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마는 ‘귀족스포츠’일까 ‘국민스포츠’일까 [김지나의 그런데 말(馬)입니다]

김지나 아마추어 승마선수 2024. 7. 5.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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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마의 ‘국민스포츠’화, 물량공세식 방법 지양해야
‘귀족’ 지우려 말고 우리가 귀족이 되면 어떨까

(시사저널=김지나 아마추어 승마선수)

말은 전문 훈련사에 의해 꾸준히 트레이닝을 받으며 운동능력을 키워야 한다. ⓒ김지나

'국민소득 2만 달러 이상이면 골프, 3만 달러 이상이면 승마'가 대중화된다는 속설이 있다. 2011년, 우리나라는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 후반대였고 동시에 말 산업을 육성한다며 관련법이 제정됐다. 그러면서 '승마'라는 스포츠가 자연스레 주목을 받았다. 이색적인 여가 활동이자, 일자리 창출 효과도 탁월하다는 장밋빛 청사진이 그려졌다.

하지만 승마를 따라다니는 '귀족스포츠'란 꼬리표가 걸림돌이었다. 귀족스포츠는 격식과 매너가 중요하다는 뜻 말고도 막대한 비용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도 함께 갖고 있다. 돈이 많이 드는 스포츠란 프레임은 '돈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승마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강습비를 지원해주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국민 말타기 운동'이다.

상주국제승마장의 세마실(洗馬室) 풍경. 말을 사육하는 데에는 많은 공간과 설비가 필요하다. ⓒ김지나

'전국민 말타기 운동', 국민스포츠 육성의 그림자

'전국민 말타기 운동'은 2009년 처음 시작돼 지금까지 이름을 바꿔가며 이어져 오고 있다. 2013년부터는 '전국민 말사랑 운동'이라 불렸고 지금은 승마체험으로 스트레스와 트라우마를 해소한다는 '힐링 승마' 사업과 통합이 됐다. 미래 인재를 키운다며 축산발전기금으로 초등학교, 중고등학생에게 강습비를 지원하는 '학생승마' 사업도 있다. 수십만원에 달하는 강습비를 많게는 70~80%까지 지원했다. 귀족스포츠를 단돈 몇 만원에 즐길 수 있다며 홍보도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모든 투자는 승마인구 저변을 넓히고 승마를 국민스포츠로 육성하겠다는 취지에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어떤 스포츠를 육성하기 위해 국가나 공공기관이 10년 넘게 일반인을 대상으로 이 정도의 파격적인 지원을 감행한 사례가 또 있을까 싶다. 실제로 이 지원사업의 혜택을 받은 후 승마에 정식으로 입문하거나 선수까지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 가지 문제가 따라온다. 그 중 하나는 사람들이 저렴한 강습료에 익숙해진다는 점이다.

승마는 기본적으로 비용이 많이 드는 운동이다. 수백 킬로그램 몸집을 가진 동물들을 먹이고, 씻기고, 재우기 위해서만도 필요한 공간과 설비들이 적지 않다. 게다가 말은 단지 사육만 하면 되는 애완동물이 아니다. 전문적인 훈련 자격이 있는 사람에 의해 꾸준히 트레이닝을 받고 운동 능력을 키워야 한다. 여기에 들어가는 인건비도 엄청나다. 살아있는 생명체이기에 발굽관리, 이빨관리, 털 관리, 예방접종 등등 주기적으로 챙겨야 하는 일도 많다.

싼 가격을 원하는 손님들을 잡기 위해 승마장에서는 온갖 할인 전략을 펼친다. 이것이 도가 지나치면 손실을 메우기 위해 싸구려 먹이를 쓰고, 박리다매 식으로 손님을 많이 받아서 말에게 과도한 노동을 시키게 된다. 훈련을 통해 말 능력을 유지하고 성장시키기보다 마치 소모품처럼 쉽게 말을 폐사시키며, 다시 값싸게 팔려나오는 경주퇴역마들로 그 자리를 메우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결국 10년 넘게 이어진 강습비 지원 사업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말 산업이 질적으로 성장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은 수많은 불법 승마장과 그 안에서 학대받고 죽어가는 말들의 사연이 증명해주고 있다. '전국민 말타기 운동'으로 승마를 해본 사람은 많아졌을지 몰라도 진정 저변이 넓어졌다 평가하기가 주저되는 이유다.

말은 주기적으로 발굽관리, 이빨관리, 예방접종 등을 주기적으로 받아야 한다. ⓒ김지나

승마는 돈보다 관용이 더 필요한 운동

승마가 레저스포츠로 활성화되려면 우선은 국민 소득수준이 전반적으로 높아져야 한다. 그것은 승마라는 스포츠의 태생적인 특징이자 어쩌면 한계점이다. 이것을 단지 '기승비 할인'을 통해 해결한다는 발상은 지극히 근시안적이었다. 2018년 비로소 처음으로 국민소득 3만 달러 벽을 돌파했을 때, 우리가 양적인 경제 성장만 이루었을 뿐 삶의 질이나 복지문제는 아직 갈 길이 멀다는 평가들이 많았다. 국민소득도, 동물복지에 대한 인식도 이제 겨우 시작단계인 우리나라에서 단지 승마의 '맛'만 자주, 그리고 싸게 보여주는 것은 현금성 지원을 남발하는 포퓰리즘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승마는 귀족스포츠다. 상류층의 전유물이란 의미에서가 아니라, 경제적 풍족감으로부터 나오는 여유를 다른 생명체에게 할애할 수 있는 관용이 필요한 운동이란 뜻으로 받아들여졌으면 한다. 귀족스포츠에서 '귀족'이란 말을 지우려 하지 말고 우리가 진짜 귀족이 되는 것. 그것이 승마인구의 저변을 넓히고 대한민국 말 산업이 성장하는 가장 빠르고도 올바른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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