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에 뜬금포 명화…아름다움을 동경하다 [문소영의 영감의 원천]

2024. 7. 6.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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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의 원천]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힐라스와 님프들'
영국 빅토리아 시대 화가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힐라스와 님프들’(1896). 그리스 신화에서 헤라클레스가 총애했던 미소년 힐라스가 그의 미모에 반한 연못의 정령들에 의해 물로 끌려 들어가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사진 영국 맨체스터 미술관]
조지 밀러 감독의 걸작 ‘매드맥스:분노의 도로’(2015)가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후 9년만에 나온 같은 감독의 프리퀄이 ‘퓨리오사:매드맥스 사가’(2024)다. 흥행은 전작에 비해 부진한 편이다. (국내 누적 관람객 수는 개봉 7주차인 5일 기준 160만여 명. 전작 ‘매드맥스…’는 약 400만 명.) 팬데믹과 OTT 시대의 도래를 거치며 영화 관람 환경이 변한 탓이 크겠지만, 평론가들과 관객들이 대체로 호평을 하면서도 전작에는 다소 미치지 못한다고 보는 것도 한 이유일 것이다.

워터하우스, 신화 아름답게 묘사해 유명

영화 ‘매드맥스:분노의 도로’의 프리퀄인 ‘퓨리오사:매드맥스 사가’(2024)에서 악당 디멘투스가 이끄는 떠돌이 바이커 군단. [사진 워너브라더스]
영화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2024)에서 주인공 퓨리오사. [워너브라더스]
일단 프리퀄의 태생적 약점으로 새로운 요소가 많지 않다. 핵전쟁으로 인류 문명이 붕괴된 후의 광활한 황무지에 때때로 보이는 기묘한 시적 아름다움, 얄팍한 CGI 액션이 아닌 아날로그 액션의 거친 질감과 무게감, 온갖 고물을 기발하게 조합한 각종 무기와 탈것들의 재미, 그런 식으로 전쟁을 통해 가장 창의성을 발휘하는, 그리고 부족한 자원을 두고 극한에 치닫는 인간 존재의 공포영화적이면서 블랙코미디적인 자화상, 마초 액션과 페미니즘 코드의 절묘한 결합. 이와 같은 ‘퓨리오사’의 장점들은 모두 이미 전작 ‘매드맥스’에서 보여진 것이다. 프리퀄의 주요 악당인 디멘투스가 모터사이클 세 개를 엮어서 마치 말이 끄는 고대 로마 전차처럼 타고 다니는 모습 등(사진) 몇 가지 새로운 재밋거리들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 새로운 요소 중에는 난데없이 나온 영국 빅토리아시대 화가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1849~1917)의 그림도 있다. 영화에서 이 그림이 등장하는 맥락은 다음과 같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즉 멸망 이후의 세계에서 황무지를 지배하는 3대 요새가 있다. 물을 독점해 식량을 생산하는 ‘시타델’, 탈것과 기계를 돌리기 위한 연료를 생산하는 ‘가스타운’, 그리고 쇠와 석탄을 채집해 무기를 생산하는 ‘무기 농장’이다. 이 3대 요새의 리더들은 물물교환을 하며 공생과 견제를 이어나간다. 그런데 떠돌이 바이커 군단을 이끄는 디멘투스가 이들 사이를 휘저으며 균열을 만들기 시작한다. 그는 트로이목마 작전을 펼쳐 결국 가스타운을 점령하고 그 리더를 살해한다. 이때 그 리더는 멸망 이전의 유물인 낡은 화집을 보면서 거기 나오는 그림을 확대해서 대형 벽화로 그리고 있는 중이었다. 바로 워터하우스의 ‘힐라스와 님프들’이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힐라스와 님프들'(1896) 부분 확대. [맨체스터 미술관]
이 그림은 한마디로 ‘매드맥스’ 시리즈의 전반적인 환경과 모든 면에서 정반대되는 그림이다. 메마른 황무지와 대조되는 맑은 물 넘치는 연못, 낡은 기계들과 대조되는 자연의 녹음과 만발한 수련, 방사능 후유증과 궁핍에 찌든 사람들과 대조되는 물의 님프(정령)들과 미소년 힐라스의 건강하고 아름다운 자태, 살벌한 분위기와 대조되는 낭만적이고 말랑말랑한 분위기 등등에서 말이다. 아마도 이 그림은 멸망 이후 황폐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또 극한 상황에서 극대화되는 인간의 잔인하고 추한 면모와 그런 인간조차 마음 한구석에서 동경하는 아름다움의 극적인 대비를 보여주기 위해서 등장했을 것이다.

영국의 미술 잡지 ‘아트리뷰’는 이 그림의 바탕이 된 그리스 신화를 언급하며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 해석을 한다. 신화에 따르면 미소년 힐라스는 헤라클레스가 총애하는 시종이었고, 황금 양털을 찾기 위한 영웅들의 모험 여행 ‘아르고호 원정’에도 헤라클레스와 함께 참가했다. 그런데 아르고호가 어느 섬에 정박했을 때 물을 길으러 연못에 갔다가 그의 뛰어난 미모에 반한 연못의 님프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일설에는 님프들에 의해 강제로 물로 끌려들어갔다고 하고, 또 다른 설에는 님프들이 불로불사를 약속했기 때문에 힐라스가 자진해서 그들 곁에 남았다고도 한다. 힐라스가 돌아오지 않자 헤라클레스는 애타게 그를 찾았지만 이미 연못 속으로 사라진 그를 찾지 못했다.

이 신화에서 아트리뷰가 주목하는 것은 힐라스의 아버지인 테이오다마스 왕이 헤라클레스와 다투다가 죽임을 당했고 힐라스는 아버지의 원수의 손에 납치되어 그의 시종이 되었다는 신화 내용이다. 이것이 ‘퓨리오사’의 주인공인 퓨리오사와 악당 디멘투스의 관계를 상징하고 있다는 것이다. 디멘투스는 퓨리오사의 어린 시절 그녀의 어머니를 잔혹하게 살해하지만 퓨리오사가 방사능에 오염되지 않고 건강한 데다가 매우 강인하고 영리한 아이인 것에 끌려서 자신의 후계자로 삼고 딸처럼 데리고 다닌다. 결국은 퓨리오사에게 어머니의 복수를 당할 운명이지만 말이다.

낭만적이고 섬세한 작품, SNS타고 인기

밀러 감독이 과연 아트리뷰의 견해대로 그림에 등장하지 않는 헤라클레스와 힐라스의 신화 속 관계까지 염두에 두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어쨌든 워터하우스의 그림을 어떤 미학적 의도를 가지고 등장시킨 것은 명백하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대표작 '샬럿의 아가씨'(1888). 영국 아서왕 전설을 바탕으로 한 테니슨의 시를 묘사한 그림이다. [사진 테이트 브리튼]
워터하우스는 주로 옛 신화와 문학을 낭만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뛰어난 테크닉으로 자연과 인물들의 얼굴을 무척 아름답게 그렸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섬세한 감정을 담아냈기 때문에 명성을 얻었다. 세기말 유럽의 산업과 물질문명이 극도로 발달하면서 그에 대한 반동으로 낭만주의와 도피주의가 유행하던 것도 그의 인기에 한몫 했다.

그러나 20세기에 추상화 등 전위미술 운동이 일어나면서 워터하우스의 작품은 구시대의 것으로 여겨졌다. 그가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말부터다. 클래식한 화풍의 작가들 중에서도 차별화되는 그만의 독특한 스토리텔링 방식, 그리고 그가 그린 인물들의 표정에 담겨 있는 복합적이고 섬세한 감정이 재평가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21세기 들어서는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타고 대중적 인기를 다시 끌고 있다.

이렇게 낭만적인 아름다움의 대표이자 섬세한 감정의 그림이기에 폭력이 난무하는 절망적인 세상에서도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을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퓨리오사’에서 “신화적 암시와 상징”으로서 등장하게 된 것이 아닐까.

문소영 기자 sym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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