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제스, 마오 대장정·전략 잇단 오판 중국 대륙 내줬다

2024. 7. 6. 01:1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제3전선, 정보전쟁] 중국 국공기의 정보전〈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그러나 패자의 기록도 승자 못지않게 많은 교훈을 담고 있다. 중국 국공내전기 국민당의 정보전 실패가 그렇다. 국민들의 민심 이반이 정보전 약화를 불러올 수 있고, 방첩 기능 경시가 정권 위기를 가속화시킬 수 있으며, 적정(敵情)에 대한 정보수집 소홀이 얼마나 큰 기회상실을 가져왔는지 실증적으로 보여 주었다. 그래서 장제스(蔣介石)와 함께 국민당을 이끌었던 천리푸(陳立夫)는 나이 94세에 영욕의 회고록 『성패지감(成敗之鑒)』을 펴내면서 정보전 소홀로 공산당에 패한 것을 한탄했다.

공산당 초기엔 국민당이 정보전 주도

태평양 전쟁 시절 OSS를 방문한 장제스(왼쪽)를 맞이하는 군통 수장 다이리. [사진 김명호·위키피디아]
장제스의 정보리더십은 매우 전략적이었다. 1차 국공합작 과정에서 공산당의 무서운 잠재력을 본 장제스는 이를 분쇄하기 위해 은밀한 정보적 수단을 쓰기로 했다. 명문가·명문대 출신들이 입당할 정도로 공산당은 이념전에 능했고 노동자·농민의 민심을 끌어들이는 선전선동 능력 또한 국민당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정도여서 범상한 대응책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앙조사통계국(중통), 중앙군사조사통계국(군통), 그리고 남색 셔츠를 입고 다닌다고 해서 남의사(藍衣社)라고 불린 삼민주의역행사(三民主義力行社) 등 3개 정보기관을 신설해 용도에 맞게 유연하게 활용했다.

먼저 공산당을 조용히 와해시키기 위해 거물급 인사들을 전향시키는 등 내분 유도에 집중했다. 마오쩌뚱(毛澤東)의 고종사촌이자 원로 공산당원인 원창(文强) 장군과 공산당 창당 대표인 장궈타오(張國燾) 등을 전향시켜 국민당에서 중용한 것이 대표적 예이다. 전향을 거부한 인사들은 체포해 처형시켰다. 공산당 총서기를 역임한 샹중파(向忠發)와 취추바이(瞿秋白)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거물급 뿐 아니라 중하급 간부와 당원들도 대거 체포하거나 전향시켰다. 그래서 공산당은 국민당 정보기관을 용과 호랑이라고 부를 정도로 무서워했다. 〈중앙SUNDAY 6월 24일자 26면〉

대일 정보전도 성과를 보였다. 특히 중국내 친일세력 처단에 앞장섰다. 한때 국민당 지도부의 일원이었다가 친일파로 변신한 왕징웨이(汪精衛)가 1939년 히라누마 기이치로(平沼騏一郞) 일본 총리를 만나 중국 대륙에 일본의 괴뢰정권을 세우는 협약을 맺었다. 왕징웨이는 반대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반일 언론인들을 무자비하게 테러하기 시작했다. 당시 상하이 조계는 중국의 통치권이 미치지 못해 반일 언론인들이 수십 명씩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러자 군통 등 장제스의 국민당 정보기관이 드러나지 않게 이를 제압했다. 2007년 영화 ‘색계’의 배경이된 사건이다. 국민당의 친일파 제거는 중국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고 친일 세력에게는 공포였다.

1946년 열린 다이리의 영결식. 국민당 군사 정보 기관 군통을 이끌던 다이리의 급서로 국민당 방첩능력이 크게 위축됐다. [사진 김명호·위키피디아]
중일전쟁 시기에는 대일 정보전을 해외로 확대했다. 1938년 7월 소련과 위장 정보조직인 중·소 기술연구소를 설립해 인도네시아까지 대일 군사 정보망을 확충했다. 미국과도 1943년 4월 중·미 특수기술합작소를 설립해 대일 정보전을 공동으로 수행했다.

이처럼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1945년 중일전쟁이 끝날 때까지 사실상 정보전을 주도했다. 그러나 국민당의 영광은 여기까지였다. 무엇보다 집권당인 국민당에 대한 민심이반은 정보전 위기를 불러왔다. 국공내전과 중일전쟁 등으로 민생고가 심해지자, 성난 민심은 모든 원성을 집권당인 국민당으로 돌렸다. 1928년 장제스의 북벌(北伐) 성공 계기로 국민당이 중국을 안정시킬 것으로 기대했던 민심이 원망으로 변하자, 중국인들은 국민당의 정보전에 협조하기는커녕 오히려 공산당의 정보활동에 협력했다. 국민당의 정보전 토양은 척박해지고 공산당의 정보전 토양은 비옥해졌다.

여기에다 공산당의 악의적인 선전 선동은 성난 민심에 더욱 불을 질렀다. 가령 1946년 마오의 비서 천보다(陳伯達)는 『중국 4대 가족』이라는 책을 출간해 장제스 주위의 4대 가족이 부정축재를 저질렀으며 그 금액이 무려 200억 달러에 달한다고 선전했다. 그러나 천보다가 주장한 200억 달러는 국민당 정부의 국가 예산을 마치 장제스 가족의 사적 재산인 것처럼 악의적으로 꾸민 것이었다. 장제스 정부가 백성들의 고혈을 착취한 것처럼 호도해 민심을 더욱 악화시킨 공산당의 전형적 선전선동 책략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민심 위기 상황을 조기경보 해야 할 국민당 정보당국은 뚜렷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정보전쟁
국민당은 적정(敵情)에 대한 정보수집도 소홀했다. 특히 중국 근대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 공산당의 대장정 이동 경로에 대한 정보수집 실패는 국민당에 뼈아픈 대목이다. 국민당은 압도적 군사력을 이용해 장시성(江西省)의 공산당 근거지를 포위해 완전히 섬멸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쫓기던 공산당이 서쪽으로 이동할 것이라는 국민당의 예측과 달리 마오는 1935년 1월 구이저우성(貴州省) 쭌이(遵義) 회의에서 북쪽으로 진로를 변경했다. 이동 경로에 대한 예측정보 실패로 추격에 차질을 빚은 국민당은 공산당을 완전히 섬멸할 절호의 기회를 또 놓쳤다.

공산당의 대일 항전 전략에 대한 정보수집도 미흡했다. 1937년 8월 22일 마오는 2차 국공합작에 앞서 개최된 회의에서 공산당 역량의 70%는 당세 확장에, 20%는 국민당 응수에, 그리고 나머지 10%만 항일에 쓰도록 지침을 내렸다. 일본에 공동대응한다는 명분으로 국민당과 손잡았으나 정작 대일 항전은 뒷전이었다. 국민당 정보기관은 이 같은 공산당의 대일 항전 위장 전술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공산당 과소평가해 스파이 경계 소홀

장제스와 함께 국민당을 이끌었던 천리푸. 94세에 펴낸 회고록에서 정보전 소홀로 공산당에 패한 것을 한탄했다. [사진 김명호·위키피디아]
군통 수장 다이리(戴笠)의 급서는 국민당의 정보전 패배를 재촉한 결정적 불운이었다. 1946년 3월 17일 칭다오에서 난징으로 향하던 비행기가 악천후로 추락하면서 타고 있던 다이리가 사망했다. 이후 다이리를 미워했던 세력들의 입김이 작용해 군통의 간판이 보밀국(保密局)으로 바뀌더니 5만 명에 달했던 요원이 7000명으로 대폭 감축됐다. 이 과정에서 민간과 정부에 배치된 방첩 요원들이 크게 줄었다. 그 결과 공산당 스파이들이 활개를 쳤으며, 정보전 양상도 확연히 공산당 주도로 전환됐다. 더욱이 방첩 기능 약화로 국민당의 군사정보가 공산당으로 계속 흘러 들어가 국민당의 전쟁 수행 능력이 급속히 약화됐다. 훗날 장제스가 “다이리가 죽지 않았다면 대륙을 잃지 않았을 것”이라고 탄식한 이유다. 심지어 적장인 저우언라이(周恩來)마저 “다이리 사망으로 공산혁명을 10년 정도 앞당길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처럼 국민당은 민심의 변화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해 정보전 환경이 급속히 악화됐고, 공산당 내부동향에 대한 정보수집도 소홀했다. 설상가상으로 국민당의 정보전 우위를 주도했던 다이리마저 사망해 정보전 역량이 급락했다. 이는 국민당 우위의 내전 판세에 변화를 일으켜 결국 국민당의 패배로 이어지게 하는 중요한 원인을 제공했다. 물론 공산당의 승리는 마오의 뛰어난 군사 기동전 등이 주효한 결과이지만,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국민당의 정보전 실패도 큰 영향을 미쳤다.

요컨대 국민당의 정보력은 장제스의 리더십을 충분히 뒷받침해주지 못했다. 특히 민심이 국민당의 존망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악화되고 있었는데 국민당 정보기관은 이를 조기 경보(early warning)하지 않았다. 민심이 정보전 성패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도 간과했다. 민심이 멀어지면 국민들의 정보협조를 얻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따가운 시선 때문에 고유한 정보활동마저 위축되기 때문이다. 국민들의 신뢰가 정보력의 원천임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다.

정보기관의 고유업무인 방첩정보도 실패했다. 공산당 세력을 과소평가해 방첩정보를 경시한 나머지 공산당 스파이들이 국민당에 침투해 활보하도록 길을 터 주었다. 이로 인해 국민당의 군사정보가 공산당으로 쉽게 흘러 들어갔고, 사회 불안정도 더욱 심화됐다. 작은 쥐구멍 하나가 제방 둑을 무너지게 할 수 있다는 교훈을 국민당은 간과했고 그 결과는 오늘날 우리가 익히 아는대로다.

최성규 고려대 연구교수. 국가정보원에서 장기간 근무하며 국제안보 분야에 종사했다. 퇴직 후 국내 최초로 비밀 정보활동의 법적 규범을 규명한 논문으로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Copyright © 중앙SUN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