전광석 교수 저, 2020년 2월 17일) (2) 법률안 거부권 대통령은 국회에서 의결한 법률안에 대해서 재의를 요구할 수 있다.
③ 헌법학 15판 (장영수 교수 저, 2024년 3월 5일) 3. 법률안거부권 국회에서 의결된 법률안이 정부에 이송되었을 때, 대통령은 15일 이내에 이의서를 첨부하여 국회로 환부하면서 재의를 요구할 수 있다(헌법 제53조 제2항). (중략) 그러나 대통령이 거부권을 남용하는 문제가 발생될 수 있으므로, 대통령의 거부권행사의 남용을 견제하기 위하여 국회에서 재적의원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재의결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헌법 제53조 제4항).
다만, 한수웅 당시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2020년 2월 출판된 '헌법학 10판'에서 "법률안 거부권은 법률의 제정을 일시적으로 정지시키는 이의제기권을 의미한다"며 "이러한 점에서 '법률안 거부권'이라는 용어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헌법학자들에게도 물어봤습니다. 돌아온 답은 '문제없다'였습니다. 앞서 살펴본 헌법학책을 저술한 장영수 교수는 MBC와 통화에서 "학술적으로 거부권이라는 말이 배척되는 말이 아니"라며 "법률안을 거부하고, 거부하니까 국회에 재의를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거부권이라는 용어가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정국이 민감한 건 알겠으나 법무부가 일일이 나서서 명칭까지 정해주는 건 과한 게 아니냐"고 했습니다.
헌법재판연구원장을 지낸 한 헌법학자도 "재의요구권의 기원이 veto power, 즉 거부권"이라면서 "거부권과 재의요구권은 같은 뜻을 달리 표현하는 것이고, 언론에서 거부권이라는 표현을 써도 전혀 문제 될 게 없다"고 했습니다.
법무부의 갑작스러운 용어 사용 공지를 보도한 다음날, 한 통의 메일을 받았습니다. 법무부가 일반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발간한 생활법률 가이드북 '한국인의 법과 생활'의 2021년 전면개정판에도 '거부권 행사'라는 표현이 있다는 제보였습니다.
해당 책을 찾아봤습니다.
17쪽에 나와 있었습니다. 법률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그림으로 설명하면서 대통령이 법안을 국회로 돌려보내는 걸 '거부권 행사, 환부·재의요구'라고 표현했습니다. 법무부 스스로도 "대한민국 헌법에 없는" '거부권'이란 용어를 사용했던 겁니다.
의문이 들었습니다. 거부권이 틀린 표현도 아니고, 법무부가 직접 발간한 책에도 나와 있는데 왜 이런 공지를 기자들에게 돌렸을까요.
'거부권'이라는 용어가 자칫 부정적인 어감을 더할 수 있다는 법무부 설명, 어디서 들어본 적 없나요? 그동안 정부와 국민의힘이 줄곧 주장해왔던 논리와 똑같습니다.
[이상휘/국민의힘 미디어특위 위원장(6월 12일, SBS 라디오 '김태현의 정치쇼')] "재의요구권이죠. 거부권이라는 것은 좀 부정적인 의미가 많이 담겨있다 이렇게 봐야되고." [한덕수/국무총리(작년 4월 9일, KBS 1TV '일요진단 라이브')] "거부권이라는 거는 보통 우리가 쓰는 용어이긴 합니다만 정확히 헌법상 용어는 재의요구권입니다. 한마디로 여야가 충분히 논의하거나 좋은 방향으로 합의를 못 하고 일방적으로 처리되거나 그 법안이 중대한 우리의 국익이나 또는 법률적 그런 하자를 가졌을 때에는 다시 한번 검토해달라 하는 것이거든요." [이양수/당시 국민의힘 원내수석부대표(작년 5월 25일, SBS 라디오 '김태현의 정치쇼')] "단도직입적으로 거부권이 아니고 재의요구권입니다. 거부권은 정치적 용어이고, 법률적 용어는 재의요구이지요."
"김 여사가 결혼하기도 전인 십여 년 전 사건을, 문재인 정부 당시 검찰이 강도 높게 수사하고도 김 여사를 소환조차 못 했다"면서 "구체적 범죄 단서가 있는 사건이 전혀 아닌, 특정 정당이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고발한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또 "특검법은 여야 합의 없이 여당의 추천권을 배제해 정치 편향적인 특별검사가 임명될 수밖에 없는 기형적 구조"이고, "모든 혐의를 무한정 수사할 수 있도록 수사 범위를 모호하고 광범위하게 정해 헌법상 법률의 명확성 원칙과 비례의 원칙에 위반된다"고 설명했습니다.
법무부는 특검법안 소관 부처로서 입장을 설명했을 뿐이라고 답했지만, 정부 부처가 나서서 김건희 여사 편을 든다는 지적이 나왔습니다.
윤 대통령이 취임 이후 거부권을 행사한 법안은 모두 14개입니다. 2023년 4월 4일 양곡관리법 개정안 재의 요구를 시작으로, 5월 16일 간호법 제정안, 12월 1일 노란봉투법과 방송3법(방송법·방송문화진흥법·한국교육방송공사법 개정안), 그리고 5월 29일 전세사기특별법·민주유공자법·농어업회의소법·지속가능한한우산업지원법까지 법안 14건을 국회로 돌려보내겠습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가장 많은 재의요구권을 쓴 대통령입니다.
민주당은 윤 대통령이 거부한 법안들을 다시 상정한다는 입장이라, 거부권 정국은 계속 이어질 걸로 보입니다. 이번에 국회를 통과한 채 상병 특검법은 물론이고, 국회 본회의 상정을 앞둔 방송3법과 방송통신위원회법 개정안도 윤 대통령의 거부가 예상됩니다.
법무부는 정말 기자들에게 법 상식을 알려주고 싶었던 걸까요? 그런 의도라기에는 아래 문장이 계속 신경이 쓰입니다.
'거부권'이라는 용어가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적법한 입법 절차인 '재의요구권'에 대하여 자칫 부정적인 어감을 더할 수 있는 측면이 있어 말씀드립니다.
구민지 기자(nine@mbc.co.kr)
기사 원문 - https://imnews.imbc.com/news/2024/society/article/6614581_3643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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