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면서도 조국 광복 위해 헌신

2024. 7. 6. 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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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동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인물 탐구] ⑥ 김마리아
미국 망명 유학 시절 김마리아 선생의 파크대학 졸업사진. [사진 김석동·뉴욕한인교회]
“피고는 어찌하여 대일본제국의 연호를 쓰지 않고 서력연호를 쓰는가?” “나는 일본연호를 배운 바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 사람이오.” 잔혹한 고문을 받으며 일제의 심문에 김마리아 선생이 던진 답변이다.

김마리아는 1892년 황해도 장연군 소래마을에서 대지주 김언순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장연군은 바다에 접해 여러 포구가 있었기에 일찍이 외래문화의 영향을 받았고, 소래마을에는 1895년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와 신식학교인 소래학교가 세워졌다. 언더우드 박사가 이 교회 담임목사였고, 소래학교는 황해도 신교육의 산실이 되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부친을 일찍 여읜 김마리아는 8세 때 이 학교에 입학해 수석 졸업했다.

부유한 김마리아 가계는 온가족이 독립운동과 교육 사업에 투신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집안이다. 큰숙부 김용순은 김구·안창호와 각별한 사이로 서울로 이주해 작은숙부 김필순과 함께 ‘김형제상회’를 차렸고 형제는 함께 국권회복운동에 나선다. 언더우드의 권유로 배재학당을 거쳐 1908년 세브란스의학교 제1회 졸업생이 된 김필순은 의형제 안창호와 함께 ‘신민회’에 가입한 후 만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큰고모 김구례의 남편 서병호는 상해에서 신한청년당을 창당했다. 넷째 고모 김순애는 김규식의 부인이며, 막내고모 김필례는 YWCA 창설자로 고모들 역시 독립운동가들이다.

고모·숙부 등 온 가족이 독립·교육 운동

서울 연지동에 위치한 구 정신여고와 ‘김마리아길’. [사진 김석동·뉴욕한인교회]
숙부들이 서울로 이주하고 모친마저 여읜 김마리아는 1906년 서울로 와서 최초의 여학교인 이화학당에 입학했지만 곧 언니들이 다니는 연동중학교로 옮겨 학업을 계속한다. 이 학교는 1887년 북장로교 선교사 앨러스가 설립한 정동여학당이 연지동으로 이사하고 이름을 바꾼 곳으로, 1909년 정신여학교가 되었고 현재 정신여자중고등학교의 전신이다.

1910년 4회로 졸업한 김마리아는 광주수피아여고 교사로 일하다 1912년 일본 유학길에 올라 히로시마고등여학교에서 수학한 후 1913년부터 모교에서 다시 교편을 잡는다.

1915년 고모 김필례가 유학 중인 일본 기독교계 동경여자학원에 입학한 김마리아는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에 참여했고 1917년 회장에 선임된다. 그는 조직력·통솔력을 발휘해 일본 각 지방에 지회를 조직하는 등 활동범위를 넓혀갔고 조선청년독립당에도 가입한다. 1919년 2월 8일 400여 명의 재일유학생들이 동경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친 ‘2·8독립선언’은 3·1독립선언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 선언대회에 참석했던 김마리아는 2·8독립선언서를 기모노에 은밀히 숨겨 국내에 반입했고 부산·대구· 광주·서울·황해도 등을 돌며 동경의 독립운동상황을 전파했다. 이후 3·1독립만세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해 황에스더· 나혜석·박인덕 등과 함께 항일여성단체조직에 나서게 된다.

그러나 김마리아와 동지들은 3월 6일 정신여학교에서 일경에 체포돼 악명 높은 조선총독부의 경무총감부로 끌려간다.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모진 고문 끝에 몸이 만신창이가 된 그는 서대문감옥 5호 감방에 투옥된다. 세브란스의학교의 스코필드 선교사는 성경과 사식을 넣어주면서 구명운동을 계속했고, 그 해 8월 면소 방면 된 김마리아는 세브란스병원에서 치료 후 정신여학교로 복귀한다.

서울 연지동에 위치한 구 정신여고와 ‘김마리아길’. [사진 김석동·뉴욕한인교회]
김마리아가 수감 중인 1919년 4월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고, 6월 임정지원으로 국내에 ‘대한민국애국부인회’가 결성되었다. 활동이 지지부진하던 9월 김마리아가 회장에 취임하면서 애국부인회는 국내외에 지부를 설치하는 등 전 민족적 규모로 확대됐고 항일여성조직으로 자리 잡는다.

그러나 11월말 동지의 배신으로 일제는 대대적인 검거에 나섰고 김마리아와 임원 등 18명이 체포됐다. 김마리아는 동지들에게 나라를 위해 조직과 동지를 구하는 희생을 각오하자고 격려했고, 대구로 압송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군중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총 52명의 관련자가 체포돼 수사 주관기관인 대구경찰서로 이송되었다.

김마리아는 매일 새벽과 밤중에 기도회를 열어 동지들을 격려했고 찬송과 기도를 계속했다. 회장 신분의 그는 형언할 수 없는 모질고 끔찍한 고문을 당했고 심한 두부구타로 신체는 물론 정신마저 쇠약 증세를 보이게 된다. 언론은 연일 수감된 김마리아의 동정을 보도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대한애국부인단 수령 김마리아는 예심 중 중병이 생기어 음식을 전폐하고 자못 위독한 상태에 있다 … 전신을 수습치 못하고 밤낮으로 신음하는 … 힘없이 숨이 찬 음성으로 간신히 두어 마디를 못하여 다시 혼미한 상태에 있다!’라고 보도했다. 지금도 한복 저고리가 유품으로 남아있는데 잔혹한 고문으로 한쪽 가슴이 없어져 앞섶 좌우 길이가 다르다.

정신여자 중고등학교 기념관 내 김마리아 선생 사진. [사진 김석동·뉴욕한인교회]
총 9명이 재판에 넘겨졌고 김마리아는 고문으로 인해 병세가 위중했지만 법원은 병보석을 계속 불허했다. 전국에서 동정금이 답지했고 스코필드 등 선교사들은 이들을 면회한 후 사이토 총독에게 강력히 항의했다. 이듬해 5월에 이르러서야 병보석이 허가되었다. 보석 후 세브란스병원은 대구로 의료진을 보내 치료에 나섰고 국내언론은 김마리아의 상태를 연일 보도했다. 직후에 열린 재판에서 가장 무거운 징역 3년을 선고받았지만 병세악화로 서울 세브란스병원으로 이송, 치료를 받으며 불복재판을 계속했다.

재판 중 상해임시정부와 선교사 맥큔은 비밀리에 김마리아의 중국망명을 추진했고 1921년 6월말 우여곡절 끝에 서울을 탈출한다. 인천, 웨이하이를 거쳐 상해로 간 김마리아는 고모부 서병호의 집에서 신병을 치료한 후 남경 금릉대학에서 수학하면서 항일여성운동을 이어갔다. 1922년 임시정부 의정원은 김구와 김마리아를 황해도 대표의원으로 선출해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국회의원이 탄생한다.

한편, 상해임정이 분열되고 이를 수습하기 위해 개최된 국민대표회의마저 결렬되자 김마리아는 1923년 미국 유학을 위해 제2의 망명에 나선다. 하와이를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그는 동포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는다. 이후 9년간 미국 망명생활에서 파크대학, 시카고대학, 컬럼비아대학, 뉴욕신학교 등에서 수학했고 1928년 한국여자유학생들로 ‘근화회’를 조직, 회장으로 취임해 조국광복후원과 여성운동에 나선다.

“김마리아 같은 여성 10명만 있었던들…”

1931년 5월에 10년의 선고시효가 만료되자 선교단체 등에서 총독부에 김마리아의 귀국문제를 타진했고 드디어 11년간의 망명생활이 끝난다. 1932년 미국, 캐나다, 하와이를 거쳐 요코하마항에 도착해 일본 경찰의 취조 후 부산, 서울을 거쳐 원산으로 호송된다. 언론에서는 김마리아의 귀국을 연일 대서특필하며 장안의 화제가 되었고 그는 관심과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일제는 김마리아의 활동을 철저히 규제했으나 그는 1933년 성경과목에 한하여 교수를 허용하는 조건으로 원산 마르타윌슨여자신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역사의식과 애국심을 고취시켰고 농촌계몽운동과 기독교여성운동으로 활동범위를 넓혀갔다. 1934년부터 1937년까지 ‘여전도회’ 회장직을 맡아 일제경찰의 감시 하에도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는 등 활동을 크게 늘려갔다. 그가 이끄는 여전도회는 1941년 신사참배를 끝내 거부했고 마르타윌슨여자신학원은 1943년 폐교 당한다.

김마리아는 일제의 고문으로 인한 지병이 도져 1943년 12월 원산 자택에서 쓰러졌고 수양딸과 입양한 아들만 남긴 채 이듬해 3월 13일 평양기독병원에서 서거했다. 일제의 감시로 인해 몇 명만이 참석한 장례예배 후 유언대로 화장해 대동강변에 유해가 뿌려졌다. 선생이 그렇게 소원했던 해방 1년 5개월 전이다.

집요한 일제의 탄압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다수의 지식인과 지도자들이 변절했지만 그는 끝내 꺾이지 않고 조국광복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1962년 건국훈장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안창호는 “김마리아 같은 여성동지가 10명만 있었던들 한국은 독립이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 2007~2008년 재정경제부 제1차관을 거쳐, 2011~2013년 금융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했다. 현재 지평인문사회연구소 대표로 있다. 지은 책으로는 『김석동의 한민족 DNA를 찾아서』가 있으며, 오랜 경제전문가로서 직장인들의 팍팍한 주머니 사정을 감안해 가성비 좋은 서울의 노포 맛집을 소개한 『한 끼 식사의 행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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