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흰 승용차 올라탔던 유흥업소 여성, 피투성이 혼수상태 발견
'성매수' 공방→21년 만에 밝혀진 범인은 '전과 14범' 무기수
(서울=뉴스1) 신초롱 기자 = 1999년 7월 6일 새벽 강남 유흥가 근처의 한 골프연습장 주차장에서 의식을 잃은 여성이 발견됐다. 피해자는 유흥업소에서 일하던 20대 여성 A 씨였다.
A 씨는 신발도 없이 하의가 벗겨진 채 머리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부상이 심각해 수술조차 받지 못한 채 사경을 헤매다 4일 뒤 사망했다.
경찰은 강력반 형사들을 모두 투입해 유흥가 일대를 샅샅이 뒤져 범인 검거에 나섰다. 하지만 범인에 대한 윤곽은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한 가지 유일한 단서는 피해자 몸에 남아 있던 남자의 DNA뿐. 경찰은 A 씨가 탔던 흰색 승용차조차 특정하지 못했다. 그렇게 사건은 미제로 분류됐다.
◇"비명·폭행하는 장면 봤다"…범행 장소에 목격자 존재했다
22년 전 그날 주차장에는 목격자가 있었다. 주차된 차 뒷좌석에 누워 있던 여성은 회식 때 마신 술기운에 차량 뒷좌석에서 잠이 들었다가 새벽 무렵 주차장에 들어오는 차 소리에 잠에서 깼다고 한다.
목격자는 비명이 들려 창문을 보니 남자 여럿이 A 씨를 무참히 폭행하고 있었다고 진술했다. 약 30분 뒤 승용차를 타고 남자들은 떠났고 밖으로 나가보니 그 자리에는 의식을 반쯤 잃은 A 씨가 쓰러져 있었다고 털어놨다.
폭행이 지속되는 동안 신고를 하고 싶었지만 휴대전화가 앞좌석 앞 대시보드 쪽에 있어 움직이는 순간 위협받을 수 있다는 불안감에 신고하지 못하고 가만히 누워있었다.
결국 골프연습장 관리인의 신고로 A 씨는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끝내 유명을 달리했다.
◇피해자, 차 착각해 잘못 탔을 가능성…CCTV 없어 수사 답보
A 씨가 연락이 끊어진 건 마지막으로 출근한 유흥업소에서 나온 직후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녀와 마지막으로 통화한 당시 보도방 운영자 최 씨는 범인의 차량을 자신의 차량과 착각해서 탔을 것으로 추측했다.
그는 "그때 차들이 거의 뭐 그 일을 하면 제 차 같은 비슷한 차들이 많다"고 했다. 이어 "차를 탔는데 '오빠 차가 아니다'기에 '빨리 내려' 그랬더니 '알았어요'라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화가 됐다. 당시 위급해 보이지는 않았다"고 회상했다.
짐작대로라면 계획범죄는 아니었을 터. 하지만 범인들은 차를 잘못 탄 A 씨를 태운 채 약 1.7㎞ 떨어진 골프연습장 주차장으로 향했다.
당시 CCTV, 블랙박스가 보편화되지 않던 시절이어서 범인을 추적할 단서는 없었고 수사는 오랫동안 답보 상태에 머물렀다.
◇17년 만에 DNA 일치자 발견…강도 살인 전과 14범 무기수
강남 일대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사건이 잊힐 때쯤 결정적인 증거가 확보됐다. 발생 17년 만이었다.
2010년 DNA 이용 및 보호법이 시행된 뒤 검찰과 국과수가 살인·강간 등 중범죄의 DNA를 모아 구축한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경찰 미제사건전담팀이 미제 사건에 대한 전수조사를 실시하는 과정에서 수감 중인 재소자의 DNA와 일치하는 인물이 밝혀진 것.
그는 강도 살인 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원주교도소에 복역 중인 당시 32세였던 전 모 씨였다. 전 씨는 차를 타고 다니면서 길거리에 술 취한 행인들을 차에 태우거나 금품을 갈취하는 이른바 '업동이'라 불리는 수법을 일삼는 2인조 강도단 중 한 명이었다.
이들은 2건의 강도 살인을 포함해 총 14건의 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2003년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최종 선고받았다.
◇전 씨, 범행 부인하며 친형 공범 지목…마약 후 투신 사망
2016년 경찰은 A 씨 몸에 남아있던 DNA의 주인이 전 씨로 밝혀지자 A 씨 살인 사건 유력 용의자로 보고 재수사에 돌입했다.
전 씨는 그날 상황에 대해 "저는 초저녁에 논현사거리 부근 포장마차에서 일행과 소주 두 병을 마시고 OO 호텔 나이트클럽에 가서 맥주 7병을 마시고 나왔다. 일행의 차를 타고 집에 가던 중 피해자를 발견하고 보조 창문으로 내려 헌팅을 시도했다. 피해자가 웃으면서 뒷좌석에 타고 그녀의 이름과 취미, 사는 곳을 물으면서 골프장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전 씨와 차량이 함께 있었다는 일행은 친형이었다"라고 밝혔다.
전 씨는 "주차장에 도착해서 형이 피해자와 할 말이 있으니 차에서 내리라고 했고 약 10분 뒤 형이 차에서 내리더니 여자 생각이 있냐고 물으면서 차에 가보라고 했고 운전석 뒤편 문을 열었더니 이미 피해자는 형과 일이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체념한 듯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돈을 주고 성관계를 갖기로 약속한 조건 만남으로 생각해서 저도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후 자신은 형의 지시대로 차를 끌고 주차장 밖으로 향했다고 주장하며 "5분에서 10분 정도 지나 형이 다급하게 오더니 출발하라고 해서 큰길로 나와 차를 잠시 멈추고 형과 운전을 바꿨다. 아마 형이 저를 주차장 밖으로 보낸 다음 피해자를 폭행, 살해한 것 같다. 저는 폭행에 가담하지 않았고 폭행이 있었는지도 몰랐다"고 했다.
하지만 전 씨의 형은 범행이 있은 후 20여일 정도 뒤에 필리핀에서 마약을 하고 투신한 상태였다.
얼마 뒤 전 씨 형제와 잘 아는 지인은 전 씨의 주장과 배치되는 증언을 내놨다. 지인은 "그때 형 전 씨가 낚시터 가자고 해서 갔던 거 같다. 시험 끝나고 갔을 거다"라고 했다. 7월 4일 일요일 저녁 무렵 일행과 여행을 떠났던 전 씨의 형이 돌아온 건 이틀 뒤인 7월 6일 새벽 1시로 추정됐다.
◇유일한 객관적 증거…두개골 16㎝·3㎝ 골절선과 성폭행 흔적
전 씨는 첫 진술이 착각이라며 입장을 번복했다. 전 씨는 피의자 신문조서 4회 차 때 "형과 함께 나이트클럽에 갔다는 진술을 착각해서 진술했던 것 같다.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은 집 앞에서 형과 만났다는 사실"이라고 했다.
용의자로 특정된 뒤 6차례에 걸친 대면 조사에서 성폭행 혐의를 줄곧 인정해 왔던 전 씨는 조사 과정에서 피해자가 유흥업소에서 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성폭행이 아닌 성매매라며 입장을 바꿨다.
또 범행 전 과정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구체적인 진술을 한 반면 범행 과정 중 형을 기다렸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무엇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진술 변경이 용이하도록 질문에 따라 어미의 형태를 구분해 사용하는 패턴을 보였다. 전문가들은 그의 진술에 신빙성이 낮다고 판단했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이 사건의 객관적 증거는 시신에 남은 흔적이다. 폭행 과정에서 두개골에 16㎝, 3㎝의 골절선이 생겼다.
범인은 A 씨의 머리를 잡은 뒤 폭행했고 강하게 때려 뒤로 넘어뜨렸다. 이후 머리를 땅바닥에 여러 차례 내리찍고 성폭행까지 한 것으로 추정됐다. 사건 직후 발견된 DNA는 전 씨의 것이었기에 그가 피해자를 성폭행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21년 만에 열린 재판…1심 무죄→항소심서 징역 15년 선고
21년 만에 열린 재판에서 파란색 수의를 입고 들어온 전 씨는 침착한 표정으로 "성관계한 것은 맞다. 강제로 성폭행하지 않았다"라며 모든 혐의를 부인했다.
1심 재판부는 강간 살인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유일한 목격자였던 증인의 진술만으로 전 씨에게 살인의 고의가 있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특수강간, 강간치사 혐의에 대해서는 공소시효가 만료됐다며 면소를 결정했다.
검찰은 항소했고 2심 재판부는 원심을 파기하고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10년간의 신상정보 공개·고지 명령과 아동·청소년 기관 취업제한 명령도 함께 내렸다.
재판부는 피해자의 신체에서 전 씨의 DNA가 나왔고 피해자는 사건 당시 입은 부상으로 혼수상태에 있다가 사망했다며 살인에 대한 미필적 고의가 충분하다고 봤다.
또 범행을 부인하며 용서를 구하지도 않는 점을 꼬집었다. 재판부는 전 씨가 강도살인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점을 고려해 형을 정했다고 덧붙였다.
rong@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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