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결 지상주의’가 국가 위기 부른다 [쓴소리 곧은 소리]

임성호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2024. 7. 5.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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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 단상에 오른 의원들, 유권자보다 공천권 쥔 당 지도부 의식하며 발언
숙의 없이 다수결 지상주의에 빠져…’정당 집단주의’가 민주주의 퇴색시킬 것

(시사저널=임성호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

말(言)의 중요성을 누가 부인하겠는가. 말은 오해와 갈등을 풀고 천 냥 빚도 갚게 해준다. 반면, 말로 인해 오해가 더 쌓이고 격한 싸움, 심하면 무서운 전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갈등 관계로 고생한 적 있는 사람이라면 침묵은 금이라는 격언에 공감할 것이다.

말이 양날의 검이란 점은 요즘 국회 무대, 의정 단상에 오른 의원들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말의 긍정성보다 폐해가 더 두드러지며 말의 근원적 가치마저 훼손시키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언론에 비치는 국회의원들의 말은 악의로 가득하다. 상대방 말은 자르고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말, 나는 무조건 옳고 너는 무조건 그르다는 식의 말, 사안을 종합적으로 보지 않고 한 단면만 끄집어내 과장하는 말, 편견에 빠져 상황을 함부로 재단(裁斷)하는 말, 무례하게 비꼬거나 야단치는 말, 삿대질과 고성으로 외쳐지는 말 등등 의원들의 말은 국민에게 부정적 이미지로 다가온다.

물론 언론에 의한 왜곡도 있을 것이다. 언론은 자극적 기사로 시청률이나 조회 수를 높이기 위해 의원들의 부정적인 면만 부각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정당 간에 첨예한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 입법 사안에서는 말의 추한 정도가 크지 않고 때론 멋진 말이 오가기도 한다. 그럼에도 근래 국회의원들의 말이 예전보다 호전성, 일방성, 무례함을 더 띠며 진정한 대화의 취지를 살리지 못한다는 일반 현실을 부인할 순 없다. 웬만큼 국민 관심을 끄는 사안은 여야 간 전면전으로 다 정쟁화되어 각종 말 폐해의 온상이 되었다.

7월1일 국회에서 열린 운영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박찬대 위원장이 국민의힘 배준영 간사의 회의 운영 관련 요청을 거절하고 있다. ⓒ연합뉴스

숙의를 가로막는 경직된 '정당 집단주의'

원래 의회는 말을 지상 가치로 중시하는 기관이다. 영어 parliament는 프랑스어 parler(말하다)로부터 왔다. 우리말 번역어인 의회는 의논하는(議) 모임(會)을 뜻한다. 미국 대통령까지 된 우드로 윌슨은 19세기 말 교수 시절에 출간한 명저에서 의회의 가장 핵심적인 기능을 말하기에서 찾았다. 즉, 의원들이 말을 자유롭고 풍부하게 함으로써 국민에게 정보를 제공하며 공론을 형성하고 여론을 이끄는 게 의회의 기능 중 제일 중요하다고 설파했다. 심지어 입법 기능과 행정부 감시·감독 기능보다도 말을 통한 공론 및 여론 조성이 민주주의 체제에 가장 필요한 의회 기능이란 주장이다.

행정부와 달리 의회가 투명성, 개방성을 강조하며 거의 모든 회의에 언론인과 일반인의 방청을 허용하고 의원들의 발언을 그대로 기록으로 남기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의원들의 말이 널리 알려져야 사회에 각종 담론, 공론, 여론이 형성되어 민주주의적 활기가 돌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회가 점점 복잡해지고 입법에 전문적 식견이 요구됨에 따라 행정입법이 늘어나고 상대적으로 의회의 입법 영역이 좁아지면서 그 대신 의회에서 말의 중요성이 커졌다. 행정부가 입법에 상당한 권한을 행사하게 되면서 의회는 비입법 영역인 공론 형성 및 여론 선도로 역할을 확장하며 힘의 공백을 메우게 된 것이다.

의원들의 말하기가 더욱 중요해진 역사적 흐름 속에서 구미 학계는 숙의민주주의 이론의 확산을 반겼다. 숙의(熟議)란 푹 익혀가며 진행하는 상호적 말하기로서 토의, 토론, 논쟁보다 고차원이다. 일단의 학자들이 발전시킨 숙의민주주의 이론은 애당초 사회 전체에서의 바람직한 의사소통을 지향했으나, 의원 간 숙의도 핵심 요소로 포괄했다. 이에 따르면 의원들은 미리 정해진 각자의 입장만 고수하다 결국 다수결 지상주의로 결론을 내거나 중간적 절충으로 가는 정형적 틀에 매몰되지 말아야 한다. 대신에, 열린 마음으로 숙의에 임해 공동선을 추구해야 한다. 숙의는 고정된 입장들 사이에서 중간적 최적점을 찾는 기계적·물리적 과정이 아니라 원래의 입장들도 소통을 통해 바뀔 수 있다는 전제하에 최선의 합일점을 찾는 창의적·화학적 과정이다. 강조컨대, 숙의는 합일점에 도달하는지 여부보다 과정상의 충실함으로 참여자(의원) 상호 간 신뢰를 형성시키고 관중(국민)에게 체제 효능감을 주는지에 우선순위를 둔다.

위기 느낀다면 의원 개인의 양심을 따라야

숙의 개념을 국회에 적용해 성숙한 민주주의를 구현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의원들에게 요구된다. 첫째, 서로의 다양한 입장을 인정해야 한다. 둘째, 각자의 생각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상대방에게 예의를 갖춰야 한다. 넷째, 각자의 입장을 필요시 융통성 있게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이 네 조건이 충족될 때 이상적인 숙의가 가능해진다. 그러나 한국 정치의 토양은 이 조건들을 충족하기에 너무 척박하다. 무엇보다, 정당 집단주의가 의원들을 경직되게 속박한다. 당론을 따르지 않거나 다소의 이의라도 제기하면 당내 위상이 추락하고 공천 불이익을 받고 최악의 경우 출당까지 당하는 철저한 집단주의 풍토에서 특히 둘째와 넷째 조건은 꿈꾸기도 힘들다.

국회의원을 한 명씩 보면 대다수는 숙의에 필요한 자질을 갖추고 있다. 높은 학식, 풍부한 경험, 공적 사명감의 소유자들이다. 그러나 경직된 정당 집단주의는 이들을 좁은 틀에 가두어 숙의는 고사하고 건전한 상식 수준의 대화마저 하기 힘들게 한다. 특히 당 지도부에 신세 져서 공천받거나 당선된 의원들일수록 정당 틀을 벗어날 수 없다. 그들은 국회 무대에서 말할 때 유권자를 의식하는 것 이상으로 당 지도부와 동료들의 눈치를 본다. 그들은 속으로 자괴감을 느낄지라도 정당 기율에 대오를 맞춰 정파적 험한 말을 구사하게 되는 것이다.

근래 들어 정치 양극화의 심화, 정치 블랙홀의 확장과 함께 의원들의 정당 집단주의가 더 강해지고 있다는 데 사안의 심각함이 있다. 우리만의 일은 아니다. 미국과 유럽 등 민주주의 선진국에서도 나타나는 불길한 현상이다. 전환기적 시대 환경의 거시적·보편적 변화에 그 근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정당 집단주의를 누그러뜨려 국회에서 말의 고매한 가치를 되살리기가 난제일 수밖에 없다.

시대적 문제라고 그냥 넘겨벌릴 수는 없다. 정파 틀에 매인 의원들의 거친 말은 정치 양극화를 더 악화시키고, 양극적 대결은 정당 집단주의를 더 강화하고, 이는 다시 의원들의 말을 더욱 악성으로 모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이것은 의회정치의 마비, 민주주의의 퇴색, 국가의 위기를 뜻한다. 공적 의식의 의원들이라면 묵과할 수 없는 비극이다. 이런 위기를 초래해 공멸하느니, 단기의 불이익에도 결연히 과도한 정당의 구속을 거부하고 의원 개인의 양심을 중시해야 한다. 그래야 국회에서 말의 가치가 살아나고 한국 민주주의와 국가 체제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임성호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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