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이 지나도록 사라지지 않는 ‘고종 독살’ 괴담[박종인의 ‘흔적’]
105년 전 유인물 한 장
1919년 3월 1일 서울 시내에 유인물이 유포됐다. ‘국민회의’ 명의로 살포된 유인물에는 ‘이완용으로 하여금 윤덕영, 한상학이 궁녀들을 끌어들여 고종을 독이 든 식혜로 죽였다’고 적혀 있었다. 이완용과 김윤식, 윤택영, 조중응과 송병준, 신흥우가 파리강화회의에 독립 불원서(不願書)를 제출하려 하는데 고종이 문서에 도장을 찍어주지 않아 죽였다는 것이다(‘국민회보’. 윤소영, ‘3.1운동 100주년 총서’2, 휴머니스트, 2019, pp.23~25, 재인용). ‘문제는 그날 밤 고종의 병세가 깊다면서 숙직시킨 인물들이 자작 이완용과 이기용(李埼鎔)이란 점이다. 이완용 등이 두 나인에게 독약 탄 식혜를 올려 독살했는데 그 두 명도 입을 막기 위해 살해했다는 것이다.’(이덕일, 2011년 11월 6일 ‘중앙일보’)
그리하여 ‘이 변고가 전파되니 경성에 수십 만 군중이 모여서 독립의 사상을 고무하는 일대 비풍(悲風)이 되었다.’(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한일관계사료집’4, 독립운동의 사건) 그뿐만 아니었다.
‘매국적신들이 일본에의 병속을 자원하며 독립을 원하지 않는다는 거짓 민의를 조작하고 있는데 그중에는 유림을 대표하여 김윤식도 들어 있으니 유림들이 따로 강화회의에 글을 보내 진정한 우리 뜻을 전하고자 한다’(김황, ‘기파리소서사(記巴里愬書事)’, ‘중재선생문집’13. 허선도, ‘삼일운동과 유교계’, 삼일운동 50주년 기념논집, 동아일보사, 1969, p292, 재인용)
1919년 3·1운동에 대한 몇몇 기록이다. ‘독립 불원서’라는 문서에서 시작된 갈등이 고종 독살을 불러왔고, 임시정부는 이 사건이 3·1운동의 기폭제가 됐다고 평가했다는 것이다.
괴담의 생명력
역사는 때때로 예정되지 않은 사건이 흐름을 바꾸기도 한다. 소위 ‘가짜 뉴스’ 혹은 ‘괴담’도 물줄기를 바꾸는 역할을 한다. 지난달 10일 전남 화순군 능주면 능주초등학교에 있는 정율성 벽화가 철거됐다. 중국 군가를 작곡하고 6·25전쟁 때 북한군으로 참전해 북한 군가들을 작곡한 사람이다. 서울 한강대교에 서울시가 설치했던 ‘한강인도교 폭파 현장’ 동판도 교체됐다. 2016년 박원순 시장 때 설치했던 동판에는 ‘정부의 일방적인 교량 폭파로 피란민 800여 명 사망’이라고 새겨져 있었는데, 새 동판 문구는 ‘군중 500~800명의 인명 피해 추정’으로 바뀌었다. 나라를 분열시켰던 굵직굵직한 왜곡 사례들이 이제 제자리로 돌아가는 중이다.
괴담은 생명력이 강하다.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대표적인 사례가 고종 독살설이다. 앞에 소개한 3·1운동 직전 상황을 읽어보면 ‘독살당한 옛 군주’ 스토리는 참으로 드라마틱하고 격정적이다. 임정 평가처럼 고종 독살설은 민족을 단결시키고 항일정신을 분출시키는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설(說)’에 불과하다. 고종은 독살당하지 않았다. ‘독립 불원서’라는 문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완용은 고종 사망 당일 숙직한 사실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년이 지난 지금도 이 괴담은 각종 대중매체를 통해 사실인 양 떠도는 중이다.
영친왕 혼례식과 고종의 죽음
1918년 12월 영친왕과 일본 황족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 혼례 날짜가 결정됐다. 날짜는 1919년 1월 25일이었다(1918년 12월 7일 ‘매일신보’). 1919년 1월 14일 조선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결혼식 준비를 위해 일본으로 떠났다. 같은 날 이왕직 장관 민병석, 찬사 윤덕영, 찬사 조민희가 일본으로 떠났다(1919년 1월 14일 ‘순종실록부록’). 17일 이왕직 차관 고쿠분 쇼타로(國分象太郎)도 출국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이완용을 비롯해 송병준, 윤택영, 조동윤, 민영찬 같은 조선 귀족들도 속속 출국했다. 조선총독부 2인자인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사부로(山縣伊三郎)는 와병 중이었다. 조선군 사령관 우쓰노미야 다로(宇都宮太郎)는 지방 순시 중이어서 출국하지 못했다(이승엽, ‘이태왕(고종) 독살설의 검토’, 二十世紀研究10, 교토대 21세기연구편집위원회, 2009). 총독부와 이왕직이 텅 비었다. 결혼식을 닷새 앞둔 1월 20일 저녁 고종이 몸에 탈이 났다. 왕실 주치의 김영배와 총독부 의원장 하가 에이지로가 고종을 진찰하고 돌아갔다(1919년 1월 20일 ‘순종실록부록’). 다음 날인 1월 21일 새벽 고종이 죽었다. 정확한 시각은 오전 6시 35분이었다.
미숙했던 조선총독부
조·일 양국은 대혼란에 빠졌다. 총독부터 친일 귀족까지 자리를 비운 조선은 더 큰 혼란에 빠졌다. 허둥대던 이왕직은 1월 21일 오후 1시 고종이 오전 6시 35분 ‘중태’에 빠졌다고 발표했다. 총독부와 이왕직 수뇌부가 없는 상황에서 고종 사망 사실이나 영친왕 결혼식에 관한 방침을 정하지 못하고 시간을 벌려는 조치였다(이승엽, 앞 논문).
일본에 있던 조선 귀족들은 소식을 접하자마자 속속 귀국했다. 총독 하세가와는 일본 궁내성과 협의해 영친왕 결혼식을 무기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하루가 지난 1월 22일 오전 8시 이왕직은 ‘중태에 빠졌던 이태왕이 22일 오전 6시 죽었다[薨去·훙거]’고 발표했다.
이 미숙한 초기 대응이 고종이 독살됐다는 괴담의 첫 번째 원인이었다. 이미 21일 오전부터 고종이 죽었다는 소문이 서울에 퍼지고 있었다. 이날 아침 소식을 접한 윤치호는 ‘왕세자 결혼식이 임박해 있기 때문에 잠시 비밀로 한 듯하다’고 일기에 기록했다(1919년 1월 21일 ‘윤치호일기’).
파리강화회의와 민족자결주의
한 해 전인 1918년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약소국 미래는 각 민족이 알아서 결정한다는 민족자결주의를 선언했다. 이 원칙은 1차 세계대전 패전국 치하 식민지 처리 방안 가운데 하나였다. 일본이 소속된 연합국 식민지는 해당이 되지 않는 냉혹한 원칙이었다.
조선 독립운동가들은 이를 조선에도 해당하는 선언으로 받아들였다. 1919년 1월 프랑스 파리에서 파리강화회의 개최가 결정됐다. 독립운동가들은 독립을 청원하는 대표단 파견을 결정했다. 하지만 아무도 참석은 허용되지 않았다.
1919년 1월 6일 재일유학생 단체인 조선유학생학우회가 독립 청원 운동을 결정했다. 이들과 연계한 국내 지도자들도 거사를 계획했다. 그러던 와중에 고종이 죽었다. 2월 8일 재일 조선인들이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고종이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돌아다녔다. 조선 팔도에 항일 감정과 적개심, 망국의 설움이 극도로 증폭됐다. 조선 지도자들은 고종 장례일인 3월 1일 거사를 계획했다.
거사 당일 그때까지 소문을 종합한 ‘국민회보’ 유인물이 도처에 깔렸다. 임정이 평가한 대로, ‘독살당한 옛 임금’은 식민지 전락 9년 만에 조선 민중을 극적으로 결집시켰다. 여기까지가 3·1운동까지 전사(前史)다.
괴담1 숙직한 이완용이 독살 지휘?
거짓말이다. 덕수궁과 창덕궁 당직실에서 작성한 ‘찬시실일기’에 기록된 당직자는 ‘자작 이완용’과 ‘자작 이기용’이다. 그런데 이 ‘자작 이완용(李完鎔)’은 우리가 아는 후작 이완용(李完用)이 아니다. 한자 이름이 다른 동명이인이다.
그런데 재야사학자 이덕일씨는 중앙일보 기고문은 물론 단행본에 ‘숙직시킨 인물들이 자작 이완용과 이기용(李埼鎔)’이라며 이완용의 한자 이름을 은폐했다(이덕일, ‘조선 왕을 말하다’2, 역사의 아침, 2010, p463). 이완용은 영친왕 결혼식 참석을 위해 일본에 있었다.
식혜를 먹인 궁녀들이 의문사했다는 주장도 괴담이다. 당시 궁녀 두 사람이 죽었다. 고종에게 음식을 올릴 위치가 아니었다. 안동별궁 침방 궁녀 김춘형(79)은 감기를 앓다가 1월 23일 죽었다. 덕수궁 잡역 궁녀 박완기(62)는 폐결핵을 앓다가 2월 2일 죽었다(1919년 3월 15일 ‘매일신보’).
고종 시신이 (독살당한 것처럼) 부풀어 올랐고 이가 빠져 있었다는 목격담도 있다(1920년 10월 3일 ‘윤치호일기’). 이는 사망 후 사흘 넘도록 온돌방에 안치된 시신에 발생하는 자연 현상이다.
괴담2 ‘독립 불원서’를 거부해 독살?
‘독립불원서’라는 문서 서명을 고종이 거부했다는 주장 또한 거짓말이다. 당시 전국 유림들은 이 문서에 유림 대표 김윤식이 서명한 사실에 격분해 ‘파리장서’ 운동을 벌였다. 그런데 그 문서 자체가 괴담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 문서를 봤거나 읽은 사람이 없다.
김윤식은 현재 친일파로 분류돼 있다. 총독부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았다. 김윤식은 동료 유학자 이용직과 함께 3월 26일 일본 ‘도쿄아사히신문’과 ‘시사신문’, 조선의 ‘경성일보’와 ‘매일신보’에 ‘독립청원서’를 발송했다. 독립 ‘청원서’다.
“나는 합병 때도 극력 반대하였으나 앞서서 찬성한 것으로 오인돼 매국노라 불리워 면목이 없던 차였다. 내가 독립불원서에 서명했다는 소문을 듣고서 어떻게 심사가 사나웠던지 공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김윤식, 이용직 판결문’,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원문사료실 독립운동사자료집) 두 사람은 이 일로 체포돼 징역형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귀족 작위도 박탈당했다(1919년 7월 28일 ‘총독부관보’).
괴담3 ‘소문’과 왜곡
독살설은 독립운동 세력을 결집시키는 엄청난 결과를 만들어냈다. 그렇다고 이를 사실이라고 주장하면 ‘광우병 괴담은 사실’이라는 주장과 똑같다. 그런데 21세기에도 고종이 독살됐다는 주장이 떠돈다. 2009년 전 국사편찬위원장 이태진씨는 ‘독살 풍설(風說)’을 메모한 일본 궁내성 관리 일기장을 근거로 ‘데라우치와 하세가와가 독살을 지시했다’고 단정했다(이태진, ‘고종황제의 독살과 일본정부 수뇌부’, 역사학보 204, 역사학회, 2009; ‘끝나지 않은 역사’, 태학사, 2017, p244). 그해 KBS는 이 논문을 토대로 ‘고종 황제, 그 죽음의 진실’이라는 광복절 특집 ‘역사스페셜’을 통해 고종이 독살됐다고 주장했다.
재야사학자 이덕일씨는 동명이인 이완용을 끄집어내 ‘이완용 지시 독살’을 주장했다. 서울 운현궁 홈페이지는 ‘이완용이 숙직을 하면서 나인을 시켜 고종에게 식혜를 올렸다’고 소개하고 있다. 지난달에는 역사 관련 저술 및 강연가로 알려진 썬킴이라는 방송인이 예능 프로그램에서 ‘고종 황제 승하 당시 당직 담당은 이완용’이라고 주장했다(2024년 6월 18일 E채널 ‘설록: 네 가지 진실: 고종황제의 죽음, 그 숨겨진 진실!’). 사료를 훑어보면 사실이 보인다. 괴담의 근원은 1919년 3월 1일 뿌려진 전단지뿐이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