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종 위기종 그린다… 슬픔으로 우리가 행동하길 바라며”
신안 그라피티 프로젝트
세계적 아티스트 ‘덜크’
“워메, 짱뚱어 입에서 호랑이가 튀어나오네!”
벽화 작업이 한창인 전남 신안 압해읍사무소를 한참 쳐다보던 주민이 희한하다는 듯 한마디 던지고 지나갔다. 짱뚱어와 호랑이 옆에 그려진 노랑부리저어새는 유니콘처럼 이마에 뿔이 솟아 있다. 호랑이의 꼬리가 된 두루미는 얼룩덜룩한 무늬를 뒤집어썼고, 쇠제비갈매기와 검은머리물떼새가 고라니 주변을 날아다닌다.
한반도에서 사라졌거나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들로 압해읍사무소 동쪽 벽을 가득 채우고 있던 사람은 스페인 아티스트 덜크(Dulk·41). 빙하처럼 녹아내리는 북극곰, 지느러미 옆에 동그란 표적이 붙은 상어 등 환경 파괴와 동물 멸종 위기를 초현실적인 화풍으로 담아낸 벽화를 지구촌 곳곳에 그려 명성을 얻었다. 세계 최대 과학·탐사·교육 지원기관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홍보대사로 선정하기도 했다.
지난 2일 벽화 작업 현장에서 덜크를 만났다. 그는 “날짜가 촉박한 데다 장맛비까지 내려서 작업할 시간이 부족하지만, 기한 안에 완성할 수 있을 것”이라며 싱긋 웃었다. 잠 자고 밥 먹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벽화에 몰두하고 있는 덜크는 “예술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고, 이 힘으로 긍정적 변화가 일어나도록 기여하는 것이 아티스트의 사회적 책임”이라고 했다.
◇먹고 잘 시간도 아껴 그린다
덜크는 서울에서 열리는 스트리트 아트 페스티벌 ‘어반 브레이크(Urban Break)’에 참가하기 위해 방한했다. 덜크와 함께 미국 대표 그라피티 아티스트 존원(JonOne), 벽을 정으로 쪼아서 이미지를 만드는 포르투갈 출신 빌스(Vhils) 등 어반 브레이크에 참가하는 세계적 아티스트들이 신안군이 추진하는 ‘그라피티 타운’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신안군 군청 소재지인 압해도(압해읍)를 세계 최초의 ‘그라피티 섬’으로 만들게 된다. 덜크를 시작으로 존원과 빌스의 벽화 작업이 어반 브레이크 기간(7월 11~14일) 전후로 압해읍에서 이뤄진다.
-이만한 벽화를 완성하려면 며칠이 걸리나요.
“이상적인 조건이라면 열흘 정도 필요해요. 10일까지는 마쳐야 해서 지난달 30일 인천공항에 내리자마자 신안으로 달려왔죠.”
-그런데 장마와 겹쳤네요.
“비가 내리지 않을 때 최대한 작업하고 있어요. 다행히 오늘은 하늘이 도와 새벽 5시부터 시작했습니다. 밥 먹을 시간도 아까워서 동네 빵집에서 빵 사다 놓고 틈틈이 끼니를 때워가며 작업하고 있어요. 어두워져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최대한 칠하려고요.”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한국, 게다가 남서쪽 끄트머리인 신안에서 벽화 작업을 하는 이유라면.
“한 번도 와보지 못한 한국이 궁금했어요. 특히 신안은 갯벌과 습지가 많고, 쌀농사가 잘되는 지역이라고 해 끌렸어요. 제 고향 스페인 발렌시아주(州)도 습지가 많고 쌀농사로 유명해요. 스페인을 대표하는 쌀 요리 ‘파에야’의 고향이죠.”
-벽화에 등장하는 짱뚱어와 한국 호랑이가 인상적입니다.
“오기 전 한반도의 자연과 야생동물을 조사했어요. 짱뚱어는 신안 갯벌에 흔한 물고기더라고요. 귀엽게 생겨서 특히 마음에 드는 친구예요. 호랑이는 한국을 상징하는 동물이지만 이제는 한반도에서 사라졌다고 들었어요. 호랑이가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렸지요. 벽화가 그려지는 지역의 주민들이 알아보고 친근감을 느낄 수 있는 동물, 그러면서 멸종 위기에 놓인 동물을 일관되게 그려왔어요.”
-실제 짱뚱어도 봤나요.
“아직 신안을 둘러볼 시간이 없었어요. 벽화 완성이 우선이라. 저는 벽화 그리려고 온 거니까요. 사람들은 ‘벽화 그린다며 지구 구석구석 여행하니 부럽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벽화 그리는 벽만 보고 돌아올 때가 많아요(웃음).”
-방한 기간에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의 미술 영재들과 함께 어반 브레이크에서 특별전도 연다고요.
“저는 조형물을 현장에서 칠하는 ‘라이브 페인팅’을 하고, 우크라이나 청소년 작가 둘은 각자 그린 멸종 위기 동물 그림을 전시합니다. 전쟁은 인간뿐 아니라 동물과 자연까지 파괴한다는 메시지를 담으려고 합니다.”
◇슬픔은 우리를 행동하게 한다
덜크는 자신의 작품을 “아름다운 악몽”이라고 표현한다. 초현실적 분위기에 화려한 색감이 아름답지만, 멸종 위기에 처한 ‘슬픈’ 동물을 주제로 삼기 때문이다.
-동물에 관심 갖게 된 건 아버지 영향이 컸더군요.
“집에 동물원에서 볼 법한 커다란 새장이 있어요. 아버지는 지금도 거기서 카나리아, 방울새 등을 400마리 넘게 키워요. 어렸을 땐 아버지와 새장에서 새들을 관찰하고 돌보면서 주말을 보냈어요. 동물 특히 새를 좋아하게 된 이유죠.”
-어려서부터 동물을 그렸나요.
“다섯 살 때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조류도감과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백과사전에 색연필과 크레파스로 새를 잔뜩 그렸어요.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는 제 소중한 보물들이죠(웃음). 그때부터 동물은 제가 가장 좋아하고 즐겨 그리는 주제입니다.”
-벽화를 하게 된 계기는?
“시작은 그라피티였어요. 대학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했고, 졸업 후 일러스트·그래픽 디자인으로 돈을 벌면서 제 개인 작업도 했어요. 친구와 함께 그라피티 작업을 하다가 차츰 발전해 지금과 같은 벽화 작업을 하게 됐죠.”
-과거 그라피티 작업과 현재 벽화는 다른가요.
“그라피티는 스프레이 페인트 등을 이용해 공공장소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자·흔적을 남기는 행위죠. 제 벽화는 공공장소에 그린다는 점에서 그라피티와 같지만, 범죄로 취급받는 그라피티와는 다른 ‘공공미술(public art)’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본명(안토니오 세구라) 대신 예명인 ‘덜크’를 쓰는 이유는?
“처음 그라피티를 할 때, 본명을 쓰려 했어요. 그런데 친구가 ‘그라피티에 어울리는 예명을 쓰라’고 하더군요. 과거에 함께 작업하다 사망한 그라피티 아티스트가 쓰던 예명을 물려받아 쓰면 어떻겠냐고 하길래, 아무 생각 없이 ‘그러지 뭐’ 했어요. 이후로 일러스트·그래픽디자인은 본명으로, 그라피티·벽화는 덜크로 활동했습니다. 벽화 작업이 유명해지면서 본명보다 예명으로 더 알려지게 됐지요.”
-멸종 위기 동물을 주제로 삼은 건 언제부터인가요.
“그라피티 작업을 시작하면서 사회적 책임을 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멸종 위기 동물을 주제로 하면 현재 지구와 인류의 가장 심각한 문제인 기후 위기, 생태계 파괴를 알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셔널 지오그래픽 아티스트는 어떻게 선정됐나요.
“내셔널 지오그래픽 탐사팀에 합류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어요. 생물학자를 비롯한 과학자, 사진작가, 비디오작가 등은 있었지만 미술을 전공한 아티스트는 없었죠. 탐사에 새로운 시각을 담아달라고 했습니다. 지난달 탐사팀의 일원으로 북극을 방문했고 많은 영감을 받았어요.”
-예술이 반드시 메시지를 담아야 할까요? 그저 아름답기만 해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예술은 사람의 마음에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힘이 있어요. 그 힘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요.”
-예술가로서 언제 가장 보람을 느끼나요.
“제 벽화를 보고 찾아와 ‘당신의 벽화를 보고 눈물이 났다’며 감사하는 분이 있었어요. 정말 뿌듯했지요.”
-빙하처럼 녹아 내리는 북극곰처럼, 당신의 작품은 화려하고 화사하지만 어딘가 슬픈 구석이 있어요.
“기쁨은 우리를 사고하게 하지 않아요. 반면 슬픔은 우리에게 생각할 기회를 줍니다. 멈춰 서게도 하고요. 잘못됐다고 느끼는 상황이나 문제를 고치도록 행동하게 한다는 점에서 슬픔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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