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라는 말에 가려지는 문제들
제시 싱어 지음
김승진 옮김
위즈덤하우스
흔히들 우리는 사고(事故) 탓을 한다. 교통사고, 추락사고, 익사사고, 화재사고 등등 뒤에 사고라는 말을 덧붙인다. 사고의 사전적 의미는 ‘뜻밖에 일어난 불행한 일’이다. 부주의나 불가피한 상황 때문에 발생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인지 ‘탓’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이 그러려고 했던 건 아니야. 우발적 사고인데 어쩌겠냐’고 하며 불행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체념하기도 한다.
그런데 『사고는 없다』의 지은이 제시 싱어는 이런 사고 탓을 정면으로 거부한다. 사고라는 용어를 쓰면 ‘예방할 수 없었다’는 잘못된 암시를 주기 때문이란다. 워싱턴포스트, 가디언 등에 기고해 온 저널리스트 싱어는 20세기 초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광범위한 주요 사고 관련 데이터들을 깊이 있게 분석하고 이제까지 그 어떤 것도 ‘사고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싱어는 이 책에서 사고를 일으키는 모든 인적 과실이 환경, 즉 위험한 조건의 문제와 결부돼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과실에 뒤따르는 사망이나 중대 손상을 거의 언제나 예측하고 예방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인적 과실 탓을 멈춰야만 사고 문제의 진짜 해법을 찾기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20세기 초 미국에선 교통사고가 일어나면 이를 ‘차량 살인’으로 여겨 범죄시했다. 하지만 자동차 로비 세력들은 도로에서 사람이 저지르는 실수를 강조하면서 ‘무단횡단자’ ‘운전석의 미치광이’라는 용어를 퍼뜨려 자신들의 안전의무를 개인들에게 전가했다. 자동차의 안전벨트와 에어백 설치가 의무화되기까지는 수십 년의 정치적인 싸움이 더 필요했다. 긴급 브레이크, 사각지대 감지, 알코올 감지 잠금장치, 차선 인식 등이 미국의 모든 차에 도입될 경우 연간 교통사고 사망자 1만7000명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는 추산이 나와 있다. 미국에선 연간 20만 명이 각종 사고로 희생된다.
지은이는 무단횡단자, 운전석 미치광이, 사고 유발 경향성을 가진 노동자 등 ‘썩은 사과’만 잘 골라내면 안전하게 만들 수 있다는 이론이 더는 통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실수한 사람만 탓하기보다는 자동차와 도로에 더 많은 안전설비를 설치하고, 어셈블리라인의 속도를 늦추거나, 추락 방지용 완충장치를 설치하거나, 날카로운 사물에 보호대를 씌우는 등 적극적인 안전대책이 실행되면 끔찍한 사고를 더 많이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미국에서 더 큰 문제는 사고의 위험과 피해, 사고 이후의 비난과 책임이 평등하게 분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종, 민족, 계층, 성별에 따라 사고를 당할 확률, 사고로 죽거나 부상을 입을 확률, 사고로 비난과 처벌을 받을 확률이 달라진다고 지은이는 주장한다.
이 책에는 사고를 미리 예측하고 헌신한 선구자들의 이야기, 사고의 증가 추세를 막기 위해 개인과 사회가 취할 수 있는 다양한 조치가 소개돼 있다. 한때 한국은 ‘사고공화국’이라 불리기도 했다. 지금도 결코 사고에서 자유로운 사회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 책에서 주장하는 대로 기업이나 규제 기관 등 강자의 입장이 아니라 피해자의 입장에서 역지사지로 생각해 보면 억울한 희생자를 줄이고 보다 더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다. 『사고는 없다』는 바로 그런 점에서 탁월한 접근법을 제시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한경환 자유기고가 khhan88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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