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으로 돌아왔다…한국인 소멸지역서 신분 증명하며 ‘보통의 삶’

이문영 기자 2024. 7. 6.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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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호준과 호이준 사이에서
⑤ 한국인이 소멸하는 땅으로
몽골 출국 232일 뒤 ‘호이준’으로 귀국
인구소멸지역 취직해 특화비자 취득
처음 만든 명함 건네며 “연구직 뿌듯”
한국에서 24년간 미등록 이주아동으로 살아온 호준(가명)씨가 지난 3월 취업한 한 특수장비차량 기업에서 이 회사가 생산한 전기굴착기 사이에 서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조금 전 인천공항 검역소에서 전화 왔어요.”

2022년 3월4일 낮 12시45분. 사강(김사강 이주와 인권연구소 연구위원)이 메신저 단체대화방에 전했다. “호준(가명·당시 30)씨가 입국장을 무사히 통과한 것 같다”고 했다. 공항 입국 심사장이나 검역소에서 국내 신원보증인의 연락처를 요구하면 자신의 번호를 알려주라고 사강은 호준에게 미리 말해뒀다.

“곧 뵙겠습니다.”

4시간 전 몽골에서 한국행 비행기에 탑승한 호준은 휴대전화를 끄기 직전 마지막 인사를 남긴 뒤 소식이 없었다. 한국에선 사강과 영아(이영아 아시아의 창 소장)가 호준의 도착을 기다리며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호준은 입국 수속을 마치면 코로나19 방역지침에 따라 곧바로 시설격리 될 예정이어서 공항으로 마중 나갈 수도 없었다.

“배고파 죽겠어요.”

호준은 오후 4시가 넘어서야 대화방에 나타났다. 일주일간 격리 생활을 할 호텔의 위치를 공유하며 숙소 입실을 알렸다. “연락이 없어 걱정했다”는 사강에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며 미안해했다. 영아가 두 팔 벌려 호준을 맞았다.

“몸고생 마음고생 많았어요. 환영합니다.”

한국 생활 23년 만에 미등록 외국인으로 자진 출국(한겨레 5월25일치 1면, ‘대한민국 사람인 줄 알았는데 돌아오기 위해 나가야 했다’ hani.co.kr/arti/society/rights/1142000.html)한 호준은 232일 만에 신원보증인이 필요한 단기 체류 외국인이 되어 돌아왔다.

호준은 “공항에만 가면 정신이 없었”다. 울란바토르공항에서 탑승장으로 이동하고 있을 때 안내 방송이 나왔다. 호준의 귀에 “호이준(가명)”이란 단어가 들렸다. 자신의 몽골 이름이 반복해서 불리고 있었지만 호준은 “이름 말곤 알아들을 수 없어 머릿속이 하얘졌”다.

“저기, 뭐라는 거예요?”

한국어를 하는 몽골인 직원을 찾아 물었다. 직원은 호준을 공항 사무실로 데려갔고, 사무실 직원이 그를 인계받아 엘리베이터에 태웠다. 엘리베이터가 지하로 내려갔다. 당황한 호준은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침이 바짝바짝 말랐”다. 호준에게 긴장은 ‘무조건 반응’이었다. 한국에서 살면서 신분 확인 절차라면 무엇이든 피해 다녀야 했던 오랜 시간이 몽골에서까지 호준을 겁먹게 했다. 지하에선 호준의 가방이 비행기에 실리지 못한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2022년 3월4일 몽골 울란바토르공항에서 한국행 비행기에 오른 호준씨가 이륙 직전 찍은 자신의 모습. 호준 제공

“라이터.”

직원이 손가락으로 가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수하물로 부친 짐에 라이터를 넣은 실수 탓이었다. “체포될 일은 아니”란 걸 안 뒤에도 호준의 심장은 뜀박질을 멈추지 않았다.

몽골로 출국(2021년 7월15일)하던 날에도 호준은 인천공항 사무실에서 “멘붕” 상태였다. “출국장에서 출국명령서를 보여달래서 찾는데 찾지 못하”자 직원들이 그를 사무실로 데려갔다. 긴장한 호준은 가방을 뒤지며 “출입국센터에서 출국신고 할 때 두고 온 것 같다며 소리를 질렀”다. 잠시 뒤 가방에서 명령서를 발견한 호준은 “민망하고 창피해서” 또 “허둥지둥”했다. 비행기 좌석에 앉았을 때에야 공항 사무실에 외장하드를 놓고 왔다는 걸 알아차렸다. 몽골에서 한국이 그리울 때마다 꺼내 보려고 한국 드라마와 예능 영상 100여개를 내려받은 하드였다. 호준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이젠 정말 외국인이 됐구나.

‘무너지는 하늘’을 가로지르며 법무부 방침(기한 안에 자진 출국하면 재입국 심사 기회 부여)에 따라 몽골로 떠난 호준이 인천공항 입국장으로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대면한 것은 그 낯선 자각이었다. 다시 만난 한국은 지금까지 호준이 알던 한국이 아니었다.

빼도 박도 못하게 ‘호이준’

“외국인들 이쪽으로 오세요.”

통로부터 나뉘어 있었다. 한국 학교를 다니고, 한국말로 사고하고, 스스로를 한국인이라고 믿으며,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떡볶이였던 호준은 몽골에서 돌아오자마자 한국인들과 분리됐다. ‘외국인 줄’에 끼여 공항 검색대를 통과하는 동안 예전엔 의식하지 못했던 시선들을 감지했다. “입국 심사 과정에서 비백인 외국인이 느끼는 기분이 무엇인지 체감”한 호준은 “빼도 박도 못하게 호이준이 돼버린 현실”을 깨달았다.

그 감각은 그의 동선마다 따라다녔다.

수하물을 찾은 호준은 “다른 데로 이탈하지 못하도록 펜스로 차단”된 “외국인 통로”로 안내됐다. 몽골인 입국자들이 통로를 빠져나온 순서대로 버스에 태워졌다. 버스는 정부가 지정한 격리 호텔로 그들을 싣고 갔다. 격리 비용 84만원을 선불로 내고 방을 배정받았다.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그들에게 “호텔 직원들이 답답하다는 얼굴로 한숨 쉬고, 손짓과 고갯짓으로 지시하고, 아랫사람 대하듯 말끝을 잘라먹는다”는 느낌은 호준이 고된 여정으로 예민해진 탓만은 아니었다. 한국어의 표정을 낱낱이 읽어내는 호준에겐 “가난한 나라 사람들을 무시하는 말투”가 들렸다. 호준도 자신의 말과 행동을 자기검열했다.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곧바로 쫓겨날 수 있겠다”는 두려움이 ‘가난한 나라에서 온 외국인 호이준’의 감각으로 호준을 찾아왔다.

자진 출국 8개월 만에 재입국한 호준(오른쪽)씨가 2022년 3월14일 김사강 이주와인권연구소 연구위원과 출입국·외국인청에서 유학비자 신청서를 접수시키고 있다. 이문영 기자

달라진 것은 한국이 아니라 호이준이 된 호준이었다.

그는 격리 상태에서 대학 수업을 들었다. 체류 자격을 얻기 위해 고등학교 졸업 10년 만에 시작한 대학 공부는 ‘유학’이 됐다. 입학식에도 가지 못한 호준은 ‘순수 외국인 전형’ 합격생들을 대상으로 한 한국어 수업에 온라인으로 출석했다. 몽골에서 온 외국인의 한국어가 ‘완전 한국말’이란 사실에 놀란 교수는 “이 수업을 들을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며 당황해했다. 호준의 짧은 자기소개(“한국에서 초·중·고를 졸업했고, 졸업하자마자 강제 퇴거 대상이 됐고, 10년간 비자 없이 알바로 일했고, 정부가 시키는 대로 몽골로 나갔다 돌아왔고, 그새 나이는 서른이 됐고…”)를 들은 뒤엔 “이런 경우(미등록 이주아동 출신)는 처음”이라며 “10살 어린 동기들”을 향해 말했다.

“모르는 거 있으면 호이준 형·오빠에게 물어보세요.”

호이준?

호준으로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그는 대학에 와서 귀에 붙지 않는 그 이름으로 불릴 때마다 컴퓨터 화면에서 모래시계가 돌듯 반응 속도가 느렸다.

아, 호이준!

그가 지난 시간 동안 한국에서 무슨 이름으로 살았는진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호준이란 이름을 쓸 일이 없었”다.

“비자 변경 자체가 안 됩니다.”

격리 해제(3월11일) 사흘 뒤 출입국·외국인청 공무원이 호준에게 말했다.

“네?”

호준이 꺼내놓으려던 방문 목적이 입에서 나오기도 전에 툭 부러졌다.

“유학비자(D2)는 몽골에서 받아 오셔야 돼요.”

비자 변경을 신청하려 이른 아침 업무 시작 전부터 기다리고 있던 호준에게 그동안의 노력 전체가 물거품이 될지도 모를 하루가 열리고 있었다.

유학비자는 ‘자진 출국 뒤 재입국’과 ‘뒤늦은 대학 입학’이란 과정을 거치면서까지 호준이 한국에서 살기 위해 얻고자 했던 최소한의 체류 자격이었다. 그가 몽골에서 고작 90일짜리 단기비자(C3)를 받고 돌아온 이유는 “유학비자는 한국 가서 받아야 한다”는 현지 비자 대행사의 설명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 왔더니 정반대의 이야기를 했다.

“몽골이 불법체류 다발 국가인데다 이 학교는 ‘교육 국제화 역량 인증대학’(인증 자격을 얻은 대학엔 학생들 비자 심사에 혜택)도 아니에요.”

호준의 옆에 있던 사강도 혼란스러웠다. 체류 자격이 없어 ‘꿈꿀 자격’마저 없던 호준에게 ‘법무부의 정책(자진 출국 뒤 재입국)대로 해보자’고 설득했던 사강은 출입국 절차부터 대학 입학과 비자 취득 등 ‘법적 신분’을 얻기 위한 전 과정을 돕고 있었다. 지난해 사강과 호준은 수도권의 2년제 대학들 중 지원 가능한 인증대학을 알아본 뒤 입학 전형을 준비해왔다. 몽골이 ‘이탈 다발 국가’이긴 하지만 인증대학에 합격하면 비자 취득에 어려움이 없을 거라고 사강은 판단했다.

“그런데 왜 학교에선 가능하다고 하셨을까요?”

사강의 물음에 “그건 학교에 알아보셔야 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사강이 인증대학 명단을 재확인했다. 몇달 사이 학교 이름이 빠져 있었다. “몽골에서 비자를 받아 와야 한다”니. ‘몽골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그 말에 호준은 아득해졌다.

2022년 6월29일 유학비자를 받은 호준씨가 출입국·외국인청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김사강 제공

겹겹의 ‘함정’

“다른 방법이 없었어요.”

두 사람이 창구를 바꿔 미등록 장기거주 이주아동 담당자를 찾아갔을 때도 “왜 비자를 안 받고 들어오셨냐”는 질문이 되풀이됐다. 사강이 항변했다.

“현지 대행사는 ‘자진 출국한 사람에겐 유학비자 발급이 안 된다’고 하고, 한국대사관에 문의하러 갔을 땐 한국 여권이 없다며 들여보내주지도 않았어요. 입국 전 호준씨 주소지 관할 출입국·외국인청에 제가 문의했을 땐 ‘단기비자로 들어온 뒤 유학비자로 전환이 가능하다’고 했고요. 학교에서는 학교 주소지 관할 청에서 비자 신청을 해야 한다고 해서 이리로 왔는데요.”

사강이 다시 확인을 요청했다.

“이 친구가요, 법무부의 ‘불법체류 외국인 관리 대책’(2019년 12월~2020년 6월 한시 시행)에 따라 출국했다가 돌아왔거든요. 몽골의 불법체류 다발 국가 여부와 무관하게 최근 법무부가 발표한 ‘미등록 이주아동 체류 자격 부여 확대’ 대상에 해당되지 않나요?”

2022년 1월 법무부는 6살 미만 영유아기에 입국해서 6년 이상 살아온 미등록 아동에게도 체류 자격을 허용했다. 호준이 이미 몽골로 떠난 뒤였다. 출국 3개월 전(2021년 4월) 내놓은 대책에선 국내 출생 아동으로 자격을 제한했었다. 결과적으로 호준은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하느라 ‘유학비자의 함정’에 빠진 것 아니냐고 사강은 묻고 있었다. 담당 공무원은 고개를 저었다.

“그 경우는출국을 하면 안 돼요. 출국을 안 했다면 대상이 되겠지만요.”

“6년 이상 살아온”이란 문구는 ‘연속 체류’(가족 방문 등을 위해 출국하더라도 90일 안에 복귀하면 인정)를 의미한다고 했다. “중간에 나갔다 (90일을 넘겨) 돌아왔기 때문에” 호준은 “해당되지 않는다”는 설명이었다.

세밀하지 못한 ‘원칙’이 겹겹의 함정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기한 안에 한국을 떠나지 않아 단속될 경우 강제 추방하고 범칙금 미납 땐 재입국을 영구 금지한다’는 정부 방침을 이행한 호준이 오히려 불이익을 받게 됐다. 감염병 재난으로 비행기표가 13차례나 취소된 끝에 1년 만에 이뤄진 자진 출국(팬데믹으로 90일 이내 귀국도 불가능)이었다.

호준은 속상했고 사강은 화가 났다. 실제 삶의 현장에서 당사자들이 어떤 문제를 겪고 있는지, 정책 문구가 놓치는 틈들이 어떻게 그들을 좌절시키는지, 정책 입안자들에겐 얼마나 세심한 고민들이 필요한지, 호준의 사례는 말해주고 있었다. “정부 부처에서 일선 기관으로 정책이 내려오는 동안 담당자마다 달라지는 해석과 적용 앞에서 한국어에 서툰 외국인들이 전문가 조력 없이 헤쳐나가기란 불가능”(사강)했다. “가난한 이주민들이 행정사들에게 비싼 돈을 지불하고 대행을 의뢰하는 이유”였다.

유학비자를 받은 2022년 6월29일 호준씨가 건강보험공단에서 외국인 건강보험을 신청하고 있다. 이문영 기자

“일단 접수는 해볼게요.”

담당자는 “(승인될지) 장담은 못 한다”며 “한국 체류 기간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를 전부 모아 업무 종료 전에 반드시 제출해달라”고 했다.

호준과 사강은 택시를 타고 1시간 거리에 있는 호준의 집으로 서둘러 돌아갔다. 택시 안에서 사강은 속이 탔다. “내가 우겨서 이 상황을 만든 것 아닌가” 자책했다. 호준에게 자진 출국을 권유했을 때 주위 활동가와 연구자들은 “출입국 정책을 어떻게 신뢰하냐”며 말렸다. “정책은 계속 바뀌고 담당자마다 말이 다른데 호준에게 헛바람 불어넣지 말라”는 우려에도 사강은 “뭐라도 해야 한다”고 했다. “서른을 앞둔 호준에겐 ‘아동 정책’에 호소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고 정부에 체류 자격을 요구하더라도 정책을 따르면서 요구해야 명분이 있다”는 생각이었다.

“여행 갔다 온 셈 치면 돼요.”

사강의 마음을 읽은 호준이 태연한 척을 했다.

집에 도착한 호준은 1년9개월 전 찾아둔 자료들을 꺼냈다. 초·중·고 졸업장과 개근상, 협동상, 교회 초등부 수료증, 중학교 재학증명서와 학교장 추천서…. 2020년 6월 자진 출국 신고 때 가져간 서류들을 그대로 챙겨 사강과 다시 택시를 탔다. 자진 신고 이후 먼 길을 달려온 것 같았는데 실제로는 제자리를 맴돌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감사합니다.”

접수를 마친 호준이 ‘늘 하던 대로’ 담당 공무원에게 인사했다.

이튿날 사강은 법무부 장관과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 앞으로 탄원서(이주와 인권연구소 명의)를 써 보냈다. 자진하지 않은 자진 출국을 연속 체류 위반으로 문제 삼는다면 “가혹하고도 불합리한 처사”라며 호소했다.

“호이준군이 체류 자격을 부여받고 바라는 목표를 이루어 우리 사회의 건강한 구성원으로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헤아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22년 11월16일 호준씨가 수도권의 한 대학 전자공학과 강의실에서 실습장비를 다루고 있다. 이문영 기자

전 과목 A+, 평균 98.33점

“차라리 말도 안 걸면 좋겠어요.”

비자 변경 신청 다음날 호준은 첫 등교를 했다. 대면 강의 출석 며칠 전부터 그는 늦은 대학 생활을 앞두고 걱정이 가득했다. 호준은 전자공학과에서 가장 나이 많은 학생이면서 유일한 외국인 학생이었다. “어린 동생들과 친해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그림자처럼 다니다가 졸업하고 싶다”는 말을 했다. 그가 학기 말(2022년 6월26일)에 성적표 사진을 대화방에 올렸다.

9개 전 과목 ‘에이플러스’(A+). 평균 점수 98.33점.

“짝짝짝.” 영아가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오호, 이렇게 공부를 잘하다니.” 사강도 “대단하다”며 축하했다. 호준은 “열심히 한 만큼 보답받는 기분”이라고 했다.

두달 뒤(8월12일)엔 2학기 등록금 고지서를 띄웠다. 납부 금액이 “0원”이었다. 호준은 그해 전자공학과 1학년 1학기 에이(A)반의 1등이었다. 3개 반 전체에선 3등을 했다. 외국인 유학생 대상의 한국어능력시험(TOPIK) 최고등급(6급)에 주어지는 장학금까지 더하자 2학기 등록금 전액이 면제됐다. 영아가 “우리 호준이 기특하다”며 엄지를 세웠다. 호준의 이모티콘이 씨익 웃었다.

대학 진학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공부를 멀리했던 호준이 대학생이 되자 밤새워 시험공부를 했다. 유학비자를 받게 되면서 “공부하는 맛”이 생겼다.

‘전 과목 에이플러스 공지’ 나흘째 되던 날(6월29일) 호준은 “새벽에 눈이 번쩍 떠졌”다. “아침부터 기분이 내내 좋았”다. 시간이 한참 남았는데도 “빨리빨리” 집에서 나왔다. 출입국·외국인청에 미리 도착해 창구 예약 시간을 기다렸다. ‘외국인등록 사실증명서’를 마침내 받았다. “체류 자격”란에 “유학”이라고 기재돼 있었다. 호준이 청사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대학 2년뿐이었지만 그 시간을 ‘합법’으로 받은 호준의 얼굴에서 그 나이 청년의 장난기가 발동했다. 휴대폰 카메라 셔터가 눌릴 때 혀를 홱 빼물었다. 사강이 빵 터졌다.

“하하하. 누구세요?”

대한민국에서 줄곧 ‘없는 사람’이어야 했던 그가 ‘있는 존재’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순간 호준의 표정은 마법처럼 달라졌다.

호준씨가 지난 6월4일 자신이 일하고 있는 특수장비차량 회사 앞에서 자진 출국부터 체류 자격 취득까지 전 과정을 도와온 김사강 이주와인권연구소 연구위원과 만나 웃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소주 한잔하실 거예요?”

호준이 “오늘은 뜻깊은 날”이라며 물었다. “비자 받았으니 건강보험 신청하러 공단부터 가자”는 사강에게 호준이 말했다.

“에이, 뭐 어려운 일도 아닌데요.”

폭소가 또 터졌다. 행정기관에 갈 생각만으로도 긴장하며 뻣뻣하게 굳던 호준의 몸에 갑자기 말랑말랑한 여유가 피어났다. 한국에서 24년 만에 얻은 ‘짧은 안전’이 호준의 입에서 “너무 좋다”는 말을 불러냈다. 그를 안 뒤 처음 듣는 그 말을 호준은 그날 계속 반복했다. “이제 나만 잘못하지 않으면 쫓겨나지 않아도 된다”며 생글거렸다. 그날부터 호준은 ‘한국인에겐 당연한 것들이지만 그에겐 너무 부러웠던 것들’을 한발이라도 늦으면 다신 기회가 없을 것처럼 전속력으로 손에 넣었다. 건보 가입을 시작으로 실명 휴대전화를 만들고, 은행 계좌를 만들고, 신용카드를 만들었다. 병원 자체를 가본 적 없던 그가 치과에서 스케일링을 받았고, 학원비 아끼느라 유튜브만 보고 연습해서 운전면허를 땄다. 호준은 그토록 꿈꿔온 ‘보통의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잘 들어. 이제부턴 무조건 조심해야 돼.”

사강이 호준을 앉혀놓고 신신당부했다.

“체류 기간 연장 시한을 하루라도 넘기면 벌금이 50만원이야. 주소지 바뀌면 14일 이내에 신고해야 돼. 운전도 함부로 하지 마. 사고 나서 200만원 이상 벌금 받으면 끝이야. 내가 가장 걱정하는 건 알바야. 아무리 돈이 급해도 ‘시간제 취업 허가’(유학생은 법무부 사전 허가를 받아야 정해진 시간 내에서 가능) 없이 하면 안 돼. 몰래 알바하는 거 쉽게 생각하지 마. 걸리면 벌금 낸다고 되는 게 아냐.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어.”

지금껏 힘들게 쌓아온 과정들이 사소한 실수로 한순간에 무너지는 상황을 두 사람은 염려했다. 유학비자는 시작일 뿐이었다. 구직(D10)→취업(E7)→거주(F2)→영주(F5) 등 호준에겐 갈 길이 멀었다. 학력, 자격증, 소득 수준 등을 따져 기준 점수를 채워야 단계별 심사 자격이 주어졌다. 각 단계를 지체 없이 통과해도 앞으로 최소 5~8년은 ‘무탈’해야 안정적 체류에 이를 수 있었다.

지난 6월4일 호준(왼쪽)씨가 멀리서 찾아온 김사강 연구위원에게 ‘연구원’ 직함이 새겨진 명함을 전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국적이 뭐길래 이렇게까지

“공부 재미가 없어졌어요.”

강의실 사이를 성큼성큼 누비며 학교를 안내(2022년 11월16일)하던 그가 운동장 너머로 떨어지는 해를 보며 말했다.

한국인 학생들이 외국인 유학생의 공부를 도와주는 모습이 일반적인 강의실 풍경이었으나, 전자공학과 22학번 에이반에선 한국 학생들이 ‘외국인 호준’을 찾아와 모르는 것을 질문했다. 입학 당시 “조용히 공부만 하겠다”며 움츠려 있던 호준이 한 학기 만에 자신감을 얻고 “괜한 걱정을 했다”며 민망해했다. 자신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두번째 학기가 끝나갈 무렵 그는 다시 갈등하고 있었다.

‘보통의 사람’은 호준이 쉽게 닿을 수 있는 꿈이 아니었다. 1학년 2학기가 되면서 교수의 취업 상담이 시작되자 ‘이제 현실로 돌아오라’는 듯 호준 앞에 벽이 솟았다. 반도체 등 졸업생들이 선호하는 첨단 직종들은 ‘공부 잘하는 외국인’보다 체류 자격 걱정 없는 한국인을 선호했다. “공부하니까 성장한다는 느낌이 들어 좋다”던 호준이 “열심히 공부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아무리 성적이 좋아도 선택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나를 원하는 회사가 없으니까.”

교수가 소개한 일자리는 굳이 대학 공부가 필요 없는 단순 기능직이었다. 한국인이 기피하는 일들이 호준의 몫이었다. “학교가 나 같은 외국인의 미래엔 관심이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그 생각들.

“도대체 국적이 뭐길래 삶의 대부분을 한국에서 살아온 나를 이렇게까지 괴롭히나” 하는 생각. “내가 한국인이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잘 살 수 있었을 텐데 억울하다”는 생각. “사람은 희망이 있어야 살고 그 희망을 잡겠다고 이 고생을 했는데 내게 정말 희망은 있나” 하는 생각. “그 생각들이 죽을 때까지 나를 따라다닐 거”라고 호준은 말했다.

“아, 생각하니 또 뒤집어져요.”

고개를 숙인 채 손을 만지작거리던 호준이 보탰다.

“막막하지만 그래도 계속해봐야죠.”

졸업(2024년 2월15일) 이튿날 호준은 구직비자로의 변경을 신청했다. 변경 없이 유학비자가 만료되면 호준은 다시 ‘미등록’이 되고 말았다. 이공계 가산점과 출입국관리법 위반(불법체류) 감점 등을 더하고 빼자 비자 전환 요건 최저 점수(60점)에 정확히 걸렸다.

지난 6월4일 국내 한 인구 소멸 지역에 있는 특수장비차량 회사 사무실에서 ‘창사 이래 최초의 외국인 연구원’이 된 호준씨가 선임연구원 황승찬 대리에게 업무를 배우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졸업을 앞두고 호준이 면접을 본 회사가 있었다. 자진 출국 전 아르바이트로 일했던 전자부품업체의 선배가 소개한 특수장비차량 생산 기업이었다. 호준의 집에서 수백㎞ 떨어진 회사의 주소를 살펴보던 사강이 관할 자치단체가 ‘지역특화형 비자’(F2R) 발급 시·군 중 하나란 사실을 확인했다. ‘지정된 인구감소 지역에서 5년 이상 거주’가 허가의 전제인 체류 자격(2년제 대학 이상 졸업(예정)자 등이 지원 가능)이었다. 한국인이 소멸하는 지역에서 취업·창업해 최소 5년을 사는 조건으로 취업비자를 건너뛰고 곧바로 거주비자를 준다는 뜻이었다. 노동 조건이 열악하거나 수도권 밖의 생산 현장에서 외국인 노동자 없인 공장 가동이 불가능했다. ‘혜택’이었지만 관리·통제 위주의 정부 이주민 정책에서 출생률 급감과 인구 소멸을 방어할 때만 제공되는 혜택이었다.

면접 때 회사는 호준의 특화비자 신청을 돕겠다(숙소 제공 확약 등)고 약속했다. 미등록 이주아동 출신이란 ‘특수 상황’도 이해했다. 호준은 ‘연구원’으로 지원해 합격했다. 남쪽 지역 너른 평야 위에 세워진 산업단지로 지난 3월 첫 출근을 하며 호준은 “역시 긴장”했다.

“괜히 연구원 일을 택했나. 발전하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쓸데없이 어려운 일에 덤빈 걸까.”

호준의 업무는 중장비 차량의 회로도를 설계하는 일이었다. 프로그램을 짜고, 테스트하고, 전류량과 배선 굵기 등을 조절해 장비 성능을 개선하는 역할이었다. 자신보다 나이 어린 ‘사수’가 가르쳐주는 일들은 “대학 때 배운 것과 차원이 달랐”다. 개발팀 막내 호준은 “연구원으로 제 몫을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일 끝난 뒤에도 사무실에 혼자 남아 코딩 연습”을 했다.

“좋아서요.”

지난 6월4일 멀리서 찾아온 사강에게 호준이 명함을 건넸다. 사강에겐 이미 낯익은 명함이었다. “메신저 프로필 사진으로 명함을 떡 올려놓는 사람이 어디 있냐”며 사강이 놀리자 호준은 “연구원이(란 직함이) 좋다”며 생글거렸다. 스스로를 감추며 살았던 그가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는 일은 어색하면서도 설레는 일이었다. 호준은 창사 이래 첫 외국인 연구원이었다.

호준씨가 “(지역특화형) 비자 안 나오면 다시 짐 싸야 할 수도 있는” 상황에 대비해 버리지 않고 모아둔 이삿짐 박스가 지난 6월4일 회사 원룸 기숙사 한켠에 놓여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어색하면서도 설레는

“휑하니 깔끔하네.”

호준의 방을 둘러본 사강이 ‘감상’을 요약했다. 매트리스와 책상, 냉장고와 전자레인지가 원룸 기숙사 살림살이의 전부였다. 2명씩 쓰는 방이었지만 호준은 1인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외국인 룸메이트가 온다’는 회사 설명에 먼저 거주하던 한국인 직원이 ‘짐도 많을 거고 말도 안 통할 사람과 살기 싫다’며 방을 나간 덕분이었다. 호준의 이삿짐을 실어 나른 빈 상자들만 아직 반출되지 않은 채 휑한 기숙사를 비좁게 만들고 있었다.

“비자 안 나오면 다시 짐 싸야 할 수도 있으니까요. 비자 받으면 바로 버릴 거예요.”

호준은 4월 초 회사가 지원해준 서류를 첨부해 지역특화형 비자를 신청했다. 자치단체의 추천서를 받아 5월 중순 출입국센터에 제출했다. 법무부 심사가 한달 넘도록 길어지고 있었다. “체류 자격: 거주”가 찍힌 외국인등록증은 6월25일 호준에게 도착했다.

첩첩의 비자였다. 비자를 넘으면 다음 비자와 그다음 비자가 저편 너머에서 대기했다. 끊임없이 신분을 증명하고 자격을 갱신해야 호준은 ‘보통의 삶’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2019년 말 법무부 자진 출국 정책을 처음 접한 뒤로 벌써 6년째였다. 시간은 호준의 더딘 걸음을 돌아보지 않고 저 혼자 질주했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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