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에 분홍·초록색 선 개발자... “국회의원 100명보다 낫다”
노면 색깔 유도선
개발자 윤석덕
“누가 고안했는지 국회의원 100명보다 낫다” “사람 목숨 구한 그 개발자가 영웅이다”….
도로에 분홍색과 초록색 선을 그었을 뿐인데 이런 호평이 쏟아진다. 2011년에 처음 등장한 ‘노면 색깔 유도선’. 고속도로 분기점에서 방향이 헷갈릴 때 이 선을 따라가면 쉽고 안전하게 빠져나갈 수 있다. 더 놀라운 것은 교통사고도 급감했다는 사실. 색깔 유도선은 그동안 전국 고속도로에 약 1000개가 설치됐고 복잡한 도심 교차로에서도 만날 수 있다.
7월 7일은 경부고속도로 개통(1970년 7월 7일)을 기념하는 도로의 날. 색깔 유도선을 개발한 한국도로공사 윤석덕 차장은 아프리카 남동부 인도양의 섬나라 모리셔스에서 파견 근무 중이라고 했다. 교통 혼잡 완화를 위한 해외 용역 사업에서 프로젝트 매니저를 맡고 있다. 윤 차장은 지난 5월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다. ‘도로 위의 콜럼버스’라는 별명이 붙은 그를 이메일과 전화로 인터뷰했다.
◇도로에 색칠을 하면 되잖아!
혁신의 계기는 2011년 3월 군포지사에서 일할 때 안산분기점에서 발생한 교통사고였다. 하이패스 차로를 통과한 승용차와 축중기 차로를 통과한 화물차가 짧은 구간에서 인천 방향과 강릉 방향을 다투다 화물차가 콘크리트 벽체에 충돌하는 사망 사고가 일어났다. 군포지사장이 상황실로 그를 호출해 사고 화면(CCTV)을 보면서 “초등학생(초보자)도 쉽게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대책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아이디어가 금방 떠올랐나요?
“표지판 더 달고, 깜빡등 달고, 경찰 경광등 더 달고…. 그동안 해오던 대책들밖에 떠오르지 않았어요. 사망 사고가 났으니 도로시설물을 미비하게 설치한 내 잘못 아닐까 하는 먹먹한 기분으로 귀가했습니다. 8살 딸과 4살 아들이 거실에서 물감과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어요. 문득 ‘도로에 색칠을 하면 어떨까?’ 하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하게 된 거예요.”
-유레카의 순간이군요. 저도 운전하다 색깔 유도선의 도움을 종종 받습니다. 그런데 왜 분홍색(우회전)과 초록색(좌회전)이었습니까.
“초록색은 쉽게 골랐는데 나머지 색 하나가 문제였어요. 분홍색을 생각했다가 정신에 좀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보일까 봐 주황색으로 바꿨죠. 주황색은 중앙선이나 ‘금지’의 의미로 사용되던 색이었어요. 시설물유지관리 소장님이 ‘튀려면 분홍색으로 밀고 나가라’고 충고해 주었습니다. 사고 당시 승용차는 여성이, 화물차는 남성이 운전하고 있었어요. 인천 방향은 우회전, 강릉 방향은 좌회전이었기 때문에 현재의 콘셉트는 그 현장을 그대로 적용한 것이고요.”
-만류하는 분이 많았다고요?
“도로 교통 전문가, 회사 동료 등을 붙잡고 의견을 물었어요. ‘도로에는 법으로 정해진 색깔이 있는데 다른 색을 칠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다’ ‘사고가 발생하면 당신이 책임질 수 있느냐’ ‘손해도 배상해야 할 텐데 모험하지 마라’며 반대했어요. 그러나 저는 이걸 설치하면 사고가 감소하고 차로 변경 하느라 우물쭈물하는 시간도 줄어 교통 정체 해소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저라면 포기했을 수도 있는데 어떻게 그 상황을 돌파했습니까?
“추진할 동력을 상실할 때쯤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인천경찰청 제11지구대에 전화했습니다. 해당 고속도로에서 발생한 사고는 한국도로공사와 인천경찰청 제11지구대에 책임이 있었어요. 임용훈 경사(현재 경감)가 제 얘기를 듣더니 “아주 좋은 아이디어다.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뭣인들 못 하겠나” 하셨습니다.”
◇교통사고 27% 감소
첫 색깔 유도선은 경찰청 승인을 받아 그해 5월 3일 안산분기점에 설치됐다. 위험을 무릅쓰고 아이디어를 행동으로 옮긴 것이다. 그는 “도색 롤러로 수작업을 해야 해 시간이 많이 걸렸고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고 술회했다.
-그날 솔직히 어떤 기분이었나요.
“유독 차량이 많은 날이었어요. 항의 전화를 하도 받다 보니 얼이 반쯤 나갔습니다. ‘그럼 도색을 중단할까?’ 묻는데 욕을 많이 먹은 게 억울해서 ‘끝까지 칠하라’고 했어요. 설치하고 나면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으로 기대하면서.”
-색깔 유도선 도입 후 사고가 얼마나 줄었습니까?
“안산분기점 구간은 유도선 설치 전에 연간 25건 발생하던 사고가 이후에는 3건으로 급감했어요. 그 3건도 장마철에 시야가 안 좋을 때 발생한 사고였고요. 2011~2014년 설치한 유도선의 효과에 대해 한국도로공사는 분기점 40%, 나들목 22% 등 사고가 평균 27% 줄었다고 분석했습니다.”
-세계 최초의 색깔 유도선은 2008년 일본이 센다이 아라마치 교차로에 설치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만.
“제가 할 말이 많습니다. ‘양심에 손을 얹고 반성해라’ ‘일본 것을 벤치마킹했다고 하면 어디가 덧나냐’ 등 안티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자료를 찾아봤습니다. 2015년 국토교통부가 발간한 ‘고령자를 위한 도로 설계 가이드라인 연구’에 나오는데, 포장 면 전체를 빨간색과 하늘색으로 포장했고 설치한 연장도 길지 않습니다. 저의 색깔 유도선은 45cm 폭으로 차선 도색을 1~2km 이상 하고 있어요. 일본엔 가본 적이 없고 일본어를 읽지도 못합니다.”
-많이 억울하셨군요.
“버스 전용 차선(서울 톨게이트~회덕 등)을 파란색으로 칠한 지 20년이 넘어요. 하이패스 차로에 하늘색을 칠한 건 15년이 넘고요. 그러면 일본이 한국을 베낀 걸까요? 아니면 버스 전용 차선이나 하이패스 차선도 일본을 베낀 걸까요? 저는 하이패스 차로에 있던 하늘색 콘셉트와 형태를 색깔과 위치를 바꾸어 분기점에 응용한 것입니다. 대학 시절 축제 기간엔 선배들을 위해 전철역부터 행사장까지 발자국 모양 스티커를 3~5m간격으로 2km 정도 바닥에 붙였어요. 그것도 색깔유도선과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색깔 유도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어떤 대가를 치러야 했을까요?
“사고 나서 피해 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내 가족이나 친구 중 누군가가 사고를 당할 수도 있고요. 저는 지금 모리셔스에 색깔 유도선을 설치하려고 만방으로 뛰고 있는 중입니다. 이 나라는 13년 전 대한민국보다 유연성이 없어 답답해요. 한국의 혁신적 사례라고 해도 ‘법에 없고 선진국에나 하는 것’이랍니다.”
◇페인트로 인명을 구하다니
중국 명의(名醫) 화타 아시나요? 윤석덕 차장이 반문했다. 화타는 못 고치는 병이 없었다. 그런데 화타의 형은 병이 나기 전에 식품이든 비방이든 권유해 병을 예방했다. “누가 돈을 많이 벌었을까요? 당연히 화타겠지요. 색깔 유도선이 화타의 형과 닮았다고 생각해요.”
-무슨 뜻입니까.
“사고가 나기 전에 예방을 하니까 사고가 나서 사회적으로 지불해야 하는 비용을 절감하는데, 이게 좀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니까요. 이렇게 어떤 선행은 사람들이 비용을 치를 때만 알게 됩니다.”
-한국도로공사는 2014년 유도선을 공식 인정했고 2021년에 도로교통법도 개정됐습니다.
“색깔 유도선이 판교분기점, 호법분기점, 낙동분기점, 안성분기점 등에 설치될 때 저는 내심 불안했어요. 여전히 불법이었거든요. 2014년 한국도로공사가 내부 방침으로 공식 인정하면서 안도했습니다. 2017년 국토부가 ‘노면 색깔 유도선 설치 매뉴얼’을 발간했고 2021년 법제화 되면서 10년 넘는 제 마음고생도 끝났지요. 홍익인간을 실천한 것 같아 기뻤습니다.”
-비용은 크게 들지 않으면서 교통사고를 줄이고 인명을 구할 수 있으니 획기적인 발명품입니다.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거둘 때 혁신이라고 생각해요. 정말 페인트로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다는 게 지금도 믿기지 않아요. 행안부에서 국민훈장까지 받았으니 가문의 영광이죠.”
-운전하다 유도선을 보는 기분은 어떤가요.
“아, 정말 내 작품(내 새끼)들이 나를 반겨 주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13년 전을 떠올리면 감회가 새롭고 눈가가 촉촉해집니다(웃음).”
-몇 년 전 ‘유퀴즈’에도 출연하셨는데.
“아내와 아이들에게 자랑스러운 가장이 됐습니다. 매일 야근에 진급 공부, 쓸데없는 일만 하는 섭섭한 남편이자 아빠였거든요. 이제 집에 가면 ‘연예인 오셨습니까?’ 소리도 듣습니다. 하하.”
◇칭찬은 도도새도 날게 한다
‘도로 위의 스티브 잡스’ ‘색깔 유도선의 아버지’ 같은 별명이 붙었다. “색깔 유도선은 콜럼버스의 달걀과 같아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규칙에 얽매여 알을 깨는 방법을 몰랐던 것이니까요. 제가 좋아하는 별명은 ‘도로 위의 콜럼버스’예요(웃음).”
-최고의 칭찬이나 격려라면?
“길치들에겐 축복과 같다는 말이 듣기 좋았어요.”
-색깔 유도선 기사에 “국회의원 100명보다 낫다” “이 아이디어 낸 사람 상 줘야 한다” 같은 댓글이 달렸더군요.
“많은 사람이 효과를 보고 있다는 뜻이니 뿌듯해요. 도도새 아시나요? 멸종되긴 했지만 모리셔스섬엔 날개가 퇴화해 날 수 없는 도도새가 살았습니다. 아직 살아 있다면 칭찬은 아마 도도새도 날게 했을 겁니다(웃음).”
-어딘가에서 편견이나 고정관념의 벽에 부닥친 발명가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라면.
“베스트셀러 ‘총, 균, 쇠’에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필요가 발명의 어머니가 아니라 발명이 필요의 어머니다.’ 발명을 해놓으면 쓰임새가 생긴다는 뜻입니다. 좀 시간이 걸리더라도 언젠가 소비자가 찾을 날이 올 테니 절대 좌절하지 마세요.”
-돈키호테적인 성격인가요?
“네, 풍차와 싸울 만반의 준비가 돼 있어요. 한국에서 22시간 걸리는 모리셔스에 온 것도 만만치 않은 결정이었습니다.”
-퇴직 전 또 해결하고 싶은 게 있다면.
“겨울철 도로에서 생기는 피해를 줄이고 싶어요. 블랙아이스(살얼음) 문제를 붙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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