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경구·김희애 “전직 대통령 연상? 정치 외피 쓴 욕망 이야기”

2024. 7. 5.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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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드라마 ‘돌풍’ 두 주인공
강대강으로 맞붙는 ‘연기神’들 격돌
“작품마다 고비” vs “모든 작품, 도전”

“이겨야죠. 당신이 만든 미래가 역사가 되면 안되니까....”(국무총리 박동호가 대통령 장일준에게 하는 말)

“거짓을 이기는 건 진실이 아니야. 더 큰 거짓말이지.”(박동호가 수시로 되뇌이는 대사)

대사에는 휴지(休止)가 존재했다. 하지만 숨을 몰아쉴 겨를은 찾을 수 없었다. 팽팽한 맞대결이었다. 두 사람은 창과 방패처럼 서로가 서로를 향해 꼿꼿이 마주 섰다. 다만 전쟁은 고요했다. 총성과 포효 없이도 살벌하고 구역질 나는 정치 전쟁터였다.

반격에 반격,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넷플릭스 드라마 ‘돌풍’의 중심에는 배우 설경구(57)와 김희애(57)가 있었다. ‘돌풍’은 공개 이틀 만인 6월 30일 넷플릭스 국내 시리즈 순위 1위에 올랐다. 최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두 사람은 입을 모았다. “대사의 힘이 있는 이야기라 막힘없이 읽었다”는 것이다.

“요리사가 싱싱한 생선을 받으면 그걸 어떻게 요리할까 싶은 생각이 들잖아요. 배우는 정말 좋은 책을 받으면 굉장히 떨려요.”(김희애)

‘연기의 신(神)’들의 ‘팽팽한 대결’ 눈길

“제가 대통령님을 시해했습니다.” 드라마는 ‘대통령 시해’라는 충격적 사건으로 시작한다. 출발부터 갈 데까지 가버린다. 내일이 없는 것처럼 진격하는 정치인들의 모습이 마치 ‘돌풍’과 흡사하다. ‘작가의 예술’로 불리는 드라마, 작가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은 2010년대 정치 권력을 그린 ‘추적자 더 체이서’(2012), 자본 권력을 담은 ‘황금의 제국’(2013), 공권력을 정조준한 ‘펀치’(2014) 등 ‘권력 3부작’으로 파란을 일으킨 박경수 작가가 7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다.

김희애는 “오래 전부터 박 작가의 팬이었고, 작품을 볼 때마다 가슴이 뛰었다”며 “요즘 드라마들은 대사보다 다른 것들을 더 우선시하는데 ‘돌풍’에는 허투루 흘려보낼 수 있는 대사가 없었다”고 말했다.

두 주인공은 팽팽히 맞선다. 치부를 감추고 차기 권력을 잡으려는 3선 의원 겸 경제부총리 정수진을 연기하는 김희애, 모든 부패를 뿌리 뽑으려는 검사 출신 총리 박동호로 분한 설경구. 설경구가 ‘돌풍’을 하게 된 것은 김희애의 공이 크다. 1994년 아침 드라마 ‘큰 언니’ 이후 처음이니 무려 30년 만이다.

“느닷없에 제 뒤에서 김희애 씨와 매니저가 쑥덕쑥덕 하더라고요. ( ‘돌풍’) 대본을 다섯 개를 먼저 줘서 순식간에 읽었는데,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일 것 같았어요.”(설경구)

사실 박 작가는 ‘쪽대본 작가’로 유명한 인물이라 배우들은 지레 겁을 먹었다. 특히 ‘압도적인 분량’의 대사는 두 사람 모두에게 부담이었다. 설경구는 “필모그래피 사상 가장 대사가 많은 작품”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대사가 빽빽하게 쓰여 있었어요. 게다가 온통 평소에 쓰지 않는 말들이었죠. 보통은 대본을 매일 보지 않는데 이 작품은 제대로 준비하지 않으면 사고가 날 것 같아서 자주 붙들고 있었어요.”(설경구)

문학의 영역에 가까운 박 작가의 ‘글발’에 폐부를 찔러오는 송곳 같은 대사는 ‘연기의 신(神)’인 두 배우를 긴장하게 했다. 김희애는 “권력욕을 가진 야망있는 캐릭터이나, 악역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며 “다만 초반엔 ‘연기고 뭐고 무조건 발음만이라도 잘 전달되도록 하자’, ‘나의 연기가 픽업될 수 있도록만 하자’는 생각이었다”고 했다.

김희애가 특히나 공들인 대사가 있었다. 그는 “대본엔 명대사가 정말 많은데 이 대사는 무엇보다 잘 하고 싶었다”며 “내가, 당신이, 박동호여야 했어”라는 대목을 꼽았다. 부총리 정수진이 민주화에 헌신하면서도 부패한 기업인의 돈을 야금야금 챙겨온 남편 한민호(이해영 분)에게 하는 말이다.

설경구는 구린내 나는 부패 척결을 위해 칼을 빼든 박동호를 ‘판타지적 인물’이라고 했다. 그는 “(박동호는 현실에서) 연상되는 사람도 없고, 현실에선 존재할 수도 없는 인물”이라며 “현실에선 이루기 어려운 판타지이다 보니 대리만족하게 된다”고 말했다.

드라마는 자연스레 현실 정치의 단면을 떠올리게 한다. 설경구는 “충격적인 첫 장면부터 극적 재미를 느꼈는데, 마지막까지 (작가가) 정말 독하게 썼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누군가에게는 586(50대, 1980년대 학번, 1960년대생) 운동권 출신 정치인을 조준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또 누군가는 ‘절벽 엔딩’을 보며 노무현 전 대통령을 연상할 수도 있겠다.

김희애는 그러나 “내가 출연한 작품은 모두 문제작”이라며 “한국 정치가 워낙 역동적이라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지만, 모든 것이 다 섞인 창작물일 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설경구도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기 위한 이야기, 혹은 타깃으로 한 것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이어 “작든 크든 조직과 사회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며 “정치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욕망에 관한 이야기”라고 덧붙였다.

세 번째 호흡, 제대로 마주한 작품은 처음

배우 김희애와 설경구의 만남은 이번이 세 번째다. 영화 ‘더 문’에서는 이혼한 부부로, ‘보통의 가족’에선 시아주버니와 제수씨로 함께 했다. 세 번째 만남이나 한 장면 안에서 제대로 마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드라마는 두 장인의 ‘연기 차력쇼’라 할 만 하다. 설경구는 “골프 칠 때 공과 대화를 나눌 정도로 평소엔 빈틈 많은 소녀 같은데 연기를 할 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며 김희애를 소개했다. 특히 극중에서 각자의 신념으로 맞부딪힐 땐에는 “서로 죽일 듯이 촬영해 엄청 기가 빨렸다”고 할 정도다.

“싸우는 장면을 찍을 때마다 고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연기를 할 때는 굉장히 센 아우라를 가지고 있고, 철두철미하고 빈틈없는 사람이에요. 배우로서 42년을 이어올 수 있는 비결이겠죠.”(설경구)

김희애는 자신을 “설경구의 샤이 팬”이라고 자처했다. ‘돌풍’을 설경구에게 ‘강력하게’ 추천하고, 밀어붙이기까지 한 것도 “설경구가 아니라면 누구도 떠오르지 않아서”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설경구라는 배우와 연기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설경구 씨의 연기를 바로 앞에서 볼 수 있어 무척 좋았고, 감동적이었어요. 그와 연기하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나 싶어요.”(김희애)

이들은 명실상부 한국을 대표하는 ‘연기파 배우’들이지만, 아직도 그들에게 배우의 일은 수행, 도전, 내려놓음의 연속이다. 매 작품 새로워지기 위해 자신을 갈고 닦고, 캐릭터의 세계를 여행한다.

사실 국내에서 50대 여배우가 설 자리는 좁다. 주인공의 이모나 엄마 같은 주변인으로 밀려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김희애는 독보적으로 모든 작품의 중심에 서 있다. 그는 “운이 좋았다. 나에게 주어진 허들을 피하지 않고 넘었던 것이 현재진행형으로 일할 수 있는 동력이 됐다”고 했다.

퀴어(성소수자)를 다룬 영화 ‘윤희에게’, 일본군 위안부와 이른바 ‘관부재판’을 다룬 영화 ‘허스토리’, ‘부부문제’를 담은 드라마 ‘부부의 세계’, 여성 대통령을 만드는 드라마 ‘퀸메이커’ 등 그의 필모그래피 중 쉬운 작품은 하나도 없었다. 김희애는 “착한 대사를 읊고 편안하고 쉬운 작품만 해왔다면 지금의 정수진은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다만 “모든 작품에 큰 의미를 두기 보다 그냥 내 일의 일부라고 생각하며 지낸다”고 말했다. 그가 온전히 배우로, 한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는 방법이다.

“처음엔 작품을 하면서 우울증도 겪고, 작품에서도 빠져나오기 힘들었어요. 한 작품 한 작품이 모여 히스토리가 됐지만, 하나 하나 의미를 두지 않고 다음의 무언가를 위해 비워내고 있어요.”(김희애)

2000년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박하사탕’에 출연하며 충무로의 주목받는 배우가 된 설경구는 작품마다 하나의 경지를 보여줬다. 물불을 가리지 않는 형사와 검사의 이야기를 담은 ‘공공의 적’, 전과자 청년과 장애 여성의 사랑을 담은 ‘오아시스’, 한국 최초의 1000만 영화 ‘실미도’ 등 그가 출연한 작품 중에는 선이 굵은 영화가 많다.

어떤 연기든 잘 해낼 것 같은 설경구도 “매번 (작품을 할 때마다) 고비를 넘기며 배우로서 슬럼프도 마주한다”며 고백했다. 이어 “결국 나의 모습으로 연기하는 것이기에 반복된 모습이 나올 수밖에 없어 고민한다”며 “시간이 가고 해가 갈수록 더 힘들다”고 토로했다.

“ 연기를 하며 한 번도 100% 완성했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도자기를 30~40년 구우면 고수라는 느낌이 나야 하는데 배우의 길은 끝이 없네요(웃음).”(설경구) 고승희 기자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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