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스릴 이, 터럭 발... 사라져가는 이발소
[박준의 마음 쓰기] (7)
점점 사라져가는 우리 곁 풍경 중 하나, 바로 이발소입니다. 인류의 긴 시간을 생각하면 이발소는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닙니다. 중세 유럽에서는 외과 의사가 치과는 물론 이발과 면도까지 겸했습니다. 희고 붉고 푸른 세 개의 줄이 나선으로 그어진 원기둥은 애당초 이발소가 아니라 ‘병원’ 표지였던 것입니다. 흰 선은 붕대, 붉은 선은 동맥, 푸른 선은 정맥을 상징합니다. 프랑스혁명 이후인 1804년 장 바버(Jean Barber)라는 사람이 처음 의료가 아닌 미용만을 전문으로 하는 업소를 열게 됩니다. 이발소를 뜻하는 영 단어 ‘Barbershop’의 유래도 여기서 비롯됩니다.
우리나라에 이발소가 생긴 건 이로부터 약 100년이 지난 후입니다. 1895년 고종은 ‘짐(朕)이 머리를 깎아 신하와 백성들에게 우선하니 너희들 대중은 짐의 뜻을 잘 새겨서 만국(萬國)과 대등하게 서는 대업을 이룩하게 하라’는 고지와 함께 단발령을 내리지만 유생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힙니다. 그러다 1900년 2차 단발령이 시행되면서 상투를 틀고 망건을 두르고 갓을 쓰는 전통은 서서히 사라졌고 하나둘 이발소가 생겼습니다.
이발소는 제 어린 기억에도 또렷이 남아 있습니다. 동네 이발소에는 으레 남성용 스킨과 염색약 그리고 포마드의 향기가 한데 섞여 있었습니다. 저처럼 키가 작은 아이들은 이발소 의자 팔걸이 사이에 올려둔 널빤지 위에 앉아야 했습니다. 규칙적으로 가위가 서걱이는 소리, 시원하면서도 서늘한 감각, 그러다 어느 순간 졸음이 오면 꾸지람을 듣기도 했습니다.
저는 자연스레 이발소 대신 미용실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스포츠 머리 혹은 상고머리로 해주세요”라고 말해야 했던 이발소와는 달리 패션 잡지를 넘기며 마음에 드는 스타일을 고를 수 있다는 게 무엇보다 좋았습니다. 그렇다고 잡지 속 모델처럼 근사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스물이 되면서는 머리카락을 노랗게 염색했습니다. 탈색과 파마도 여러 번 해보았습니다.
물론 미용실에서만 머리 모양에 신경을 썼던 것은 아닙니다. 외출하기 전이면 으레 새로 샴푸를 하고 드라이어로 말리며 모양을 만든 후 헤어 왁스나 스프레이로 고정했습니다. 몸을 빨리 놀려도 족히 30분은 걸리는 과정.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어느 시기부터 이런 일을 그만하게 되었습니다. 머리를 감고 말린 다음 빗을 두어 번 스치는 게 전부입니다. 모발이나 두피와 관련된 제품을 사용하는 법도 없습니다. 잘 보이고 싶은 누군가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다만 날로 바빠지는 삶에서 조금이라도 시간을 아끼기 위함이었습니다. 혹은 아무리 노력해도 좀처럼 가지런해지지 않는 머릿속의 일들 탓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미용실을 찾는 빈도가 줄었고 단골 미용실도 잃은 지 오래입니다.
이런 제게 최근 하나의 변화가 생겼습니다. 최대한 자주 이발을 하는 것입니다. 앞선 일과 다음 일 사이, 사오십 분 정도의 여유가 생기면 카페에 가서 시간을 보내는 대신 눈앞에 보이는 이발소나 미용실에 갑니다. 오래돼 보이는 간판을 내건 곳일수록 반갑습니다. 세상 모든 노포에는 저마다의 매력과 비결이 있는 법이니까요. 대부분 값도 저렴합니다. 어쩌다 어울리지 않게 머리가 다듬어질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머리카락은 매일매일 자라는 것이니 다시 하면 된다고 편히 생각합니다. 다스릴 이(理)에 터럭 발(髮). 길고 굵게 자라나는 마음들까지 함께 다스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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