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 수만 있고 만질 순 없는 [주말을 여는 시]

하린 시인 2024. 7. 6. 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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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린의 ‘특별한 감정이 시가 되어’
이승희의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
어둡고 습한 죽은 자의 정신적 감각
골목 속에서 가로등을 보는 관찰자
해줄 수도 없고 표현도 못 하는 마음

맨드라미는 지금도

햇살이 가만히 죽은 나무의 머리를 쓰다듬는 동안 나는 죽은 내 얼굴을 만져볼 수 없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젖을 물리듯 햇살은 죽은 나무의 둘레를 오래도록 짚어보고, 고스란히 드러난 나무의 뿌리는 칭얼대듯 삐죽 나와 있는 오후. 어떤 열렬한 마음도 이 세상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내가 싸워야 한다면 그 때문. 내가 누군가와 섹스를 한다면 그 때문. 거짓말처럼 내 몸을 지나간 칼자국을 기억하기 때문이 아니다. 우글거리는 상처 따위가 아니다. 맨드라미는 지금도 어디선가 제 키를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 죽은 나를 두고 살아 있는 내가 입을 꾹 다물고 먼지처럼 그릇 위에 쌓여가는 일은 그러므로 아주 서러운 일은 아니다. 이젠 벼랑도 아프지 않다고 생각에 잠긴 귀를 흔들어 보는 일. 입을 벌리면 피가 간지러운 듯 검은 웃음이 햇살 속으로 속속들이 박혀드는 날. 집이 사라지면 골목은 어디로 뛰어내려야 하나.

갈현동 470-1번지 세인주택 앞

아리랑 슈퍼 알전구가 켜질 무렵 저녁이 흰 몸을 끌고 와 평상에 앉는다. 그 옆으로 운동화를 구겨 신고 사과 궤짝 의자에 앉아 오락하는 아이의 얼굴이 불빛으로 파랗다. 저녁은 가만히 아이 얼굴을 바라보다, 작은 어깨 위로 슬며시 퍼져간다. 가로등이 켜지자 화들짝 놀란 저녁이 또 가만히 웃는 동안에도 아이의 얼굴은 파랗게 질렸다가 빨갛게 익었다가 다시 하얗게 질렸다. 갑자기 세상은 저녁 아닌 것이 없는 저녁이 됐고, 골목 끝은 해 지고 난 후의 들녘처럼 따뜻하다. 골목길을 따라 불이 켜진다. 낮에 보았던 살구나무에 달린 살구들처럼 노랗게 불 켜진 골목을 따라 집들도 불을 켜는 동안 나는 집 앞에 앉아 수학학원 간 딸애를 기다린다. 불빛은 얼마나 따뜻한가, 그림자를 보면 알 수 있지. 감추고 싶은 것 다 감추고, 아니, 더는 감출 수 없는 몸을 보여준다는 것은. 나는 때로 그렇게 따듯한 불빛에 잠겨 한 마리 물고기가 된다. 우리 집에도 불이 켜졌다. 딸아이가 불빛을 따라 헤엄쳐 올 것이다.

이승희
· 1997년 「시와사람」 신춘문예 데뷔
· 199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데뷔
· 「우리를 세상의 끝으로」 등 다수

이승희,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 문학동네, 2012.

시에서는 어둡고 습한 죽은 자의 느낌이 물씬 흐른다.[사진=펙셀]

이승희의 두번째 시집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는 죽은 자가 부르는 저녁의 노래처럼 스민다. 화자가 죽은 자의 입장에서 저녁 속의 대상들이 갖는 다양한 의미와 형상을 읽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죽은 자일 때도 있고 산 자일 때도 있다.

하지만 시에서 풍기는 전체적인 분위기는 어둡고 습한 죽은 자의 것들이다. 죽은 자는 영혼만 남고 육체가 없는, 자유롭지 않으면서도 자유로운 존재다. 실체적 감각이 사라진 자가 정신적 감각으로만 내계와 외계를 읽을 수 있다.

죽은 자가 돼 감각과 생물성이 사라진 세계를 되돌아본다는 것은 슬픈 저녁의 얼굴을 하고, 그 저녁 안에서 감각적인 정신으로 떠도는 행위일 것이다. 이제 막 불어오는 어둠 속에서 죽은 자와 관련된 대상들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아스라한 불빛만이 죽은 자를 반기고 있다. "어둠을 이해하는 건 불빛(갈현동 470-1 골목)"이기에 죽은 자는 어둠과 불빛이 빚는 외연과 내포를 처연하게 바라본다.

시집 속 화자가 주로 찾는 장소는 어두운 불빛 속에 있는 골목과 지붕 낮은 집들의 풍경이 대부분이다. 그중 '갈현동 470-1번지 세인주택 앞'이 구체적인 장소인데, 대상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지 못하고 관찰자로만 존재한다.

화자는 "아리랑 슈퍼 알전구가 켜질 무렵 저녁이 흰 몸을 끌고 와 평상에 앉는" 것을 본다. "그 옆으로 운동화를 구겨 신고 사과 궤짝 의자에 앉아 오락하는 아이의 얼굴이" 나타난다.

"저녁은 가만히 아이 얼굴을 바라보다, 작은 어깨 위로 슬며시 퍼져간다. 가로등이 켜지자 화들짝 놀란 저녁이 또 가만히 웃는 동안에도 아이의 얼굴은 파랗게 질렸다가 빨갛게 익었다가 다시 하얗게 질려"간다. 분위기가 매우 스산하고 쓸쓸하다. 화자는 죽은 자 같기도 하고 산 자 같기도 하다. 뭔가를 해주지 못해 다가가지 못하는 사람의 태도와 마음을 취하고 있다.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에서 죽음과 생물성은 대조적인 이미지와 구조로 나타난다. 생물성은 토마토와 맨드라미로 주로 나타나는데 맨드라미가 압도적이다. 붉은색으로 대변되는 맨드라미는 시인이 이 시집에서 애착을 갖는 존재다. 상징성을 띤 채 시집 곳곳에 포진해 있다.

'맨드라미는 지금도'에 나오는 맨드라미도 마찬가지다. 무언가를 암시하는 생물로 피어나 화자의 심리를 대변한다. 화자는 이제 막 죽은 자다. 시각을 통해 볼 순 있지만 촉각을 통해 감각할 순 없다.

그래서 화자는 "햇살이 가만히 죽은 나무의 머리를 쓰다듬는 동안" 죽은 자신의 "얼굴을 만져볼 수 없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는다. "어떤 열렬한 마음도 이 세상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거짓말 같다. 이승의 것들이 거짓말처럼 느껴지는 것은 이제 막 죽음에 들어서서 이승의 것들이 너무나 생생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당황스럽다.

[사진=펙셀]

그러나 죽은 자는 점점 익숙해질 것이다. 그런데도 화자가 가장 아쉬워하는 것은 '열렬한 마음'을 표현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마음을 전달할 방법이 없는 죽은 자. 관찰만 할 수밖에 없는 죽은 자. 거짓말처럼 자신의 "몸을 지나간 칼자국"과 "우글거리는 상처"를 기억하지만 그것은 이미 벌어진 일. 아쉬워하지 않는다. '열렬한 마음'이 암시된 맨드라미가 "지금도 어디선가 제 키를 키우고" 있는데, 그것을 감각할 수 없다는 것만이 슬픈 일이고 서러운 일이다.

이 시집에서 맨드라미는 상징화돼 무언가를 해줄 수 없고, 무언가를 표현할 수 없는 '죽은 자'의 안타까운 심리를 대변했다. 그래서 독자들은 왠지 쓸쓸하고 서럽고 아린 감정을 맛본다. 그런 시의 감정을 상징화한 대상을 통해 자연스럽게 잘 표현하는 시인이 이승희다. 이 글을 읽은 독자들은 앞으로 맨드라미를 보는 순간 이승희 시인과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를 떠올릴 것이다.

하린 시인 | 더스쿠프
poeth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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