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같은 연극 무대서 목사가 말합니다 "지옥은 없습니다"[알쓸공소]

장병호 2024. 7. 5.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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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아트센터 연극 '크리스천스'
美 루카스 네이스 희곡, 민새롬 연출
분열하는 교회 통해 공동체와 믿음 다뤄
혐오의 시대에 고민할 질문 담은 수작
‘알쓸공소’는 ‘알아두면 쓸모 있는 공연 소식’의 줄임말입니다. 공연과 관련해 여러분이 그동안 알지 못했거나 잘못 알고 있는, 혹은 재밌는 소식과 정보를 전달합니다. <편집자 주>
연극 ‘크리스천스’의 한 장면. (사진=두산아트센터)
[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오늘은 축복의 날입니다. 자유의 날입니다.”

미국 한 대형 교회의 담임목사 폴은 교회를 운영하기 위해 진 빚을 10년 만에 다 갚은 날, 신도들 앞에서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었다며 환한 미소와 함께 설교를 시작합니다. “우리 교회에 균열의 조짐이 있다”며 말을 꺼낸 그는 “지옥은 없다”는 급진적인 이야기를 펼쳐 보입니다. 신도들을 혼란에 빠집니다. 축복이자 자유와 같은 날 이후, 폴의 교회는 예상치 못한 위기에 빠져듭니다.

연극을 보러 갔는데 교회 같은 무대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목사의 충격적인 설교가 던지는 흥미로운 질문을 마주했습니다. 지난달 25일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개막한 연극 ‘크리스천스’입니다. 미국 극작가 루카스 네이스의 희곡을 민새롬 연출이 무대화한 작품입니다.

연극의 재미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다른 공연에서는 느낄 수 없는 다양한 질문과 마주할 때 연극의 재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크리스천스’는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교회를 배경으로 공동체 안에서 개개인이 가진 믿음이 어떻게 공동체에 균열을 내고 갈등을 만드는지 보여줍니다. 작품에는 수많은 크리스천이 등장합니다. 이들이 보여주는 각기 다른 믿음을 통해 연극은 관객에게 종교적 신념, 더 나아가 현대 사회에서 소통과 통합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죠. 제목이 ‘크리스천스’(The Christians)로 복수형을 취한 이유입니다.

연극 ‘크리스천스’의 한 장면. (사진=두산아트센터)
교회가 배경인 만큼 예배당의 모습을 취한 무대가 가장 먼저 눈길을 끕니다. 공연이 시작하면 성가대가 등장해 객석 앞에 앉습니다. 배우는 물론 일반인과 학생들로 구성된 15명의 성가대는 흥겹게 가스펠을 부르며 공연장 분위기를 교회로 바꿔 놓습니다. 가스펠로 분위기를 띄운 공연은 폴의 설교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폴이 여러 인물과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 믿음에 대한 다양한 질문을 던집니다.

‘크리스천스’의 미덕 중 하나는 종교를 소재로 하지만 종교를 편견에 얽매이지 않고 다룬다는 점입니다. 무신론자라면 폴의 설교를 조금 더 수긍할 법도 합니다. 지옥의 존재, 신의 구원 등에 대해 기존 기독교와는 다른 의견을 개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폴에 반발하는 부목사 조슈아, 그리고 조슈아와 함께 신도들이 떠날까 두려워하는 장로 제이의 이야기도 인상적입니다.

“우리가 한몸이 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가 혼자서는 볼 수 없는 무언가를 볼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폴은 자신의 설교에 반발하는 조슈아, 장로 제이의 이야기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히틀러도 신의 구원을 받았느냐”는 신도 제니의 도발적인 질문, 그리고 폴과는 다른 믿음을 갖고 있다는 아내 엘리자베스의 이야기가 등장하면서 폴은 서서히 흔들립니다. 관객 또한 폴의 설교가 진실하다고 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됩니다.

연극 ‘크리스천스’의 한 장면. (사진=두산아트센터)
무엇보다 ‘크리스천스’는 지(知)적인 연극입니다. 공연 후반부 다시 등장한 조슈아는 폴과는 전혀 다른 입장에서 자신의 믿음을 이야기합니다. 폴의 입장도, 조슈아의 입장도 모두 이해할 만한 이유가 있음을 알게 되는 순간 관객은 혼란에 빠집니다. 공동체는 정말로 하나의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일까요. 공동체 내부에 여러 종류의 믿음이 각자 타당한 근거를 갖고 존재할 때, 그 공동체는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 걸까요.

‘크리스천스’는 교회의 이야기지만, 인간들이 모여 살아가는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서로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혐오로 치닫는 지금, ‘크리스천스’는 어떻게 해야 소통으로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는지 관객에 질문합니다. 배우들의 열연이 120분간 펼쳐지는 지적인 공연을 탄탄하게 지탱합니다. 놓쳐서는 안 될 수작(秀作)입니다.

민새롬 연출은 “이 연극은 특정 종교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속할 수밖에 없는 크고 작은 다양한 공동체 안에서 경험하는 모순, 분열, 소통, 화합의 고통스러운 국면들을 다루고 있다”며 “이 작품이 그런 공동체의 개인들에게 단단한 위로와 용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햅습니다. ‘크리스천스’는 오는 13일까지 공연합니다.

장병호 (solanin@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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