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프레소] ‘84제곱미터’의 지옥

정상혁 기자 2024. 7. 6.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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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질적 병폐 층간 소음 심각
법·제도 실효성 아직도 미미
주민끼리 잔혹 범죄 잇따라
언제까지 쿵쿵 가슴 쳐야하나

세계로 뻗어나가는 처절한 고통. 지금 넷플릭스는 영화 ‘84제곱미터’ 촬영에 한창이다. 적금·주식·대출에 모친 마늘밭까지 팔아 내 집 마련에 성공한 30대 주인공. 국민 평형, 전용 84㎡짜리 보금자리는 금세 지옥으로 변모한다. 층간 소음 때문이다. 추적과 갈등, 이제 주민은 적(敵)이다. 이 짧은 줄거리에 공포·스릴러·액션·다큐가 망라돼있다. 층간 소음을 소재로 제작 중인 또 다른 K호러 영화 ‘노이즈’는 최근 프랑스·태국 등 69국과 배급 계약을 체결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 했던가.

층간 소음은 영화적 조건을 모두 갖춘 한국식 서스펜스의 총체다. 좁아터진 땅, 다세대의 삶. 믿기 힘든 스토리가 도처에 널렸다. 영화 ‘파묘’는 한 무덤에 관짝 두 개가 묻힌 첩장(疊葬)을 다룬 허무맹랑한 오컬트지만, 이동진 영화평론가는 “결국 층간 소음에 대한 이야기”로 결론 내린다. 토크쇼에서 농담조로 언급한 것이기는 하나, 좁은 집에서 수십 년 꼼짝없이 위아래 더부살이해야 한다면 시체라도 열받을 것이다. 원한을 품을 만하다.

실화는 그러나 훨씬 끔찍하다. 반전이 없기 때문이다. 다툼은 여지없이 새드 엔딩으로 끝난다. 층간 소음 시비 끝에 윗집 주민을 1시간 가까이 160회 이상 때려 숨지게 한 전직 씨름 선수, 아랫집 주민이 소음에 항의 방문하자 액막이용 흉기로 살해한 윗집 무속인…. 층간 소음 관련 5대 강력 범죄가 2016년 11건에서 2021년 110건으로 10배 늘었다고 한다. 얇은 벽으로 서로의 가계를 지탱하는, 허접하고 값비싼 아파트에서 애꿎은 주민끼리 죽이고 죽는다. “이게 집이냐”는 절규가 메아리친다.

시달려도 뾰족한 방법이 없다. '고요'라는 개인의 행복추구권은 매일밤 저지된다. 아무리 호소해도 바뀌는 게 없으니, 울분을 견디며 잠드는 수 밖에.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 1일 ‘층간소음 분쟁조정위원회 운영실태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지난 10년간 갈등 조정 신청 건수는 중앙 환경분쟁조정위(환경부)가 연평균 2건, 중앙 공동주택관리 분쟁조정위(국토부)가 20건 수준이었다. 소음 측정 등을 담당하는 ‘층간 소음 이웃사이센터’ 민원만 매년 3만~4만 건인데, 분쟁조정위에서 다뤄지는 건 극소수라 유명무실하다는 지적. 지방 분쟁조정위의 경우 지금껏 단 한 건의 갈등도 처리한 적 없는 곳이 여럿이었다. 소음 신고가 세 차례 이상 반복되면 ‘퇴거’ 조치가 가능한 미국 뉴욕처럼 강제성이 있지도 않다. 경실련은 “실효성 강화 대책과 법적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시급한 일이다.

같은 면적, 같은 구조, 같은 고통. ‘국민 평형’이라는 말에는 생활의 동질성이 내포돼있다. 그러나 층간 소음은 대개 수직의 문제이고, 계급의 문제를 드러낸다. 소설가 황정은의 단편 ‘누가’에서 소음에 질려버린 주인공은 넋두리한다. “이웃의 취향으로부터 차단될 방법이 없다는 거. 계급이란 이런 거였고 나는 이런 계급이었어.” 이를테면 의원님들 위층에서 감히 마늘을 빻거나 발망치를 찍으며 돌아다닐 간 큰 주민은 없을 것이다. 층간 소음은 늘 소시민의 애환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명백한 참사지만, 늘 개별의 비극이기에 결코 특별법은 발의되지 않는다.

몇 가지 개선책이 나오기는 했다. 신축 시 바닥을 더 두껍게 시공하는 건설사에 인센티브를 주거나, 요건에 미달하면 준공 허가를 안 내주는 식이다. 이달 17일부터는 ‘바닥 충격음 성능 검사’ 결과를 건설사가 입주 예정자에게 의무 통지해야 한다. 이를 건너뛰거나 거짓을 고할 시에는 과태료 500만원이 부과된다고 한다. 500만원! 헐값에 책정되는 재앙의 몸값, 오늘도 영화를 뛰어넘는 잔혹 실화가 쓰여지고 있다. 국민들이 쿵쿵, 낡은 집에서 가슴을 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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