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제스, 마오 대장정·전략 잇단 오판 중국 대륙 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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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전선, 정보전쟁] 중국 국공기의 정보전〈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그러나 패자의 기록도 승자 못지않게 많은 교훈을 담고 있다. 중국 국공내전기 국민당의 정보전 실패가 그렇다. 국민들의 민심 이반이 정보전 약화를 불러올 수 있고, 방첩 기능 경시가 정권 위기를 가속화시킬 수 있으며, 적정(敵情)에 대한 정보수집 소홀이 얼마나 큰 기회상실을 가져왔는지 실증적으로 보여 주었다. 그래서 장제스(蔣介石)와 함께 국민당을 이끌었던 천리푸(陳立夫)는 나이 94세에 영욕의 회고록 『성패지감(成敗之鑒)』을 펴내면서 정보전 소홀로 공산당에 패한 것을 한탄했다.
공산당 초기엔 국민당이 정보전 주도
먼저 공산당을 조용히 와해시키기 위해 거물급 인사들을 전향시키는 등 내분 유도에 집중했다. 마오쩌뚱(毛澤東)의 고종사촌이자 원로 공산당원인 원창(文强) 장군과 공산당 창당 대표인 장궈타오(張國燾) 등을 전향시켜 국민당에서 중용한 것이 대표적 예이다. 전향을 거부한 인사들은 체포해 처형시켰다. 공산당 총서기를 역임한 샹중파(向忠發)와 취추바이(瞿秋白)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거물급 뿐 아니라 중하급 간부와 당원들도 대거 체포하거나 전향시켰다. 그래서 공산당은 국민당 정보기관을 용과 호랑이라고 부를 정도로 무서워했다. 〈중앙SUNDAY 6월 24일자 26면〉
대일 정보전도 성과를 보였다. 특히 중국내 친일세력 처단에 앞장섰다. 한때 국민당 지도부의 일원이었다가 친일파로 변신한 왕징웨이(汪精衛)가 1939년 히라누마 기이치로(平沼騏一郞) 일본 총리를 만나 중국 대륙에 일본의 괴뢰정권을 세우는 협약을 맺었다. 왕징웨이는 반대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반일 언론인들을 무자비하게 테러하기 시작했다. 당시 상하이 조계는 중국의 통치권이 미치지 못해 반일 언론인들이 수십 명씩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러자 군통 등 장제스의 국민당 정보기관이 드러나지 않게 이를 제압했다. 2007년 영화 ‘색계’의 배경이된 사건이다. 국민당의 친일파 제거는 중국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고 친일 세력에게는 공포였다.
이처럼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1945년 중일전쟁이 끝날 때까지 사실상 정보전을 주도했다. 그러나 국민당의 영광은 여기까지였다. 무엇보다 집권당인 국민당에 대한 민심이반은 정보전 위기를 불러왔다. 국공내전과 중일전쟁 등으로 민생고가 심해지자, 성난 민심은 모든 원성을 집권당인 국민당으로 돌렸다. 1928년 장제스의 북벌(北伐) 성공 계기로 국민당이 중국을 안정시킬 것으로 기대했던 민심이 원망으로 변하자, 중국인들은 국민당의 정보전에 협조하기는커녕 오히려 공산당의 정보활동에 협력했다. 국민당의 정보전 토양은 척박해지고 공산당의 정보전 토양은 비옥해졌다.
여기에다 공산당의 악의적인 선전 선동은 성난 민심에 더욱 불을 질렀다. 가령 1946년 마오의 비서 천보다(陳伯達)는 『중국 4대 가족』이라는 책을 출간해 장제스 주위의 4대 가족이 부정축재를 저질렀으며 그 금액이 무려 200억 달러에 달한다고 선전했다. 그러나 천보다가 주장한 200억 달러는 국민당 정부의 국가 예산을 마치 장제스 가족의 사적 재산인 것처럼 악의적으로 꾸민 것이었다. 장제스 정부가 백성들의 고혈을 착취한 것처럼 호도해 민심을 더욱 악화시킨 공산당의 전형적 선전선동 책략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민심 위기 상황을 조기경보 해야 할 국민당 정보당국은 뚜렷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공산당의 대일 항전 전략에 대한 정보수집도 미흡했다. 1937년 8월 22일 마오는 2차 국공합작에 앞서 개최된 회의에서 공산당 역량의 70%는 당세 확장에, 20%는 국민당 응수에, 그리고 나머지 10%만 항일에 쓰도록 지침을 내렸다. 일본에 공동대응한다는 명분으로 국민당과 손잡았으나 정작 대일 항전은 뒷전이었다. 국민당 정보기관은 이 같은 공산당의 대일 항전 위장 전술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공산당 과소평가해 스파이 경계 소홀
이처럼 국민당은 민심의 변화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해 정보전 환경이 급속히 악화됐고, 공산당 내부동향에 대한 정보수집도 소홀했다. 설상가상으로 국민당의 정보전 우위를 주도했던 다이리마저 사망해 정보전 역량이 급락했다. 이는 국민당 우위의 내전 판세에 변화를 일으켜 결국 국민당의 패배로 이어지게 하는 중요한 원인을 제공했다. 물론 공산당의 승리는 마오의 뛰어난 군사 기동전 등이 주효한 결과이지만,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국민당의 정보전 실패도 큰 영향을 미쳤다.
요컨대 국민당의 정보력은 장제스의 리더십을 충분히 뒷받침해주지 못했다. 특히 민심이 국민당의 존망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악화되고 있었는데 국민당 정보기관은 이를 조기 경보(early warning)하지 않았다. 민심이 정보전 성패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도 간과했다. 민심이 멀어지면 국민들의 정보협조를 얻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따가운 시선 때문에 고유한 정보활동마저 위축되기 때문이다. 국민들의 신뢰가 정보력의 원천임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다.
정보기관의 고유업무인 방첩정보도 실패했다. 공산당 세력을 과소평가해 방첩정보를 경시한 나머지 공산당 스파이들이 국민당에 침투해 활보하도록 길을 터 주었다. 이로 인해 국민당의 군사정보가 공산당으로 쉽게 흘러 들어갔고, 사회 불안정도 더욱 심화됐다. 작은 쥐구멍 하나가 제방 둑을 무너지게 할 수 있다는 교훈을 국민당은 간과했고 그 결과는 오늘날 우리가 익히 아는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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