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운전석에서 본 세상
[아무튼, 레터] 안 좋은 일 슬픈 일은 열차에 두고 내리세요
”우리 열차의 마지막 역인 양산역입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모두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잊으신 물건이 없는지 다시 한번 살펴보시고, 안 좋은 일 슬픈 일은 열차에 두고 내리시면 저희가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도 부산도시철도를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산지하철2호선 기관사 이도훈씨는 종착역에서 늘 이렇게 안내방송을 한다.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지하철 빌런들에 긴장하며 일한다는 그는 날마다 약 3744개의 출입문을 여닫으며 부산시를 횡단한다. 이 기관사가 ‘이번 역은 요절복통 지하세계입니다’라는 에세이를 펴냈다. 크고 칙칙한 쇳덩어리의 맨 앞칸을 꿋꿋이 지키면서 본 세상과 승객들 이야기다.
이 책을 읽다 ‘쟈철에페’라는 단어를 처음 만났다. 비 오는 날 지하철 출입문이 닫힐 때 펜싱의 에페 종목처럼 우산으로 문을 찌르고 기어이 올라타는 승객들이 있다고. 올림픽 펜싱과의 차이는 그 공격이 성공해도 환호는커녕 눈총을 받는다는 점이다. 본인은 기쁠지 모르지만 다른 승객 수백 명의 시간이 축난다. 웬만하면 다음 열차 타세요.
기관사들의 고충 중 으뜸은 ‘냉난방 조절’이다. 냉방이 특히 까다롭다. 적당히 틀면 덥다, 그래서 세게 틀면 춥다. 덥다는 민원과 춥다는 민원이 두더지 게임의 두더지처럼 미친듯이 솟아오른다. 환장할 노릇이란다. 또 운전실의 냉방은 따로 설정할 수 없고 객실의 냉방을 공유해야 하는 것도 고역이라고.
놀라지 마시라. 기관사의 중요한 업무 역량은 대장(大腸) 관리 능력이다. 승객은 급하면 내리면 되지만 기관사는 운전실을 떠날 수 없으니까. 객실에서 턱걸이나 숙박을 하는 승객, 흡혈귀 목격담, 철덕(철도 덕후)의 세계 등 흥미로운 ‘지하철 승객 백서‘가 열차처럼 이어진다.
날마다 승객 수천 명 틈에 놓여 있지만 기관사는 외롭다. 좀처럼 보이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들 어디론가 부지런히 가는데 그는 그곳에 남아 있다. 좋은 손님이든 나쁜 손님이든, 반가운 손님이든 껄끄러운 손님이든, 당신을 집으로 데려다 주기 위해 지하철과 기관사는 오늘도 어둡고 축축한 세계를 달린다.
아무튼, 주말입니다. ‘아무튼, 주말’을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 빠뜨린 기사 없는지 다시 한번 살펴주시고, 지난 일주일의 안 좋은 일 슬픈 일에 잠식당하지 마시고 훌훌 털어 버리시길. 주말이잖아요. 오늘도 ‘아무튼, 주말’을 애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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