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유교 평화', 막부는 '주변국 선점'…국시가 달랐다
[근현대사 특강] 한국과 일본, 서로 다른 근대화 방향
「조선왕조실록」
데이터베이스(DB)에서 검색해 보았다. 놀랍게도 조선 성종 20년(1489)부터 대한제국 말까지 543건이나 떴다. 초기 사례에서 그 의미를 살피면, “온 나라의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공론(公論)이 시행되면, 국시가 정해지고 치화(治化)가 저절로 아름다워진다”(『성종실록』권 262, 성종 23년 2월 21일 조)라고 했다. 의미에서 오늘날과 차이가 없다. 시기적으로는 사림파(士林派)가 등장하여 우리 역사에서 정파 정치가 시작한 바로 그때다. 사림은 선비의 숲. 전국 중소지주층이 농업 경제력 향상을 토대로 곳곳에 서원을 세워 학문을 연마하면서 생긴 신조어다. 지금까지 지식인은 관리가 되기 위해 과거 시험 공부하던 부류에 한정되었다. 15세기 말에 지식인 집단이 크게 확장하면서 함께 해야 할 정신세계로 ‘공론’ ‘국시’ 등 격조 높은 용어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사림파의 등장은 큰 역사적 의미를 띠는 시대의 변화였다. 그런데도 일제 식민주의 역사학은 사림의 사화·당쟁 때문에 조선이 망했다는 ‘악의적’ 해석을 내놓아 민족사 이해에 큰 혼돈을 가져왔다. 어떤 정치체제도 시간이 흐르면 폐단이 생기기 마련이다. 18세기가 되면 사림의 붕당(朋黨·정파)정치도 공론 실현의 정신을 잃고 이권 탐하기 정쟁에 빠져 소민의 희생이 커졌다. 이에 영조와 정조는 군주 직접 정치가 대민(大民) 곧 양반 사대부로부터 ‘소민(小民)’을 보호할 수 있는 길이라고 역설하였다. ‘탕평 정치’의 시작이었다. 조선 시대 유교 정치가 이렇게 시대변화에 따라 발전적 변신을 거듭했다면 18세기 이래의 ‘소민 보호’ 표방은 근대의 여명으로 볼만한 시대변화다.
미 교수 “조선, 유교 덕치로 500년 존속”
우리 근대사는 이웃 일본과 자주 비교된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에 성공했고 우리는 그렇지 못해 저들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비교는 지금도 흔하다. 최근 일본에서 『메이지 유신이라는 과오(過誤)』(原田伊織, 2017)라는 책이 나와 일본 독서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 책은 일본 근대의 대명사인 ‘메이지 유신’이란 단어 자체를 부정한다. 메이지 시대에는 ‘유신’이란 말이 없었는데 1930년대 쇼와시대 황도(皇道) 군국주의자들이 ‘쇼와 유신’을 표방할 때 ‘메이지 유신’이란 말을 함께 만들어 사용한 것이라고 밝혔다. 저자는 부제로
「일본을 멸망시킨 요시다 쇼인과 조슈(長州) 테러리스트」
라고 붙였다.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은 도쿠가와 막부 타도를 외치다가 30세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무사다. 그가 서쪽 조슈 (長州·야마구치) 번에서 키운 제자들이 ‘왕정복고’의 기치를 내세워 집권하는 과정에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테러 행위를 저지른 것을 낱낱이 비판했다. 쇼와시대 이래의 ‘관·군부 사학’의 극복을 일본 근현대사 교육의 새로운 과제로 내세운 의미 있는 저술이었다.
일본제국 침략주의를 열심히 비판해온 필자로서는 매우 반가운 저서였다. 이제 일본도 바뀌기 시작하나 싶어 필자의 연구원 기획으로 한국어 번역본을 출판하기로 했다. 일본 출판사를 통해 저자에게 한국어 번역본에 붙일 서문을 부탁했다. 2주쯤 지나 도착한 장문의 글을 받고 필자는 아연실색할 수 밖에 없었다. 한국사에 관한 저자의 지식은 조선총독부 시절의 역사 인식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관·군부 사학’ 극복이란 과제는 어디까지나 자국 문제에 머물러 있는 상태였다.
「유수록(幽囚錄)」
에서 밝힌 ‘주변국 선점론’을 ‘국시’로 삼아 국가 예산의 근 3분의 2를 매년 군비 확장에 투입하여 청일전쟁과 같은 큰 전쟁을 몇 번이나 일으켰다. 요시다 쇼인은 일본이 구미 열강의 식민지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열강의 군사 기술을 속히 배워 그들보다 먼저 주변국을 차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것이 천황을 영광되게 하는 길이라고 역설했다. ‘소민 보호’의 정치 이념에 따라 민생 안정을 우선하던 조선의 국정과는 판이한 근대화였다.
「해방(海防) 의견서」
를 내 주목을 받았다. 도쿠가와 막부는 그를 나가사키 해군 전습소에 배속하여 해군력 배양 일을 맡겼다. 그는 일약 대신 급 지위에 올랐다. 그의
「해방 의견서」
는 조선업(造船業) 발전과 해안 요새 방어 체계 ‘진타이 (鎭台)’ 설치를 강조했다. 그는 자신의 해군 전습소가 네덜란드, 프랑스 전문가들의 도움으로 성과를 거두자 일본은 조선과 청국의 해군 창설을 도와야 한다고 하기도 했다. 요시다 쇼인의 제자 이토 히로부미 등은 집권 후 가쓰 가이슈가 구축한 ‘진타이’ 체제를 모두 없애고 해외 출정이 가능한 ‘사단제(師團制)’로 바꾸었다. 1894년 청국과의 전쟁 소식이 알려지자 가쓰 가이슈는 일본은 중국과 조선으로부터 역사적으로 많은 것을 받은 나라인데 지금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형제간의 싸움을 일으키는 짓이라면서 개전에 강하게 반대했다. 그는 도쿠가와 시대 유교 지식 세계에 관심을 가진 마지막 세대에 속하는 인물로 만년에는 기독교 수용에도 적극적이었다.
제3 자의 시선은 어떤가?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980년대초 서울대 법대에서 방문 교수로 가르친 적이 있는 윌리엄 로빈슨 쇼(1944~1993) 교수는 조선왕조가 500년 존속한 것은 법치국가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유교 본연의 덕치(德治) 실현의 이념으로 ‘소민’의 억울한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 법치를 추구했다고 했다. 한국 법제사 전공자로서 조선 전기 『경국대전』부터 고종 시대 『대전통편』까지 법전 발달의 역사를 연구하면서 학계에 제출한 입론이다. 조선왕조는 무능하여 왕조를 무너뜨릴 힘조차 없어서 500년 갔다는 야유 섞인 평가가 난무할 때였다. 그는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묻힌 윌리엄 얼 쇼의 손자이자, 은평구 은평 평화공원에 우뚝 서 있는 윌리엄 해밀턴 쇼의 아들이다. 한국을 모국처럼 여기며 한국사를 전공한 로빈슨 쇼는 존스홉킨스 대학에 재직 중이던 1993년 39세로 아깝게 일찍 세상을 떠났다.
『승정원일기』 본 러 교수 “한국 발전 동력”
수년 전 미국에 망명 중인 러시아 교수 한 분을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의 서고로 안내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TV 방송 중 푸틴 정부가 크렘린 궁을 사용하는 것은 제정시대 차르 체제와 오버 랩 되는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했다가 국외로 추방당했다. 필자는 규장각 국보 실에 표본으로 펼쳐 놓은 『승정원일기』 앞에서 국왕과 신하 간에 오간 대화를 매일 기록한 책이라고 설명했다. 설명이 끝나자마자 그는 오늘날 한국이 급속한 발전을 이루고 있는 이유를 알겠다고 했다. 그는 러시아 현대사 전공자로 오래전 당 서기 스탈린 연구를 위해 관련 자료를 찾았으나 방명록만 남아있을 뿐 방문자들과 나눈 대화 기록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고 했다. 국왕이 신하들과 나눈 대화를 매일 기록하여 후세에 남기는 부끄러움 없는 소통문화를 오늘의 한국의 급속한 발전 원동력으로 보는 예리한 사평(史評)이었다. 남이 보면 혜안이 작동하는 우리 유교 정치 문화유산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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