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실수하는 나 괜찮을까 [파일럿 Johan의 아라비안나이트]

2024. 7. 5. 14:18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림=DALL.E>
“아~미안해요. 까먹었네.”

이륙을 서두르다 보니 랜딩 라이트를 켜는 것을 깜빡했다. 관제탑으로부터 “Cleared for Take-off (이륙을 허가합니다)” 싸인을 받고 멋지게 이륙 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자동차로 치면 헤드 불을 안켜고 운전하는 격이다.

멋쩍은 웃음을 짓고 얼른 계기판 위의 랜딩 라이트를 켜버린다. 어차피 1만 피트(ft) 위에 올라가면 다시 끄겠지만, 그래도 실수를 발견했으니 바로 되잡아야 마음이 편하다.

사실 랜딩라이트를 켜고 끄는 문제는 시야가 쨍쨍한 한낮에는 안전과 아주 크게 상관없는 일이긴 하다. 하지만 자동차 운전과 다르게 항공기 조종할때는 항공기는 이륙하기전에 이 라이트를 켜는 것이 룰로 정해져 있다. 전문용어로 ‘SOP(Standard Operational Manual)’이라 부르는데, 파일럿이라면 무조건 따라야 하는 세계공통 표준절차다.

이날 내 옆에 앉은 기장도 실수를 했다. 목적지 공항을 앞두고 접근 준비를 하고 조종석 컴퓨터 세팅을 완료했는데, 숫자를 잘못 입력한 것. 예를 들어 310이라 입력해야 하는데 301 이런식으로 입력한 것이다. 다행히 내가 발견을 하고 바로 수정해서 고쳤다.

기장도 “나도 숫자 잘못 입력했네. 고쳐줘서 고마워”라고 말한다. 오늘은 무슨 마가 낀 날일까.

실수가 사무치게 싫다
일을 하다 보면 정말 징그럽게 실수를 많이 한다. <그림=DALL.E>
비행을 하다 보면 정말 징그럽게 실수를 많이 한다. 다행히 대부분의 경우에는 사소한 실수이긴 하다. 그때마다 방금 에피소드의 경우처럼 내가 바로 알아차리거나 그게 아니면 옆자리에 앉아 있는 조종사가 발견하고 잡아준다.

해야 하는 필수 절차를 빼먹고 안한 적도 있었고, 무슨 버튼을 눌러야 하는데 잘못 누른적도 있었고 아주 흑역사가 따로 없다.

생각해보면 나는 어릴때부터 실수가 많았다. ‘꼼꼼하지 못하다’는 말을 항상 달고 살았고, 초등학교에 받았던 통지표에도 항상 매 학기마다 ‘쾌활하나 주의 산만함’이라는 말이 높은 확률로 적혀 있었다. 요즘 같으면 ADHD 증후군을 의심해 부모님이 아마 고생깨나 하셨을 것이다.

성인이 되면서 기본적인 실수는 조금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실수를 많이 한다. 열쇠를 까먹고 밖에 나와 못들어간 적도 많았고, 현금이 필요한 곳에 가야하는데 현금을 안 가져 나온다든지, 각종 비번은 왜 이렇게 자주 까먹고 생각이 안나는지. 지금 이순간에도 TV 리모컨 없이 생활한지 한 달은 넘은 것 같다.

나도 꼼꼼하고 싶다. 하지만 MBTI도 100번 검사했는데 100번 전부 다 산만함과 무계획의 대명사 ENFP가 나오는 것을 보니 이젠 이런 내 자신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냥 나는 원래부터 이렇게 태어난 인간인 것이다.

성격과 직업이 맞지 않을 때
ENFP의 전형적 이미지 <그림=DALL.E>
현실적인 문제는 내가 꼼꼼하지 못한 성격 타입의 인간인데, 실수를 하면 안되는 대표적인 직업인 파일럿 일을 하고 있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만약 내가 심각한 실수를 저지를 경우 뒷자리에 앉은 수백명 승객들의 목숨까지도 위협할 수 있는 중대사항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실수를 하는데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먼저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이렇게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과학적으로 인간의 뇌가 원래부터 완벽하지 않게 설계 됐기에 그렇다는 설명이다. 사람의 기억이라는 것이 변형되고 왜곡되기 쉽기 때문이다.

뇌과학에서 뇌세포와 뇌 부위가 유동적으로 변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을 ‘뇌가소성’이라 부른다. 이로 인해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수정 가능하고 유연하게 사고하면서 학습을 할 수 있게 하는 대신, 자주 까먹고 무슨 행동이 머릿속에 입력돼 있더라도 자주 실수를 하게 되는 반대급부를 얻었다.

나보다 먼저 같은 고민을 했던 사람들은 어땠을까.

‘열린 사회와 그 적들’ 저자로 유명한 영국 철학자 칼 포퍼 (1902~1994) <출처=위키피디아>
유명인중에서도 “원래 그런거야, 실수해도 괜찮아!”라고 말한 사람이 있다. <열린 사회와 그 적들> 저자로도 유명한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영국 철학자인 칼 포퍼다. 그는 우리의 이성이 합리적이고, 많은 경험을 하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상에 ‘그렇지 않다’고 단호히 거부했다.

우리는 흔히 ‘과학’을 진리라고 생각하지만 포퍼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는 오류 가능성이 많고 반증 가능성이 높을수록 과학에 가깝다고 봤다. 인간의 이성은 언제나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우리 인간은 ‘실수’로부터 성장하고 배운다고 강조했다.

실수해도 괜찮아, 다만
칼포퍼의 ‘비판적 합리주의’는 실수를 인정하고 실수의 계속적인 교정을 통해 의식적으로 배우고자 하는 태도에서 나온다 <그림=DALL.E>
그렇다면 조선의 ENFP 실수왕이자 덤벙이인 내가 아직까지 최고 파일럿이자 항공전문가가 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실수의 빈도로 따진다면 나는 이미 톰크루즈를 이기는 탑건이 이미 됐어야 하는건데 말이다.

그 이유는 포퍼 옹께서 단순히 실수만 한다고 우리의 지식이 늘어난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비판적 합리주의’는 실수를 인정하고 실수의 계속적인 교정을 통해 의식적으로 배우고자 하는 태도에서 나오는 것이다. 나의 지식이란 것은 지금까지의 과학의 발전과 마찬가지로 내가 틀렸다는 반증을 통해 성장하고 그래야 더 나은 지식을 발견할 수 있다.

파일럿에게 실수 자체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실수를 저지르고 인정하지 않거나 숨기는 것은 확실히 부끄러운 일이다.
파일럿에게 실수 자체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실수를 저지르고 인정하지 않거나 숨기는 것은 확실히 부끄러운 일이다.

그래서 비행을 같이 하는 기장들 중 “내가 오늘 실수할 것 같으면 바로 편하게 알려줘. 잠을 못자서 컨디션이 좋지 않거든. 우리는 한 팀이잖아”이라고 허심탄회하게 말하는 사람을 내가 좋아하나 보다.

이렇듯 실수에서 성장을 못하는 것은 결국 내 탓인 것이다. 사실 내 자신이 틀렸다고 인정하는 건 비록 일할 때 뿐만 아니라 언제 누구라도 힘든 일이다. 앞으로 내 실수를 더 인정하고 항상 공유해서 덜 부끄러운 사람이 되어야 겠다.

[원요환 UAE항공사 파일럿 (前매일경제 기자)]

john.won320@gmail.com

아랍 항공 전문가와 함께 중동으로 떠나시죠! 매일경제 기자출신으로 현재 중동 외항사 파일럿으로 일하고 있는 필자가 복잡하고 생소한 중동지역을 생생하고 쉽게 읽어드립니다.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