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구메지마 학살의 생생한 증언…김숨 소설 '오키나와 스파이'

김용래 2024. 7. 5.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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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미군 스파이 몰린 주민 20명 살해돼…조선인 일가족 7명 포함
작가 "상상하고 싶지 않은 것 상상해야 했다"

(서울=연합뉴스) 김용래 기자 = 구메지마(久米島)는 일본 오키나와 본섬에서 서쪽으로 100㎞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섬이다. 지명에 '쌀 미'(米)자가 들어갈 만큼 벼가 잘 자라는 비옥한 땅인 이곳에서는 2차대전 종전 즈음 일본군에 의한 끔찍한 주민 학살이 있었다.

오키나와 전투 발발 전 1943년에는 일본 해군이 상륙한다. 일본군에 이어 상륙한 미군은 항복을 권고하는 문서를 주민들에게 운반하게 하거나, 섬의 지리에 익숙하지 않았던 탓에 주민들을 앞세워 섬을 탐색한다.

가야마 다다시가 이끄는 일본군 부대는 미군과 함께하는 주민들을 죽여 마땅한 스파이로 간주한다. 그렇게 스파이로 지목된 현지 주민 20명은 일본군과 그들의 학살 도구로 이용된 10대 소년들의 손에 끔찍한 죽음을 맞는다.

[모요사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김숨의 장편소설 '오키나와 스파이'는 태평양 전쟁이 끝나갈 무렵 구메지마 섬에서 일어난 참혹한 학살극을 정면으로 다룬 작품이다.

소설은 섬에 주둔한 일본군 총대장 '기무라'의 지휘를 받는 인간 사냥꾼들이 여자와 소년을 포함한 9명의 섬사람을 무참히 살해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기무라는 실존 인물이던 가야마 다다시를 모델로 했다.

당시 학살된 20명 중에는 식민지 위계질서의 최하층에 있던 조선인 구중회의 일가족 7명이 있었다.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고물상으로 일하던 구중회는 극심한 가난과 천대 속에서도 단란한 가정을 꾸린 착실한 가장이었다.

미군과 동행한 적도, 미군에게 연행돼 심문받은 적도 없는 그였지만, 현지 주민들과 기무라 부대는 그를 스파이로 몰아 일가족 7명을 잔인하게 살해한다.

그렇게 1945년 8월 20일, 한반도가 일제에서 해방되고서 닷새가 지난날에 51세의 구중회와 36세의 오키나와인 아내는 물론 10세, 8세, 6세, 3세, 태어난 지 몇 달밖에 되지 않은 막내까지 모두 죽음을 맞는다.

조선인 고물상 일가족의 비참한 최후는 당시의 오키나와가 안고 있던 중첩된 차별 구조를 뼈아프게 드러낸다.

오키나와는 군국주의 일본이 패망 직전에 미국과 전선에서 맞붙으며 각종 만행을 저지른 곳이었다. 일본 본토인과 오키나와인, 조선인을 가르는 심각한 차별의 문제를 안은 곳이기도 했다. 주민들은 생사가 오가는 절대적 위협 앞에서 집단무의식에 뿌리 깊이 박힌 차별 관념을 극단적인 형태로 표출한다. 그 최후의 희생자가 바로 조선인 고물상 일가족이었다.

"인종차별 때문에요. 엄마, 인종차별이 뭐냐면 말이에요, 인간을 일등, 이등, 삼등… 그렇게 나누는 거래요. 일본인은 일등, 오키나와인은 이등, 조선인은 삼등. 엄마, 그런데 나는 조선인이에요?" (228~229쪽)

소설 속 조선인 고물상의 아들이 오키나와인 엄마에게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며 질문하는 대목에서는 당시 오키나와에 뿌리 박힌 계급 구조가 선명히 드러난다.

전쟁의 참상, 맹목적인 권력, 공동체에 널리 퍼진 극도의 불신과 그로 인한 무자비한 학살…. 권력의 포악함 앞에서 한없이 무기력한 주민들은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취약한 처지의 타인을 고발하고 그들의 처절한 고통을 외면해 버린다.

구메지마 섬 [위키미디어 커먼즈. 재판매 및 DB 금지]

출판사에 따르면 '구메지마 수비대 주민 학살 사건'이 소설화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일본 본토에서는 물론 오키나와 문단에서도 다뤄진 적이 없는 사건이라고 한다.

작가는 당초 조선인 위안부 문제 취재차 오키나와를 방문하기 전, 재일 한국인 학자의 책에서 조선인 구중회 씨 일가족 일곱 명의 학살 얘기를 처음 접했다. 하지만 차마 "소설화할 수 없는, 하고 싶지 않은" 기록으로 남겨뒀다가, 오키나와 사키마 미술관에서 '오키나와 전도(戰圖)' 시리즈의 특별전시를 접하고 작품화를 결심했다.

김숨은 '작가의 말'에서 "너무도 분명한 악과 악행과 악인을 상상하는 것이, 쓰는 것이 쉽지 않다"며 "그런데 이 소설을 어떻게든 끝맺으려 상상하고 싶지 않은 것을 상상해야 했고 쓰고 싶지 않은 것을 써야만 했다"고 적었다.

실제 있었던 학살의 참상과 극도의 공포에 놓인 인간 군상의 처절한 모습을 문학으로 형상화해낸 작가의 용기에 경외심이 느껴진다. 한국 전쟁문학의 지평을 확장한 작품으로 남을 만하다.

모요사. 396쪽.

yongla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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