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파리는 곤충이다[김우재의 플라이룸](52)

2024. 7. 5.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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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에 개미 문신을 한 듯한 초파리/경향신문 자료사진


초파리가 유전학의 주인공이 된 이유는 유전적 대물림의 비밀이 초파리 염색체를 통해 풀려왔기 때문이다. 염색체에 길게 배열된 띠의 집합이 유전자라는 사실도 초파리에서 밝혀졌고, 염색체 접합과 재조합의 비밀 또한 초파리에서 알려졌다. 미국 뉴욕주의 컬럼비아대학에서 탄생학 초파리 유전학은 실용주의라는 철학적 기반 위에서 탄생했고, 철저히 인간의 건강과 질병 연구에 적용돼야 한다는 암묵적 동의하에 발전해왔다.

실용주의와 도브잔스키의 초파리


토머스 헌트 모건에서 시작돼 그의 수제자인 스터티번트와 뮬러 등으로 계승된 고전유전학의 전통은 실험실에서 초파리를 인간생물학을 연구하는 도구로 만들어나갔다. 이런 전통에 반기를 든 건 모건의 또 다른 수제자였던 도브잔스키였다. 그는 멘델과 다윈의 이론을 의심하던 철저한 실험주의자 모건과 달리 숭고한 다윈주의의 사도였고, 훗날 그 유명한 진화론의 도그마인 ‘진화의 불빛에 비추지 않고서는 생물학의 그 어떤 것도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언명을 탄생시켰다.

스터티번트가 노랑초파리(D. melanogaster)를 현대 유전학의 모델생물로 정착시킨 반면, 스승에 반기를 들며 새로운 학파를 창시한 도브잔스키는 검정초파리(D. Pseudoobscura)를 진화유전학의 모델생물로 만들어나갔다. 한때 러시아의 스파이로 몰렸던 도브잔스키의 검정초파리는 그 연구의 방향까지 미국식 실용주의를 벗어나더니, 비글호를 타고 낭만을 꿈꾸던 다윈을 따라 인간의 건강과 질병에는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는 순수한 진화생물학의 전통을 미국에 퍼뜨렸다.

철저히 모건의 전통에서 자라난 시모어 벤저가 박테리오파지라는 분자생물학의 훌륭한 도구를 버리고 초파리 행동유전학의 길로 뛰어든 사건은, 그래서 초파리 유전학 역사의 아이러니다. 벤저는 행동을 유전자의 수준에서 이해하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가 실제로 연구했던 행동들은 초파리라는 곤충의 단순한 반응에 불과했고, 그런 단순한 반응에 관한 유전학적 연구가 실제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는 심리학자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벤저의 쓸모없어 보이는 초파리 행동 연구가 미국에서 연구비를 지원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벤저가 그의 스승 막스 델브뤼크만큼 이미 유명한 분자생물학자였기 때문이라는 사실 이외에는 찾을 수 없다. 이를 뒷받침하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내 박사후연구원 스승이었던 유넝 잔 박사가 록펠러 재단에서 펠로십을 받은 연구 주제는 초파리의 채널 유전자 돌연변이를 이용해서 인간의 조현병을 연구한다는 내용이었는데, 록펠러 재단 관계자들과의 만찬에서 유넝이 도대체 왜 이런 주제에 연구비를 주느냐고 묻자, 그 관계자가 웃으며 벤저가 유명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훗날 생체시계 유전자를 비롯해 기억과 학습에 관련된 유전자가 초파리에서 발견되고, 초파리를 이용해 파킨슨병, 알츠하이머와 루게릭병까지 연구하게 되면서 벤저의 행동유전학은 쓸모없는 연구라는 오명에서 벗어나게 됐지만, 벤저의 전통이 다시 실용주의의 함정에 빠져버린 지금 도브잔스키의 전통은 이제 미국에서 거의 자취를 감춰버렸다.

시험관에서 길러지는 초파리. 시험관에 담긴 노란 배양 배지를 먹으며 자라난 구더기는 시험관 벽을 타고 기어 올라 자리를 잡고 번데기가 된다. 점점 까매지는 번데기 속에서 마침내 날개를 갖춘 초파리가 고치를 뚫고 비행을 시작한다./경향신문 자료사진


생물학이 아니라 인간질병학


미국식 실용주의는 생물학자들의 연구에 암묵적 지침서를 제공했다. 모든 연구의 최종 목표를 인간의 질병 치료로 상정하는 암묵적 지침서는 그 어느 법전에도 쓰여 있지 않지만, 연구제안서를 심사하는 심사위원의 편견 속에서, 최고의 논문을 심사하는 학술지 편집위원의 정치적 고려 속에서, 그리고 과학의 진보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이 국민의 인기에만 관심을 두는 정치인과 관료들의 포퓰리즘 속에서 매일 작동 중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의 생물학은 생물학이라기보단 인간질병학에 가깝다. 연구비 대부분은 인간 질병을 위한 연구에 집중돼 있고, 아주 극소수의 생태학 연구의 경우에도 연구의 최종 목표는 결국 인간에게 도움이 돼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다.

그런 유행 속에서, 초파리 유전학자들은 점점 더 초파리를 인간 질병의 모델로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미 국립보건원이 초파리에 대한 연구비 지원을 점점 줄이는 불가항력적인 변화 속에서 초파리 유전학자의 일부는 연구비 수주가 더 쉬운 생쥐로 옮겨가거나, 연구 주제를 행동에서 질병으로 바꾸기도 한다. 고집스러운 장인정신으로 돈 안 되는 행동 연구를 계속하는 연구자도 있지만, ‘네이처’ 정도 되는 학술지에 논문을 자주 발표할 정도가 아니라면, 결국은 대세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 초파리 학회에 참석하는 연구자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고 있고, 그마저도 대부분은 초파리를 이용해 어떻게든 인간 질병을 연구하려는 사람들이 학회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제 초파리학회의 대부분은 초파리인간질병학회로 진화하고 있다.

최근 초파리 연구에서 가장 유행하는 분야는 암의 발생을 초파리 모델로 이해하는 것이다. 인간에서 암을 유발하는 어떤 유전자를 초파리에서 과발현시키면 암으로 보이는 세포의 팽창이 일어나는데, 이 현상을 이용해서 인간 암 발생의 분자적 기작을 좀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처음엔 이런 연구를 비웃던 나조차 이젠 비웃기 어려울 정도로 초파리를 이용한 암생물학 연구는 점점 대세가 돼가는 중이다. 그 배후에는 역시 미국의 과학계 리더들이 자리 잡고 있다. 그들은 대가라고 불리지만, 생물학 전체의 진보와 인류의 발전보다는 자신과 동료들의 논문 출판과 이를 통한 연구비 확보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향원들이다. 자연계에서 초파리는 절대로 암에 걸리지 않는다. 암에 걸릴 만큼 비정상적으로 오래 살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물학을 인간질병학의 아류로 생각하는 미국의 과학자들은 이제 초파리를 암생물학의 모델로 만들어 놓고 흐뭇해하고 있을 것이다.

초파리는 곤충이다


이런 유행이 생물학이라는 과학의 진보에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는 훗날 역사가 판단해줄 것이지만, 과학적 진보의 핵심 가치 중 한 축인 다양성이 심각하게 훼손돼버린 생물학에서, 어떤 비약적 진보가 일어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기대는 회의적이다. 그 무엇보다 초파리는 곤충이지 인간이 아니다. 곤충에 관한 연구가 인간 질병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하기보다 곤충에 관한 연구를 통해 이 세계와 인류에 대한 이해를 증진할 수 있다는 목표가 더 과학적으로 들려야 한다. 초파리는 곤충이다. 하지만 초파리 연구자들은 초파리가 곤충이길 원하지 않는다. 초파리는 작은 인간이어야 한다. 곤충을 곤충이라 부를 수 없는, 비정상적인 사고가 과학을 오염시키고 있다.

김우재 낯선 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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