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싶은 길] 근대와 현대, 자연과 산업이 약동하는 월미도 둘레길

현경숙 2024. 7. 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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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타운, 자유공원과 가까운 바다 조망 길
월미도 전망대에서 바라본 인천 내항[사진/조보희 기자]

(인천=연합뉴스) 현경숙 기자 = 인천은 몰라도 월미도 모르는 사람은 없다고 할 정도로 월미도는 유명한 관광지였다.

1899년 서울 노량진과 인천 사이에 최초의 철도가 놓이고, 인천 서쪽 끝 해안의 작은 섬인 월미도가 육지와 연결되면서 그러했다.

서울과 인천 사이가 걸어서 12시간에서 1시간 30분가량의 기차 여행으로 단축되면서 월미도는 수도권 제일의 국민관광지로 부상했다.

한 세기 너머 이어지는 '핫플'

서울 풍류객들은 월미도에서 바다 풍광과 해수욕을 즐기고, 인천 역 앞 차이나타운에서 자장면을 한 그릇 한 뒤 귀경하는 것을 멋으로 여겼다.

지금도 월미도는 여전히 인천의 핫플레이스이다. 서울에서 전철에 몸을 싣기만 하면 닿을 수 있으며, 푸른 바다와 짙은 숲, 테마 공원, 섬을 공중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바다열차가 방문객을 맞아준다.

월미도에는 섬을 한 바퀴 도는 둘레길이 있다. 둘레길을 걸으면 인천상륙작전 당시의 상륙지점, 한국의 해외 이민사를 엿볼 수 있는 이민사박물관, 월미산 등을 만날 수 있다.

월미도 전망대[사진/조보희 기자]

인천 둘레길 13코스이기도 한 월미도 둘레길은 인천역 앞에서 시작한다. 길은 월미도와 인천 육지부를 연결한, 길이 약 1㎞의 제방 위 길을 지나 월미공원 정문∼월미 전통 정원∼한국이민사박물관∼월미테마파크∼월미문화의 거리∼월미문화관으로 이어진다.

둘레길 중간에 월미산 정상과 전망대로 이어지는 숲길이 있다.

둘레길은 약 5㎞이다. 월미산 숲길 구간은 수목이 울창하고 그늘이 짙어 여름에도 산책하기에 좋을 것 같았다.

높이 108m인 월미산에 오르면 전망대가 반갑다. 전망대에 서면 1부두에서 8부두까지 건설된 인천 내항, 인천국제공항이 있는 영종도, 세계에서 7번째로 긴 인천대교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한국 최초로 등대가 세워졌던 팔미도가 코 앞이고, 마니산 정상과 강화도 남쪽 지역도 관측된다. 병풍처럼 길게 늘어선 북한산도 멀지만 분명하게 보였다.

조선 말기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 등 열강의 각축장이었던 월미도 앞 바다는 말없이 푸르기만 하다.

월미도에서 바라본 인천내항과 낙조[사진/조보희 기자]

근·현대사의 정점에 있었던 월미도

월미도는 둘레 4㎞, 면적 0.66㎢ 정도이다. 신라 시대에 이 작은 섬은 '어을미도' 등으로 불리다가 한자로 표기되면서 '월미도'(月尾島)로 명명됐다.

'어을미도'란 물이 휘돌아가는 섬이라는 뜻이다. '물이 휘감기는 달 꼬리'라는 운치 있는 이름을 가졌던 월미도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격전지가 됐다.

1866년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침입해 병인양요를 일으켰을 때 함대 사령관 로즈는 그들의 해도에 월미도를 '로즈 아일랜드'(장미의 섬)라고 표기했다.

1871년 신미양요를 일으킨 미국 로저스 함대가 월미도 앞바다에 무단 정박했고 1875년에는 일본 군함 운요호가 월미도에 무단 정박했다가 강화도에서 포격 사건을 일으켰다.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1876년 강화도조약(한일수호조약)이 체결돼 조선은 개항하게 된다. 인천은 1883년 개항했다.

1894년 청일전쟁 발발로 월미도는 일본의 병참기지가 됐고, 1895년에는 영국 순양함이 월미도 앞바다에서 침몰해 군인 448명이 익사했다.

1904년 러일 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러시아 전함 2대가 월미도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상륙지점이었던 레드비치 포인트 기념비[사진/조보희 기자]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이 이끄는 유엔군은 그해 9월 15일 전함 261척과 미국 해병 제1사단, 한국 해병 제1연대를 진두지휘해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해 성공한다.

당시 상륙 지점이었던 3개 해안 중 2개가 월미도에 있다. 녹색해안(그린비치 포인트)과 적색해안(레드비치 포인트)이 그것이다.

대한제분 공장 앞에 있는 적색해안 기념비 옆에는 1951년 2월 10일과 11일 대한민국 해군·해병대 단독으로 감행한 제2차 인천상륙작전 승리를 기념하는 전승비가 함께 서 있었다.

유엔군은 적의 예봉을 꺾기 위해 상륙 직전 무차별 폭격으로 월미도를 초토화했다. 당시 희생됐던 민간인 100여 명을 추모하는 위령비가 월미공원에 세워져 있었다.

월미산의 일부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군사기지로 사용되다가 2001년 반세기 만에 완전히 개방돼 주민 품으로 돌아왔다.

전쟁의 상흔이 깊은 월미산을 아름답게 가꾸기 위한 노력이 돋보인다.

둘레길 가에는 해군의 1만 그루 기념 식수비, '평화의 나무' 8그루 등이 산보객의 눈길을 끌었다.

전쟁을 견뎌낸, 100년 이상 수령의 노거수들인 평화의 나무는 월미산의 푸르름이 지속되길 바라는 염원을 상징한다.

월미공원 산책로[사진/조보희 기자]

인천과 인천역을 배경으로 태어난 '한국 최초'들

경인철도, 팔미도 등대를 필두로 인천에서 시작된 '최초'들이 적지 않다.

서울에서 가깝고 한반도 남북의 중간에 있는 인천이 한국 근·현대사와 늘 함께 한 결과이리라.

1902년 12월 한국 최초의 공식 이민인 하와이 이민의 출발지도 인천항이었다. 하와이 첫 이민단 121명은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하와이로 이주했다.

이전까지 구한말의 농민, 노동자들은 가난과 굶주림을 피해 국경 넘어 중국, 러시아로 이주했다. 대부분 이민이 아닌 유민의 형태였다.

하와이 이주는 한·미 정부의 승인 아래 추진됐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1905년까지 7천400여 명이 이주했다.

이민자들이 마지막으로 밟은 조국 땅인 인천은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난 도전의 시작점이었다.

월미 테마공원[사진/조보희 기자]

말이 통하지 않는 낯선 환경과 문화 속에서 중노동으로 새 인생을 개척했던 이민자들의 고난은 형언하기 어려웠다.

그 불굴의 의지는 지금도 세계 구석구석으로 뻗어나가고 있는 한인들을 통해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오늘날 재외 한인 동포는 710만 명에 달한다.

하와이 이민자들은 가까스로 모은 돈을 조국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탰다.

나라가 부강해지려면 기술과 교육이 필요하다며 조국에 대학을 설립하기도 했다. 그 결과가 지금의 인하대학교이다. '인하'는 인천과 하와이의 첫 글자를 딴 이름이다.

한국이민사박물관이 월미 둘레길 옆에 있다.

인천 내항의 갑문식 도크도 한국 최초이며, 컨테이너 부두가 처음 설치된 곳도 인천이다.

개항 후 중국 조계지가 설치돼 화교가 많아지면서 생긴 인천역 앞 차이나타운은 최초의 '국민 외식' 자장면 발상지이다.

인천 차이나타운[사진/조보희 기자]

차이나타운과 자유공원

월미도 둘레길 출발지인 인천역 바로 맞은 편에 차이나타운과 자유공원이 있다.

이 일대에는 '개항누리길'이라는 명칭의 도보 여행길이 있다. 차이나타운에서는 개항도시였던 인천의 면모를 살필 수 있다. 맥아더 장군 동상이 있는 자유공원은 평화의 소중함을 느끼게 한다.

차이나타운은 평일과 주말 할 것 없이 내외국인 관광객과 견학 온 학생들로 시끌벅적한 것 같았다. 자유공원을 거니는 주민들은 여유롭고 평온해 보였다.

월미도 둘레길을 탐방한다면 차이나타운과 자유공원도 들르길 권한다.

역사를 품고 미래를 잉태한 제3의 도시

19세기 말에 바다가 열리고, 20세기 초에 철길이 놓였던 인천에는 동북아 허브 공항인 인천국제공항이 자리 잡고 있다.

월미산에 서면 청라국제도시, 영종국제도시, 인천국제공항, 송도국제도시가 반원을 그리며 북쪽에서 서쪽, 남쪽으로 이어져 있다.

그 사이 사이에 공항고속도로와 철도가 지나가는 영종대교, 길이 21.38㎞의 인천대교가 길게 가로놓여 있다.

자유공원[사진/조보희 기자]

또 해안선을 따라 북쪽에서 남쪽으로 북항, 내항, 남항, 국제여객터미널, 연안여객터미널이 연이어 있다.

내항에는 곡물을 보관하는 대형 사일로들이 서 있고, 새 차와 중고차들이 환적과 수출을 기다리고 있다. 세계 7위 곡물 수입국인 한국의 곡물 수입량 중 30%가량이 인천을 통해 수입된다.

인천은 국내 최대 중고 자동차 수출 항구이다. 대형 사일로 중에는 세계 최대 벽화가 그려져 기네스북에 오른 것도 있다.

영종도 하늘에서는 항공기가 쉼 없이 뜨고 내린다. 백여 년 전 개항도시였던 인천이 항구도시, 관문도시, 국제도시로 탈바꿈한 변화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수도의 관문으로서 앞선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에 이바지했던 인천은 수도권 공업지대이자 국제무역항으로서 산업화에도 기여했다.

한국과 세계를 연결하는 최대 접점이자 첨단 도시로 거듭나고 있는 이곳은 역사뿐 아니라 한국의 미래를 품고 있다.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4년 7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ks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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