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장엇국 드셔” 며칠을 맴돈 집밥의 맛…이번엔 소고깃국이다

최상원 기자 2024. 7. 5.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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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소문나면 곤란한데
마산어시장 진동식당 백반
박필선 진동식당 주인이 주방에 서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최상원 기자
관광객을 상대하는 북적이는 ‘TV 맛집’은 사절합니다. 지역의 특색있는 숨은 맛집, 누가 가장 잘 알까요? 한겨레 전국부 기자들이 미식가로 이름난 지역 터줏대감들에게 물었습니다. “어디 가서, 뭘 먹어야 합니까?” 대답을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합니다. 한두 군데 마지못해 추천하면서 꼭 한마디를 덧붙이네요. “여기, 소문나면 곤란한데.”

“오늘은 장엇국입니데이.”

진동식당 주인 박필선(64)씨는 손님이 들어오면 인사 대신 당일 메뉴를 알려준다. 손님들도 어색해하지 않는다.

“김치찌개 먹고 싶은데, 그거 할라믄 시간 많이 걸립니까?”

“김치도 새로 꺼내야 하고, 시간 좀 걸리지. 오늘은 그냥 장엇국 드셔.”

“알겠심더. 장엇국 2개 주소.”

단골손님 2명이 박씨와 이야기를 나누며 자리에 앉았다. 잠시 뒤 박씨가 커다란 ‘오봉’에 음식을 차려 주방 선반에 올리자, 손님이 직접 자신의 자리로 들고 갔다. 신문기사에 ‘오봉’이라는 표현을 피하고 싶었지만, 박씨는 “오봉을 오봉이라고 하지, 그럼 뭐라꼬 불러?”라며 타박했다.

음식은 단출했다. 장엇국과 밥, 김치, 두부졸임, 고추장아찌, 양파볶음, 콩나물, 콩자반, 오이무침, 무말랭이가 전부였다. 식사를 마친 손님은 빈 그릇이 담긴 오봉을 주방 선반에 올려두고 1만4천원을 박씨에게 건넸다.

“오늘은 쫌 짭네.”

손님이 나가면서 한마디 했다.

“진작 말하지. 담엔 심심하게 할게.”

박씨가 덤덤하게 답했다.

1인분인 7천원인 진동식당 음식. 장엇국(왼쪽)과 소고깃국. 최상원 기자

진동식당은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마산어시장에 있는 밥집이다. ‘여기 소문나면 곤란한데’ 시리즈는 한겨레 전국부 기자 모두의 골칫거리다. 적절한 식당을 찾기도 쉽지 않고, 광고비나 협찬을 받는 것도 아닌데 업주는 무작정 손사래부터 친다. 시리즈가 시작된 뒤 취재원이나 친구를 만나면 습관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소문나지 않은 맛집 어디 없나? 관광객들은 모르는데 토박이 주민들 사이에선 맛집으로 소문난 곳, 예약하지 않고 줄 서지 않아도 언제라도 갈 수 있는 곳, 비싸지 않은데 입에 착착 달라붙는 맛집, 딱 잘라 말하긴 어려운데 뭔가 엣지 있는 집, 그런 맛집 좀 소개해줘.” 대부분은 “한번 찾아볼게” 한다.

얼마 전 초등학교 친구들 모임에 가서 또 물었다. 이런 친구가 딱해 보였는지, 지역 토박이에 입심 좋고 친화력까지 뛰어나 마산 바닥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친구 송정태가 나섰다. “우리 부부가 집밥 먹고 싶을 때마다 가는 식당이 있다. 같이 가볼래? 근데 너무 작고 허름해서 어떨란지 모르겠다.” 소개할만한 식당인지는 직접 가서 먹어봐야 알 수 있다. “해장할 겸 내일 당장 점심 먹으러 가자”고 다짐을 받았다.

마산어시장은 경남에서 가장 큰 재래시장이다. 조선 영조 36년(1760년) 세금으로 곡식을 거둬 서울로 보내는 조창이 마산에 생긴 뒤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됐다. 지금처럼 본격적인 시장의 모습을 갖춘 건 1899년 마산항 개항 이후라고 한다. 지금도 점포 수가 2000여개에 이르고 하루 방문객도 5만명이 넘는다. 시장 전체 면적이 19만㎡가 넘기 때문에 특정 점포를 찾아가려면 점포가 있는 골목 이름부터 알아야 한다.

친구가 알려준 대로 마산어시장 해동상가 골목으로 갔다. 골목을 두번이나 훑고서야 진동식당을 찾을 수 있었다. 식당 면적은 주방을 포함해도 4평(13.2㎡)이 겨우 될까말까 했다. 탁자는 8인용 2개와 2인용 1개가 전부였다. 메뉴판과 가격표는 어디에도 없었다. 손님들은 모르는 사람끼리도 스스럼없이 함께 앉아 밥을 먹었다. 음식을 주방에서 탁자로 가져가고, 탁자에서 주방으로 반납하는 것도 손님 몫이었다. 종업원 없이 주인 박씨 혼자 운영하는 식당이라서다.

“시장통에 있는 달랑 네평짜리 식당을 말라꼬 신문에 내겠어요? 요서 시간 쓰지 말고 다른 데 가서 알아보이소.”

단골손님인 송정태를 앞세웠지만, 주인 박씨는 한사코 인터뷰를 거절했다. 얼굴사진 한장만 찍자고 해도, 마스크를 벗지 않았다. 장엇국만 먹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장엇국에는 콩나물 대신 부드러운 숙주나물이 한가득 들어있었다. 숙주나물을 한 젓가락 집어서 입에 넣자, 얼큰한 국물이 스며 나오며 입맛을 돋웠다. 밑반찬은 생긴 게 투박해도, 양념이 과하지 않고 원재료 각각의 맛이 살아 있었다. 콩나물·오이무침 등은 갓 버무려서 아삭아삭하게 씹는 맛이 제대로였다.

성과 없이 돌아왔지만, 그날의 장엇국 맛이 며칠 동안 입안을 맴돌았다. 일주일 뒤 다시 찾아갔다. 이날 메뉴는 소고깃국이었다. 역시 맛있었다. 국물 한방울 남기지 않고 그릇을 비웠다. 그제야 박씨는 이야기를 조금씩 풀어내기 시작했다.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마스크도 벗었다.

트로트 가수 임영웅의 팬인 박필선 진동식당 주인은 식당 벽면을 임영웅 사진으로 도배했다. 최상원 기자

박씨는 매일 마산어시장에서 시장을 봐 음식을 준비한다고 했다. 2·4주 금요일은 장엇국, 나머지 날은 소고깃국, 된장국, 김치찌개, 순부두찌개, 매운탕 등을 준비한다. 겨울에는 아귀탕·메기탕을 내놓기도 한다. 복날은 삼계탕이다. 매일 메뉴를 어떻게 정하냐고 물었더니, “마음 내키는 대로 한다”고 했다. 그런데 맛있다. 집밥 먹는 듯 ‘엄마 손맛’이 느껴졌다.

식당은 아침 8시부터 오후 2시까지만 연다. 아침 손님은 주로 마산어시장 상인들이고, 점심 손님은 장을 보러온 이들이 대부분이다. 명절을 제외하면 한달에 한번, 네번째 일요일만 쉰다. 음식값은 메뉴와 상관없이 1인분 7천원이다. 대부분 ‘혼밥 손님’이고, 어쩌다 2~3명씩 어울려 온다. 배달은 하지 않는다.

박씨가 마산어시장에 식당을 연 기간은 20년이 조금 넘는다. 처음엔 제일제당 판촉사원으로 일하다가 2003년 11월 식당을 인수해 운영을 시작했다. 박씨는 경남 함안 출신이지만, 원래 이름인 ‘진동식당’을 그대로 사용했다. 식당 일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요리에 자신이 있어 식당을 시작한 것이냐’고 물었더니, 수줍은 웃음과 함께 이런 답이 돌아왔다. “짭다, 맵다, 이리해라, 저리해라. 손님들 온갖 잔소리 들으면서 실력을 키았지, 지금도 그라고.”

진동식당은 마산어시장 해동상가 옆 골목에 있다. 최상원 기자

식당 벽면은 트로트 가수 임영웅의 사진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박씨는 “진짜 좋아하는데, 바쁘기도 하고 멀리 갈 수도 없고, 그래서 콘서트는 딱 한번밖에 못 가봤다”며 “임영웅 가수한테 따뜻한 밥 한끼 대접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혼자 온 여자손님이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옆 탁자에서 식사하던 손님 2명이 여자손님에게 “3·3·3 두잔요”라고 했다. 몇분 뒤 그 여자손님은 커피·설탕·커피크림을 세 숟가락씩 넣은 커피 두잔을 들고 왔다. 커피를 받은 손님들은 여자손님에게 한잔에 1300원씩 2600원을 지불했다. 여자손님은 마산어시장 상인들에게 커피를 파는 ‘커피 사장’이었다. 나도 ‘커피 사장’에게 아이스커피 두잔을 주문했다.

“매일 점심을 진동식당에서 먹어요. 이 집 밥을 먹으면 속이 편하면서도 든든해요.” 아이스커피 두잔 값으로 3천원을 줬더니, 커피 사장은 “잔돈 100원이 부족하네요. 다음에 줄게요”라면서 300원만 거슬러줬다. 그날 이후 진동식당을 취재하기 위해 두 번을 더 갔다. 그때마다 ‘커피 사장’과 마주쳤다. 그런데 100원을 달라는 말을 아직 못했다.

최상원 기자 cs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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