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은이는 의사 선생님이 필요해요"…거리로 나선 엄마의 호소 [뉴스+]

조희연 2024. 7. 5.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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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20일 전공의 파업으로 딸이 치료를 못 받아 이별할까봐 내일이 오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하은이는 제 인생 전부입니다.”

의대 증원에 반발한 전공의들이 병원을 이탈한 지 4개월이 지나면서 환자와 보호자들이 거리로 나왔다. 한국유방암환우총연합회, 한국환자단체연합회, 한국희귀·난치성질환연합회 등 92개 환자단체는 4일 서울 종로 보신각 앞에서 ‘의사 집단휴진 철회 및 재발방지법 제정 환자촉구대회’를 열고 의료계 집단휴진 철회와 의료공백 재발방지법 입법을 촉구했다. 경찰과 주최 측이 추산한 참석자는 300여명으로 역대 환자단체 주최 집회 중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코넬리아드랑게 증후군을 앓고 있는 박하은씨의 어머니 김정애씨가 4일 오전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열린 '의사 집단휴진 철회 및 재발방지법 제정 환자촉구대회'에 참석해 호소문을 낭독 중 울컥하고 있다. 뉴스1
베이지색 모자를 쓰고 발언대에 오른 김정애(68)씨는 “아프게 태어난 하은이는 의사 선생님의 도움으로 위험한 고비를 넘기며 살았다. 지금까지 하은이를 살려주신 의사 선생님께 감사하다”면서도 “하은이는 앞으로도 의사 선생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김씨의 딸 박하은(23)씨는 발달장애와 사지 기형 등을 동반한 ‘코넬리아드랑게’라는 선천성 희귀질환을 앓고 있다. 김씨는 의료계가 집단휴진을 선언했을 당시 사태 해결을 촉구하는 간절한 마음에 삭발까지 했다.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의협) 회장과 한덕수 국무총리를 만나 “끝까지 대화하겠다”는 약속도 받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의료공백 가해자는 의·정”

김씨는 지금의 의료공백을 초래한 원인은 의료계와 정부 모두에 있다며 눈물지었다. 김씨는 “우린 정부 편도 의사 편도 아닙니다. 아플 때 치료받고 싶을 뿐”이라면서 “환자가 죽고 없으면 의사가 필요 없고, 국민이 죽고 없으면 국가 역시 필요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아픈 사람들이 다시는 이렇게 길거리에 모이지 않도록 국민 여러분께서 도와달라”고 덧붙였다.
한국유방암환우총연합회·한국환자단체연합회·한국희귀난치성질환연합회 등 총 92개 환자단체 회원들이 4일 오전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열린 '의사 집단휴진 철회 및 재발방지법 제정 환자촉구대회'를 앞두고 피켓을 부착하고 있다. 뉴스1
안기종 한국환자단체연합회 대표도 의·정 모두 현 사태의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전공의와 의대생은 본인이 피해자라고 한다. 전공의도 의대생도 피해자 맞지만, 그 피해는 전문의 자격을 따는 기간, 의사 면허증을 따는 기간이 조금 더 길어지는 피해”라면서 “환자의 피해는 장기간의 의료공백으로 생명을 잃을 수 있는 피해고, 질병이 악화할 수 있는 피해이며, 육체적으로 고통받는 피해, 불안으로 투병 의지를 잃어 치료를 포기하는 피해”라고 말했다. 이어 “이 피해의 명백한 가해자는 전공의, 환자 곁을 떠난 의대 교수, 의협이고, 이러한 가해자를 만들어낸 정부”라고 비판했다.

안 대표는 정부에 “전공의들에게 수련 현장에 돌아오라고 더는 강요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그는 “전공의들은 정부의 의대 정원 2000명 증원과 증원된 의사 인력이 필수의료에 종사하도록 만들기 위해 발표한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가 오히려 필수의료를 죽일 거라는 확신을 갖고 자발적으로 사직했다”며 “이들을 돌아오게 하려면 정부가 제대로 된 의료개혁을 추진해서 늘어난 의사 인력이 진짜 필수의료를 선택할 수 있도록 제도적·입법적 환경을 구축하는 것이고, 그렇게 하면 지금 당장이 아니어도 1~2년 뒤엔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역대 최대 규모 환자 집회

환자단체의 집회 참석자가 300여명에 달한 것은 이례적이다. 안 대표는 “환자단체에서 활동한 20년 동안 수없이 많은 이슈가 있었지만, 집회에 50명 이상이 모인 건 처음”이라며 “얼마나 의료공백이 심각한지 알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유방암환우총연합회·한국환자단체연합회·한국희귀난치성질환연합회 등 총 92개 환자단체 회원들이 4일 오전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열린 '의사 집단휴진 철회 및 재발방지법 제정 환자촉구대회'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스1
안 대표는 “오늘 환자들이 보신각에 모인 이유는 환자들이 의·정 갈등으로 희생돼야 하는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 의사와 정부의 존재 이유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려주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그는 “헌법과 의료법에 의해 의사에게만 의료행위를 할 수 있는 특권을 준 것은 의사의 부모도 아니고, 의협도 아니다. 대한민국의 주권자인 국민이다”면서 “의사 집단은 환자의 불안과 피해를 도구로 정부를 압박하는 행보를 중단하고 의료 붕괴를 신속히 정상화해야 한다”고 했다.

환자단체들은 △대학병원 무기한 휴진 철회 △상급종합병원의 전문의 중심 병원 전환과 전공의 수련환경 개선 △의료인 집단행동 시에도 생명과 직결된 필수의료는 중단 없이 가동하는 법률 입법을 촉구했다. 이들은 “필요할 때 적절한 치료를 받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의 권리”라면서 “어떤 일이 있어도 아픈 사람에 대한 의료 공급이 중단돼서는 안 되며, 의료 공급이 중단될 수 있다는 신호를 줌으로써 불안을 조장해서도 안 된다”고 말했다. 집회가 끝난 뒤 환자단체 대표들은 국회를 방문해 각 정당에 의료인 집단행동 재발방지법 제정을 요구했다.

조희연 기자 cho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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