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남자의 ‘미묘한 관계’ 그린 케이윌 뮤직비디오가 즐겁지만은 않은 이유[이진송의 아니 근데]

기자 2024. 7. 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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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락거리로 소비되는 퀴어…‘가짜’만 사랑받는 세상 “이러지 마, 제발”
2012년 발표된 케이윌 ‘이러지마 제발’ 뮤직비디오 한 장면. 유튜브 갈무리

두 달 전 서인국의 유튜브 콘텐츠 <간주점프>에 출연한 케이윌은 자신의 노래 ‘이러지 마 제발’의 뮤직비디오를 아직 보지 않은 관객에게 축하한다고 말했다. “당신 인생에 한 번의 재미가 남았다.” 2012년 발매된 이 노래의 뮤직비디오는 당시 엄청난 화제몰이를 했다. 그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인생에 남은 한 번의 재미’라는 케이윌의 발언을 과장이나 허풍만으로 치부할 수는 없으리라. 11년이 지난 2024년 6월, 케이윌은 ‘내게 어울리는 이별 노래가 없어’(이하 ‘내이별’)라는 노래로 컴백하며 ‘이러지 마 제발’의 2탄이라고 밝힌 뮤직비디오를 가져왔다. 요즘 멸종되다시피 한 드라마 타이즈, 즉 영상을 드라마화한 뮤직비디오에는 1탄의 등장인물이었던 서인국과 안재현이 그대로 출연한다. ‘내이별’ 뮤직비디오는 티저 공개 때부터 큰 관심을 받았고, 본편이 공개된 이후로는 그야말로 화제성을 쓸어 담았다. 활동 연차가 쌓인 가수로서 성적에는 연연하지 않겠다는 케이윌의 발언과 대조되는 독기 어린 행보(!)라며 잔잔한 유머 코드로 흥하기도 했다. 하지만 케이윌-서인국-안재현이 형성한 ‘이러지 마 제발-내이별’ 세계관에는 마냥 재미있어하거나 즐길 수만은 없는 뾰족한 갈고리가 존재한다. 이 흥행은 어디까지나 퀴어베이팅(queerbaiting)과 이성애 중심주의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러지 마 제발’ 뮤직비디오에는 3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서인국, 안재현, 다솜은 평범한 삼각관계처럼 보인다. 서인국은 친한 친구인 다솜과 다솜의 연인 안재현을 심란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슬픔에 가득 찬 서인국과 안재현·다솜의 결혼식 장면이 교차될 때 서인국은 짝사랑하는 여자를 떠나보낸 비극의 주인공이다. 여기까지는 지극히 평범한데, 이 뮤직비디오에는 소위 ‘반전’이 있다. 스포일러 주의! 뮤직비디오의 마지막에서 서인국은 다솜을 가운데 두고 셋이 함께 찍은 결혼식 사진을 들여다보다가, 안재현을 찢어낸다. 그리고 안재현의 사진을 자신과 나란히 붙인다. 서인국이 좋아한 사람은 안재현이었던 것이다. 하필 노래 제목도 ‘이러지 마 제발’이어서, 예상치 못한 결말에 놀란 시청자들이 제발 이러지 말라고 울부짖는 리액션이 더해지며 대한민국 뮤직비디오계에 한 획을 그었다. 가수로 데뷔한 서인국은 <응답하라 1997>로 막 배우로서 주가를 올리던 중이었는데, 이 뮤직비디오로 단숨에 ‘월드 게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외국인들의 뮤직비디오 리액션 또한 인기였기 때문이다. 이 뮤직비디오는 충격받은 리액션으로 유명할 만큼 출연자를 자연스럽게 이성애자로 인식하는 이성애 중심주의 사고를 뒤흔들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미디어에서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은 중요하다. 동시에, 퀴어를 반전의 요소로 써먹었다는 점에서 퀴어베이팅이다.

퀴어베이팅의 사전적 의미는, 픽션이나 엔터테인먼트에서 창작자가 퀴어 요소를 활용하거나 넌지시 암시하면서도 실제로 묘사하지는 않는 마케팅 전략이다. 퀴어나 성소수자 친화적 소비자에게 어필할 수 있는 관계와 등장인물을 미끼(bait)로 이용한다는 의미이다. 언젠가부터 미디어를 점령한 ‘브로맨스’ ‘워맨스’가 대표적인 예시에 속한다. 이성애 관계 바깥에서도 발생할 수 있는 강렬한 이끌림이나 감정을 적극적으로 조명하면서도, 그 감정은 로맨스가 아니고 주체도 퀴어가 아니라는 알리바이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 그 외에도 퀴어 캐릭터가 작품 안에서 단순히 흥미를 유발하기 위한 요소이자 장치로서 등장하거나, 소수자로서의 특수성을 부각하는 데 쓰이는 것도 퀴어베이팅이다. <응답하라 1997>의 강준희(호야 분)처럼 퀴어지만 이성애자인 중심인물을 좋아하여 중심서사에 편입할 수 없는 인물은 결국 이성애자인 주인공이 얼마나 ‘괜찮은’(소수자에게도 친절한) 사람인지 보여주는 장치로 쓰인다. 이 인물들에게 허락된 최대치의 행복이란 이름 모를 누군가와의 로맨스이고, 그마저도 불편하지 않게, 중심서사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다. 그렇게 소수자는 주변화되고 타자화된다. ‘이러지 마 제발’처럼 인물의 성 정체성이나 지향성을 ‘반전’으로 삼는 것은 발상 자체가 이성애 중심적이다. 남자가 여자를 좋아한다고 인식하지 않는 시청자에게는 반전도 아닐뿐더러, 상상도 못한 진실처럼 연출하는 것도 불쾌하다. ‘이러지 마 제발’ 뮤직비디오는 댓글 모음 영상도 400만뷰를 넘을 만큼 인기가 많다. 그중에 눈길을 사로잡은 댓글이 있다. “다들 놀랐다 당황스럽다 그러는데 난 걍 처음부터 슬펐음.” 어떤 사람에게는 이 뮤직비디오가 ‘인생의 재미’가 아니라 인생 자체인 것이다.

케이윌 ‘내게 어울릴 이별 노래가 없어’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 유튜브 갈무리

안재현과 서인국은 뮤직비디오 속에서 다시 만난다. 장소는 장례식장. 애절한 발라드를 따라 진행되는 서사는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여전히 마음을 감추고 있는 두 사람의 아슬아슬한 분위기는 긴장감을 고조하고, 시청자는 다양한 해석을 나누며 감상을 확장한다. 서인국과 안재현이 출연하는 영상마다 ‘월드 게이’라는 자막이 달린다. 두 사람의 묘한 분위기나 친밀한 사이에 푹 빠져 과몰입하는 댓글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일명 월드 게이 2부작을 달성한 케이윌은 ‘게이윌’이라는 별명을 얻고, ‘케이팝이 아니라 게이팝’ ‘삼각관게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많은 ‘좋아요’를 받는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게이를 언급하고 동성애 연기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 한편, 서울시는 서울퀴어퍼레이드의 서울광장 사용을 불허했다. 해마다 공간 사용 문제와 혐오 세력의 테러와 씨름하는 퀴어퍼레이드는 올해 남대문로와 우정국로 일대에서 열렸다. 이 현상은 모두 같은 달에 벌어졌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겠다. 가짜 게이만 사랑받는 세상. 게이의 표상은 그들이 ‘진짜’가 아니라는 증명이 있을 때만 허용된다. 대중의 무의식에서 결혼 경력이 있는 안재현이 강력한 이성애자의 알리바이로 기능하듯, 결혼했고 아이도 있기에 댄서 아이키가 <SNL>에서 ‘강휘혈’이라는 캐릭터로 여심을 흔드는 역할을 마음껏 연기했듯, 커밍아웃한 게이인 홍석천이 진행하는 <보석함>에 출연한 남자들이 ‘질색하고’ ‘어색해하는’ 표정을 숨기지 않듯. 진짜여서는 안 되니까, 진짜가 아니라는 확신을 내세울 수 있다면 가짜는 강력한 무기가 된다. 이렇게 안전한 규범적 정체성을 방패로 퀴어 표상을 갖고 놀 때, 실존하는 맥락과 구조적인 문제는 탈각되고 퀴어는 그저 즐기기 좋은 오락거리로 가공된다.

6월21일, 코미디언 조혜련의 인스타그램에 <헤드윅> 공연 관람 후기가 올라왔다. <헤드윅>은 존 캐머런 미첼과 스티븐 트래스크가 창작한 록 뮤지컬이며 한국에서는 2005년 초연 이후 꾸준히 재연 중이다. 1961년 동독을 배경으로 하는 <헤드윅>의 주인공은 소년 한셀. 그는 결혼을 약속하는 미군 루터의 권유로 성확정(성전환) 수술을 받고 엄마의 이름인 헤드윅으로 개명하지만, 수술 실패로 ‘남성도 여성도 아닌’ 몸을 갖게 된다. 헤드윅은 그동안 MTF 트랜스젠더 캐릭터로 여겨졌지만, 최근에는 ‘젠더 퀴어’ 캐릭터로 통한다. 헤드윅 역을 맡은 유연석의 초대로 방문한 조혜련은 마지막에 자신의 노래 ‘빠나나날라’를 불렀다. 친분이 있는 연예인끼리 초대를 주고받고, 재미있는 분위기를 연출하고자 무대에 올리는 것쯤은 흔한 일이다. 그런데 조혜련은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하는 연예인이다. 그리고 뮤지컬 <헤드윅>은 젠더 체계를 교란하는 헤드윅이 차별과 억압, 개인을 사회가 인정하는 수준으로 축소하여 소속시키려는 폭력에 맞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려는 투쟁의 서사다. 유튜브 채널 마하나임TV 선교회가 공개한 <이프 패밀리> 시리즈는 차별금지법이 제정된 이후 한국 사회를 상상해본다는 내용의 짧은 영상이다. 조혜련은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공공장소에서 전도를 하다가 인권센터에 끌려간다는 내용에 출연했다. 이 영상은 퀴어를 반대하는 내용은 아니다. 그러나 차별금지법을 반대한다는 입장, 즉 차별에 찬성한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조혜련이 극을 보고 남긴 감상은 음악, 아름다운 목소리, 배우의 연기력 정도이다. 무대에 오른 사람도, 무대에 올린 사람도, 자신이 무엇을 보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분명히 알지 못하기에, 어쩌면 알고 싶지 않기에 지우는 것들이 있다.

‘이렇게라도’ 가시화되고 언급되는 게 더 낫지 않냐는 질문이 가능하다. 아예 없는 존재로 취급되는 폭력과, 타자화되어 안전하고 무해한 오락거리일 때만 환영받는 기만은 비교 대상이 아니다. 이거보단 저거가 아니라 이것도 저것도 문제다. 창작자도 소비자도, 누군가를 ‘예상치 못한, 충격적인 비밀’로 설정하거나 오락거리로 소비하는 행위의 의미를 성찰해야 한다.

이진송 계간 ‘홀로’ 발행인

이진송 계간 ‘홀로’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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