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재혼하면 유산 몰수하겠다”…폭삭 망한 화가, 걸작을 남기다 [나를 그린 화가들]

정유정 기자(utoori@mk.co.kr) 2024. 7. 6.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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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 ‘팔레트와 붓을 든 자화상’, 1665년경, 영국 런던 켄우드 하우스
20대 중반에 스타로 떠오른 화가가 있습니다. 젊은 나이에 부와 명예를 다 누린 그는 부러울 게 없었습니다. 주문이 밀려들었고, 그에게 그림을 배우겠다며 학생들이 찾아왔죠. 원하는 건 무엇이든 손에 쥘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인생이 꼬이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그림 주문도 줄어듭니다. 집을 ‘영끌’해서 샀는데, 커져 버린 씀씀이를 줄이지 못해 파산 신청까지 합니다. 화단의 중심에 있다가 가장자리로 밀려났고, 사람들로부터 잊힌 신세가 됩니다. 네덜란드의 대표 화가 렘브란트의 이야기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렘브란트는 외톨이가 되면서 자기 뜻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습니다. 인기도, 명성도 모두 잃은 시기에 그가 그린 작품들은 지금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의 주제는 인생의 밑바닥에서 자신의 예술 세계를 완성한 렘브란트입니다.

탄탄대로였던 젊은 시절
렘브란트는 1606년 7월 15일 방앗간 집 여덟째로 태어났습니다. 부유한 부모 덕분에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당대 명문으로 꼽히던 레이덴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하지만 학과 공부에 취미가 없었던 그는 공부를 그만두고 그림을 시작합니다. 도제 생활을 마치고 주목받는 신예 화가가 됩니다.
렘브란트,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1632, 네덜란드 헤이그 마우리츠하위스 왕립미술관
렘브란트는 초상화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렘브란트가 그린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는 하루아침에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줬습니다. 이 그림은 외과 의사 길드 회원들이 의뢰한 집단 초상화입니다. 강의에 참석한 회원들은 오른쪽에 있는 툴프 박사의 강의를 유심히 듣고 있습니다.

당시 네덜란드에선 초상화가 유행했습니다. 특히 전통적인 종교화보다 초상화가 더 많았는데요. 네덜란드인들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고 프로테스탄트(신교)가 허용되던 시기였죠. 경제적으로 번성하면서 네덜란드인은 자신들만의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여러 명이 동시에 나오는 집단 초상화를 주문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렘브란트는 주문자들이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간파했습니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덕목은 근면과 성실, 절약이죠. 그런데 초상화 주문자들은 자신들이 검소하면서도 부티 나는 모습을 원했다고 해요. 렘브란트는 이들의 검정색 옷차림 속 포인트가 되는 레이스와 액세서리를 화려하고 세밀하게 묘사했죠. 또 지성과 학식을 잘 표현했습니다.

렘브란트, ‘밀짚 모자 쓴 사스키아’, 1633, 독일 베를린 동판화실
한창 잘 나가던 이 시기에 렘브란트는 사스키아라는 여인과 사랑에 빠지고 결혼합니다. 아름답고 젊은 사스키아는 좋은 집안의 딸로 부유하기까지 했습니다. 결혼하며 막대한 지참금을 가지고 왔죠. 결혼하면서 렘브란트의 사회적 지위는 상승했고, 더 이상 그를 방앗간 집 아들로 부른 이들은 없었습니다. 그림 주문이 쏟아졌고, 제자들도 양성했습니다. 부와 명예를 모두 거머쥐었습니다.
젊은 화가의 자화상
렘브란트가 성공한 과정은 젊은 시절의 자화상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렘브란트, ‘작업실의 화가’, 1629년경, 미국 보스턴 미술관
초기 렘브란트가 그린 자화상입니다. 자신을 아주 작게 표현했고, 반대로 이젤을 매우 크게 묘사했습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걱정과 초조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렘브란트, ‘자화상’, 1629,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렘브란트는 자신을 그리며 빛을 사용하는 방법과 인물의 표정을 연구했습니다. 그가 초상화를 그릴 때 조명을 주듯 그리는 방식은 ‘렘브란트 라이팅’이라는 기법으로 불리며 오늘날 사진 촬영에도 적용됩니다.
렘브란트, ‘자화상’, 1629년경, 네덜란드 헤이그 마우리츠하위스 왕립미술관
이 자화상에서 렘브란트의 표정은 이전보다 더 당당해집니다. 자신감이 느껴집니다.
렘브란트, ‘동양 의상을 입은 자화상과 푸들’, 1631년경, 프랑스 파리 프티 팔레 미술관
차츰 렘브란트는 자신의 성공을 뽐내기 시작했습니다. 이 자화상에선 이국적이고 화려한 옷을 입었습니다. 표정은 자만에 빠진 것처럼 보입니다.
렘브란트, ‘34세의 자화상’, 1640, 영국 런던 내셔널 갤러리
‘34세의 자화상’에서 렘브란트는 16세기 귀족들의 고상한 재킷, 빳빳하게 세운 칼라에 수놓은 셔츠, 커다란 모자를 쓰고 있습니다. 인정받은 화가로서의 자신감, 자부심이 느껴집니다.

렘브란트는 성공한 후 사치스러운 삶을 살았다고 해요. 그림을 연구한다는 이유로 값비싼 그림과 골동품, 비단, 박제된 동물 등을 마구 사들였죠.

더 좋은 집에 살고 싶어 암스테르담에 있는 호화 주택을 ‘영끌’해서 사기도 했습니다. 이 집은 당시 네덜란드 평균 집값의 10배가 넘었는데, 렘브란트는 집값의 75%를 대출받았죠. 렘브란트는 어차피 그림 주문이 밀려들고 있었고, 수입이 많았기 때문에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렘브란트의 처가 식구들은 그가 아내의 재산을 탕진한다고 비난했습니다.

렘브란트, ‘돌아온 탕자의 옷을 입고서 사스키아와 함께 있는 자화상’, 1636년경, 독일 드레스덴 알테 마이스터 미술관
이 자화상에서 렘브란트는 자신을 술에 취한 탕자로 그렸습니다. 그의 무릎에 부인 사스키아가 앉아 있습니다. 그림에 있는 공작 털은 호화스러운 삶과 유산을 다 써버린 탕자를 상징합니다. 사치스럽다는 비판에 응답하듯 렘브란트는 풍요로운 삶을 과시했습니다.
한순간에 꼬여버린 인생
잘 풀리기만 했던 렘브란트의 인생에 불행이 연달아 발생합니다. 렘브란트와 사스키아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총 네 명인데요. 이 중 셋이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세상을 떠났습니다. 1642년에는 사스키아까지 결핵으로 사망했습니다.

같은 해 렘브란트가 그린 그의 대표작 ‘야경’은 역설적이게도 그의 삶을 어려움으로 빠뜨렸습니다. 스페인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모인 민병대원들이 이 그림을 주문했죠. 그들은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자신들의 멋진 모습을 역사에 남기고 싶었습니다. 당시 집단 초상화는 돈을 낸 만큼 골고루 주문자들을 잘 그려주는 것이 인지상정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전통적인 집단 초상화를 보면 단체 사진을 찍은 것 같은 느낌이 납니다.

렘브란트, ‘야경’, 1642,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하지만 렘브란트는 기존 관습과 다르게 그렸습니다. 전체적인 조화를 고려했고, 인물을 나란히 배치하는 것을 피했습니다. 그림 속 사람들이 자연스럽고 생동감 있게 움직이고 있지 않나요? 오늘날 ‘야경’은 관습을 깬 걸작으로 평가받습니다.

하지만 초상화를 주문한 당사자들은 불만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들이 원한 건 집단 초상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앞줄 가운데 대장은 크게 그려져 있는데, 뒤에 사람들은 작게 그려져 잘 안 보입니다. 어떤 사람은 눈만 보이죠. 주문자가 아닌 인물까지 등장합니다. 어린 소녀가 병사들 사이에 슬그머니 들어가 있습니다.

초상화 주문자들은 엄숙하고 지적으로 보이고 싶었는데, 자신들이 어수선해 보여 위신이 손상됐다고 판단했습니다. 주문자들은 이 그림을 받지 않고 돌려보냈습니다.

렘브란트, ‘문가에 서 있는 헨드리케’, 1654, 독일 베를린 게멜데갈러리
렘브란트는 스캔들에도 시달렸습니다. 사스키아가 죽고 그는 아들의 유모인 헤이르티어 디르크스와 내연 관계를 맺습니다. 이후 아들의 가정교사인 헨드리케 스토펠스와 동거하죠. 헨드리케는 친엄마처럼 렘브란트의 아들을 돌봐줬습니다. 썰렁해진 집안 분위기를 다시 따뜻하게 만들며 정서적으로 힘이 되어 줬습니다.

렘브란트는 헨드리케와 새 가정을 꾸리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죽은 아내인 사스키아는 렘브란트가 재혼할 경우 그에게 남긴 유산을 무효로 한다는 유언을 남겼거든요. 안 그래도 빚에 쪼들리던 렘브란트는 재혼하면 파산하는 셈이었죠.

렘브란트와 헨드리케는 사실상 명백한 부부였습니다. 하지만 ‘혼인’이라는 틀로만 부부 관계를 규정했던 세상 사람들은 이들의 동거를 비난했습니다. 1654년 헨드리케는 부정행위로 교회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됩니다.

‘야경’ 작품이 거절당하고, 헨드리케와의 스캔들까지 생기자 렘브란트에게 그림을 주문하는 이들은 점점 줄었습니다.

빚에 시달리던 1656년 렘브란트는 결국 파산 신청을 합니다. 그가 수집한 물건들도 경매에 부쳐졌습니다. 렘브란트는 1658년 암스테르담 도심 서쪽 요르단 지구의 초라한 집으로 이사하면서 암스테르담의 경제·문화 중심지에서 멀어졌습니다.

렘브란트, ‘자화상’, 1652,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 박물관
1652년 렘브란트가 그린 자화상입니다. 재정적으로 극도로 곤경에 처한 시기에 그린 그림이죠. 과거 자화상에선 비싸고 화려한 옷차림을 했는데, 이제 그런 모습은 사라졌습니다. 노동자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죠. 미간에 주름이 잡혔고 지친 마음이 느껴집니다.
렘브란트, ‘자화상’, 1659, 미국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파산 후 렘브란트가 그린 자화상입니다. 서글픈 모습입니다. 하루아침에 주저앉은 상황을 감당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자신을 탓하는 회한의 눈빛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잊혔지만, 자유를 얻다
역설적이게도 렘브란트는 가난과 함께 자유를 얻었습니다. 명예와 허영 대신 자신이 원하던 그림을 마음껏 그릴 수 있게 됐습니다. 렘브란트는 “내 영혼을 한없이 펼치고 싶을 때 나는 명예가 아닌 자유를 찾는다”고 말했습니다. 렘브란트는 대담하게 전통을 파괴했습니다. 또 빛을 제한적으로 사용해 인물의 내면에 집중했습니다.
렘브란트, ‘다윗왕의 편지를 들고 있는 밧세바’, 1654,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
성서 속 다윗 왕은 목욕하는 밧세바를 보고 반해 그녀에게 왕궁으로 오라는 편지를 보내죠. 렘브란트는 밧세바가 편지 읽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그녀의 표정에 심정이 고스란히 전달됩니다. 남편에 대한 정절과 왕의 명령에 대한 복종 사이에서 갈등을 느끼고 있습니다.
렘브란트, ‘목욕하는 여인’, 1654, 영국 런던 내셔널 갤러리
이 그림의 모델은 헨드리케로 추정됩니다. 렘브란트는 인체를 이상화하는 고전적 미보다 새로운 종류의 아름다움을 추구했습니다. 인물을 그리며 정신적인 표현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렘브란트, ‘유대인 신부’, 1666년경,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유대인 신부’는 부부가 서로 아끼는 모습을 아름답게 그린 작품입니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남편과 젊은 부인이 손을 잡고 있습니다. 다정함과 친밀함, 애정이 느껴지죠. 남편은 아내를 바라보며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 같습니다.
렘브란트, ‘도살된 소’, 1639년경, 독일 드레스덴 미술관
렘브란트는 ‘도살된 소’를 통해 심미성보다는 내면 표현에 집중했습니다. 20세기의 표현주의는 미술이 아름다워야만 한다는 명제에 도전하는 사조인데요. 렘브란트는 훨씬 빠르게 이같은 시도를 했습니다. 이 그림은 파블로 피카소, 프랜시스 베이컨 등에 영향을 줬습니다.
사랑하는 가족
렘브란트, ‘책을 읽고 있는 티투스의 초상화’, 1658년경,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 박물관
예술계에서 잊히고 버려졌지만, 렘브란트는 자신을 믿어주는 가족이 있어 버틸 수 있었습니다. 아들 티투스와 사실상 두 번째 부인인 헨드리케는 자주 모델이 돼줬습니다.
렘브란트, ‘화가의 아들 티투스’, 1658년경, 영국 런던 월리스 컬렉션
티투스의 초상화에선 아들에 대한 사랑이 듬뿍 느껴집니다. 티투스는 섬세하고 감수성이 예민해 보이지 않나요. 티투스는 아버지를 챙기는 속 깊은 아들이었습니다. 렘브란트는 그런 아들을 사람들에게 슬쩍 자랑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렘브란트, ‘큐피드와 함께 있는 비너스(헨드리케)’,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
렘브란트는 자신이 사랑하는 헨드리케를 비너스로 그렸습니다. 비너스는 아들 큐피드를 팔에 안은 모습이죠. 그동안 미의 여신인 비너스를 이런 방식으로 그린 작가는 없었습니다.
렘브란트, ‘헨드리케 스토펠스의 초상’, 1659, 영국 런던 내셔널 갤러리
헨드리케는 렘브란트와 살면서 산전수전을 다 겪었습니다. 결혼하지 않고 렘브란트와 산다는 이유로 종교재판에 불려 갔고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인정했습니다. 렘브란트는 이 그림을 그리며 헨드리케에게 고마움을 표현했습니다. 그녀는 그림 속에서라도 당당하고 편안한 모습입니다.

불행하게도 렘브란트는 또 상실을 겪습니다. 1663년 헨드리케가, 1668년 티투스가 차례로 죽었습니다.

말년의 자화상
렘브란트, ‘자화상’, 1669, 영국 런던 내셔널 갤러리
사랑하는 이들을 먼저 떠나보낸 렘브란트의 얼굴에 그리움과 상실감이 드러납니다. 머리카락은 희끗희끗해졌고, 얼굴에는 주름이 늘었습니다. 그의 눈빛에선 쓸쓸함과 슬픔이 묻어 나옵니다.
렘브란트, ‘웃는 자화상’, 1668, 독일 쾰른 발라프 리하르츠 미술관
이 작품에서 렘브란트는 자신을 고대 그리스 화가 제욱시스로 그렸습니다. 제욱시스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파가 스스로를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로 그려 달라고 하는 모습을 보고 웃다가 죽었다고 하죠.

이 그림 속 렘브란트는 웃고 있습니다. 삶의 풍파를 다 겪고도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른 모습입니다. 죽음을 앞둔 제욱시스처럼 관람자에게 작별을 고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렘브란트, ‘자화상’, 1669, 네덜란드 헤이그 마우리츠하위스 왕립미술관
렘브란트가 그린 마지막 자화상입니다. 다소 지쳐 보이지만 자신을 직시하고 있습니다. 차분한 색조를 사용해 평온한 분위기가 두드러지죠.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얼굴에서 정신적 성숙을 느낄 수 있습니다. 렘브란트는 신 앞에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듯 겸허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렘브란트, ‘돌아온 탕자’, 1666~1668년경,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미술관
‘돌아온 탕자’는 렘브란트가 마지막으로 완성한 그림이라고 추정됩니다. ‘돌아온 탕자’는 성서 속의 일화죠. 아버지로부터 미리 받은 재산을 모두 탕진한 아들이 초라한 모습으로 아버지에게 돌아갑니다. 아버지는 죄를 뉘우치는 아들을 용서하며 환대합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용서, 자비를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그림 속에선 아버지가 돌아온 아들을 두 팔로 감싸 안아주고 있습니다. 아들의 발바닥은 상처투성이입니다. 아들은 무릎을 꿇고 얼굴을 아버지의 가슴에 묻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꼭 다문 입술은 무언의 용서를 의미합니다. 렘브란트는 이 그림을 통해 젊은 시절 자신의 방탕한 삶에 대해 참회하고, ‘이제는 괜찮다’며 자기 자신을 용서했을지도 모릅니다.

렘브란트, ‘사도 바울로 분장한 자화상’, 1661,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1669년 10월 4일, 렘브란트는 예순셋의 나이로 눈을 감습니다. 옷 한 벌, 손수건 여덟 장, 동전 열 개, 화구 하나, 성경 한 권이 그가 남긴 전부였습니다. 교회의 임대묘지 한 구석에 렘브란트는 늙고 지친 몸을 눕혔습니다.

렘브란트는 상류 사회에서 밀려나 외톨이가 됐지만 그 누구도 원망하거나 증오하지 않았습니다. 고난 속에서 끝없이 성찰했습니다. 자신에게 남겨진 삶을 평온하고, 자애롭고, 용감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인지 보잘것없어 보이는 그의 말년 자화상에선 오히려 품위가 느껴집니다. 외적으로 가장 낮은 곳에 있을 때, 내적으로는 가장 높은 곳에 다다른 것이죠. 렘브란트가 마음을 다해 그린 그림은 큰 울림을 줍니다.

<참고자료>

-EBS, 클래스ⓔ 안현배의 ‘빛과 어둠의 화가. 렘브란트’

-파스칼 보나푸(2009), 렘브란트 :빛과 혼의 화가, 시공사

-로베르트 다다 외(2008), 렘브란트, 예경

-발터 니그(2008), 렘브란트 : 영원의 화가, 분도출판사

-드 브리스(2005), 렘브란트, 한명

-마리에트 베스테르만(2002), 렘브란트, 한길아트

-피에르 카반느(1994), Rembrandt :렘브란트 하르멘스존 반 레인, 열화당

-루드비히 뮌츠·밥 하크(1991), 렘브란트 하르멘스 반 라인, 중앙일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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