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 뒤편, ‘니그로리그’를 아시나요 [경기장의 안과 밖]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높은 통산 OPS(출루율+장타율)를 기록한 선수는 전설적인 홈런왕 베이브 루스였다. 이제는 아니다.
메이저리그 공식 홈페이지(MLB.com)는 5월29일 기록 페이지를 개편했다. 이날부터 통산 OPS 1위 기록의 주인공은 루스(1.164)가 아닌 조시 깁슨(1.177)이 됐다. 깁슨은 통산 타율에서도 타이 콥(0.367)을 2위로 밀어내고 1위(0.372)에 올랐다.
1911년 피츠버그에서 태어난 깁슨은 단 한 경기도 메이저리그에서 뛰지 못했다. 당시 미국 야구의 ‘인종 장벽’ 때문이었다. 미국 최초의 전국 야구 조직인 내셔널어소시에이션(NABBP)이 창설 10년 뒤인 1867년 필라델피아 피시언즈라는 흑인 팀의 가입 신청을 거부한 게 시작이다. NABBP는 아마추어 조직이었다. 뒤이어 등장한 프로야구도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를 가리지 않고 흑인을 배제했다. 때로는 성문 규칙, 때로는 ‘신사협정’으로 장벽을 쌓았다. 이 장벽은 1947년 재키 로빈슨이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뒤에야 비로소 허물어졌다.
이른바 ‘공식 야구’에서 쫓겨난 흑인들은 장벽 바깥에서 자신들의 필드를 건설했다. 여러 이름으로 명멸했던 흑인 야구 리그를 통칭해 ‘니그로리그’라고 한다. 1886년 결성된 서던리그와 이듬해 출범한 내셔널컬러드베이스볼리그가 최초로 꼽힌다. 모두 풀시즌을 치르지 못했다. 후자의 경우 8개 팀으로 구성됐지만 도합 18경기만 치른 뒤 문을 닫았다. 이해 제정된 주간 상법에 따라 철도여행 단체 할인이 대폭 축소돼 이동 경비가 급등한 게 이유였다.
이를 시작으로 20개가 훌쩍 넘는 리그가 명멸했다. 이 가운데 7개는 지금 메이저리그 지위다. 롭 만프레드 메이저리그 커미셔너는 2020년 12월 “니그로리그를 메이저리그 지위로 인정한다”라고 공식 발표했다. 그리고 기록 통합 작업에 착수했고 올해에야 비로소 기존 메이저리그 기록과 통합됐다. 7개 리그 중 니그로내셔널리그(NNL)가 1920년 가장 먼저 창설됐다. 시카고, 캔자스시티, 디트로이트, 인디애나폴리스, 세인트루이스, 데이턴에 연고지를 뒀다. 시카고에는 두 팀이 있었고, 원정경기만 치르는 팀도 있었다. 모두 남부가 아닌 북부 소재 도시다.
1910년대부터 미국 남부에 거주하던 흑인들은 더 나은 삶을 위해 북쪽으로 대거 이동했다. 미국사에서 ‘대이주(Great Migration)’라 부르는 사건이다. 캔자스시티는 니그로리그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프랜차이즈로 꼽힌다. 미국 전역의 곡물이 모이는 곳이라 흑인 육체노동자들이 많았다. 고단한 노동에 시달리던 이들은 야구에서 즐거움을 찾았다. 자본가로 성장한 일부 부유한 흑인들은 여기에서 흥행 산업의 기회를 봤다. 니그로리그가 커질 수 있었던 배경이다.
니그로리그는 흑백으로 분리됐던 미국 야구의 부끄러운 과거다. 하지만 그들은 반대쪽보다는 훨씬 개방적이었다. 흑인뿐 아니라 19세기에 이미 야구가 전파된 라틴아메리카 출신 선수들도 니그로리그에서 뛸 수 있었다. NNL 창단 멤버 중 원정경기만 치른 팀은 쿠반 스타스다. 이름 그대로 쿠바 선수들로 이뤄진 팀이었다. 1926년과 1940년 운영된 인터스테이트리그는 여러 인종 선수가 뛸 수 있는 마이너리그였다. 버클리인터내셔널리그는 샌프란시스코 지역을 근거지로 1935년 창설된 독립 리그다. 이 리그에는 흑인뿐 아니라 라틴계, 중국인, 일본인 팀도 있었다.
“아시안도 메이저리그에서 배제해야”
메이저리그 내 ‘인종 장벽’은 공식적으로는 흑인에게만 적용됐다. 하지만 1882년의 중국인 배제법, 1907년 미국 행정부의 일본인 이민 거부 등의 영향으로 ‘비공식적’으로는 아시아 선수도 배제 대상이었다. 1905년 뉴욕 자이언츠 명감독 존 맥그로는 23세 일본인 선수를 트라이아웃으로 입단시킬 계획을 가졌다. 맥그로의 계획은 〈뉴욕타임스〉에도 보도됐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아시안도 메이저리그에서 배제해야 한다”라는 메이저리그 내 여론 때문이었다.
플레이에도 훨씬 ‘색깔’이 있었다. 미국의 한 야구 연구가는 니그로리그의 플레이 스타일에 대해 팀워크와 제구력, 희생번트를 중시했다고 기술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관중을 즐겁게 하는 야구를 했다. 백인 메이저리그보다 재정이 열악했던 만큼 한 명이라도 많은 팬을 구장으로 모으는 게 중요했다. 니그로리그를 대표하는 슈퍼스타 타자가 깁슨이라면 투수로는 새철 페이지가 있다. 페이지는 동점 상황에서 야수들을 모두 마운드 뒤에 앉혀놓은 뒤 타자를 삼진으로 잡았다는 전설이 있다. 타자가 홈런을 친 뒤 배트를 집어던지는 ‘뱃플립’은 메이저리그에서 오랫동안 금기였다. 뱃플립이 원래 니그로리그 문화였기 때문에 인종 장벽 철폐 뒤에도 여전히 주류인 백인들의 거부감이 심했다는 해석도 있다.
지금 메이저리그 최고 스타는 일본인 오타니 쇼헤이다. 오타니는 2018년 데뷔 이후 타격과 투구를 겸하는 ‘투웨이 선수’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팬그래프닷컴이 집계하는 WAR(대체선수 대비 승수)로는 타자로 통산 22.5승, 투수로 11.8승을 기록하고 있다. 대단한 성취다. 하지만 니그로리그에는 오타니보다 더 위대한 투웨이 선수가 있었다. ‘불릿(총알)’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윌버 로건이다.
그는 1920~1938년 니그로리그 명문 캔자스시티 마넉스에서 뛰며 타자로 23.1승, 투수로 36.5승을 쌓았다. 여기에 ‘투웨이’가 아닌 ‘스리웨이’였다. 1926년부터 1930년까지는 선수 겸 감독으로 통산 257승 111패, 승률 0.698을 기록했다.
깁슨이나 페이지는 오래전부터 인종을 불문하고 ‘역대 최고 선수’ 반열에 꼽혀왔다. 명예의 전당에 전시된 그의 동판에는 “17년 동안 800개가 넘는 홈런을 쳤다”라고 적혀 있다. 깁슨이 현역에서 은퇴한 뒤에도 오랫동안 흑인 팬들은 ‘깁슨이 루스보다 더 위대하다’고 믿었다. 페이지는 30년 가까운 선수 생활에서 2000승을 거뒀다는 전설을 남겼다.
하지만 이번에 통합된 기록은 화려한 ‘전설’에는 크게 못 미친다. 깁슨은 통산 14시즌 동안 653경기에서 174홈런을 때려냈다. 페이지는 통산 125승에 평균자책점 2.74다. 1944년 평균자책점 1.01은 역대 시즌 기록 3위에 올라 있는 정도가 눈에 띈다.
아직 니그로리그 경기 기록이 75% 정도만 복원됐다는 게 한 이유다. 무엇보다 니그로리그에선 ‘공식 경기’가 적었다. 팀당 시즌 60~80회 정도에 불과했다. 깁슨의 800홈런이나 페이지의 2000승 중 상당수는 순회 경기나 시범 경기에서 생산된 것이다. 재정적으로 열악했던 니그로리그 팀들은 유랑극단처럼 미국 전역, 때로는 라틴아메리카까지 돌며 경기를 치러야 했다. 이런 경기는 ‘비공식’으로 남는다.
하지만 인종 장벽이 없었다면 그들이 더 위대한 숫자를 남겼으리라는 점은 명백하다. 니그로리그 출신이기도 한 로빈슨은 1947년 데뷔 시즌에 내셔널리그 신인왕에 올랐다. 3년 뒤 1949년엔 최고선수상인 MVP 투표 1위를 차지했다. 이후 1959년까지 내셔널리그 MVP 11명 가운데 9명은 흑인 선수였다. 6월19일 작고한 윌리 메이스도 그중 한 명이다.
최민규 (한국야구학회 이사)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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