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라 부르면, 잘못된 시스템에 면죄부 준다
100년간 벌어진 ‘사고의 역사’ 추적
사고는 없다
제시 싱어 지음 | 김승진 옮김 | 위즈덤하우스 | 456쪽 | 2만3000원
비극이 끊이질 않는다. 지난 1일 서울시청 앞 역주행 사고로 시민 9명이 숨졌다. 앞서 지난달 24일 경기 화성 리튬 공장에서 발생한 화재 사고로 23명의 근로자가 숨졌다. 한국 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사고를 일일이 나열하자면 숨이 찰 정도다.
정말 사고였을까? ‘사고는 없다(원제 There Are No Accidents)’는 교통사고부터 산업재해, 재난 참사까지 다양한 종류의 ‘사고’와 지난 한 세기 동안 벌어진 ‘사고’의 역사를 추적한다. 과실·조건·위험·규모·낙인·인종주의·돈·비난·예방·책무성이라는 10가지 키워드를 통해 ‘사고’를 들여다본다.
◇위험한 조건이 문제다
미국 저널리스트인 저자 제시 싱어는 ‘사고’라는 표현을 쓰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많은 사건이 ‘사고’라는 말로 뭉뚱그려진다는 것. 위험한 시스템에 면죄부를 주고, 취약한 사람들이 더 큰 피해로 내몰리게 된다고 지적한다. 싱어는 평소에는 ‘사고’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고 한다. ‘사고’로 인한 죽음이나 손상이 “우발적으로 일어나며 예견되거나 예방될 수 없다는 잘못된 암시를 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책은 이런 예시를 든다. 물이 흥건하게 고여 있는 바닥에서 미끄러진다면? 나의 부주의 탓도 있지만, 바닥에 물이 고여 있지 않았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제한속도를 위반하는 것은 과실이지만, 과속을 하기 좋게 설계된 도로는 위험한 조건이다. 즉 인간의 과실이 개입되지 않는 사고는 거의 없다. 하지만 위험한 조건이 과실을 유발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권력자들이 사고를 유발할 수 있는 환경을 고치기보다 인적 과실을 탓하는 서사를 유포해왔다고 말한다. 교통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안전장치 도입에 드는 비용을 부담하지 않으려던 자동차 제조사들은 ‘무단횡단자’와 ‘운전석의 미치광이’라는 프레임을 만들어 퍼뜨린다.
◇사고는 불평등하다
사고에는 계급적·인종적 편향이 존재한다. 가난하거나 백인이 아니라면 사고를 겪을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예컨대 흑인의 사고 사망률은 백인보다 93% 더 높다. “흑인은 길을 건너다 딱지를 떼일 가능성이 더 크고, 길에서 사망할 경우 가해자가 처벌될 가능성이 더 낮으며, 길에서 사망할 가능성도 더 크다.” 최근 아리셀 공장 화재로 사망한 근로자 23명 중 18명이 이주노동자인 점도 비슷한 맥락이다.
1991년 9월 미 노스캐롤라이나주 임페리얼푸드 공장에서 불이 났다. 유압액이 호스에서 누출돼 튀김 기계에 불이 붙었다. 공장 내부는 환기가 거의 되지 않았고 스프링클러도 작동하지 않았다. 이 화재로 근로자 25명이 사망했다. 사망자 대부분이 흑인 여성이었다. 브라이트 사이먼 템플대 역사학과 교수는 ‘사회적 부검’을 시도한다. 공장은 규제를 피하고, 위험한 노동 조건에 저항할 힘이 약한 근로자를 고용하기 위해 가난한 흑인들이 사는 지역에 세워진 것으로 밝혀졌다. 시스템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에 무게가 실린다.
◇사고에 제대로 책임 물어야
전미안전위원회 통계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24명 중 1명이 사고로 죽는다. 그런데도 미국 정부는 사고 예방보다 질병 예방 연구에 더 많은 예산을 투입한다. 저자는 그 무심함을 꼬집는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피할 수 있는, 예측 가능한 참사를 피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사고가 발생했을 때 과실에 집중하기보다 그것을 둘러싼 환경과 구조를 조사해야 한다. 책임을 제대로 묻는 것도 중요하다. 단, 사고 자체에 대한 처벌보다 이를 예방할 수 있는 대책 마련에 힘을 쏟아야 한다. 대책을 마련할 때는 사고로 가장 많이 죽고, 가장 큰 피해를 볼 취약한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춰야 한다. 정부나 기업의 잘못된 판단에 따라 발생한 사고의 사회적 비용을 시민이 떠안아서는 안 된다.
저자는 말한다. “‘그건 사고였어요’라는 말이 들리면 이를 경고음으로 여기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는 계기로 삼자. 어떻게 된 것인가? 왜 그런 것인가?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나? 또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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