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려드는 경증환자, 멱살 잡힌 전공의… 응급실이 앓고 있다

오경묵 기자 2024. 7. 5. 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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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개혁, 이제부터가 중요] [8] 응급실 고질병
의정갈등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지난 3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응급실 인근에서 한 환자가 응급실 진료를 위해 구급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2일 오후 4시 서울 강서구 이대서울병원 응급의료센터는 응급 환자 35명에 이들의 보호자까지 섞여 북적였다. 이곳에 있는 환자 중 15명(42.9%)은 경증 환자였다. 응급실 환자 절반 가까이는 동네 병의원에서도 충분히 치료받을 수 있는 골절이나 타박상, 단순 복통 등의 환자였다. 한철 응급진료부장(응급의학과 교수)은 “매일 오는 환자 130~140명 중 40% 정도가 비응급·경증 환자”라며 “그만큼 중증·응급 환자를 받을 여력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했다.

정부가 지난 2월 의대 증원 정책을 발표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응급실 뺑뺑이’ 사태로 중환자가 길에서 사망하는 경우를 막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응급 의료계에서는 “의사 수를 한 해 수만 명 늘려도 근본적 개혁 없이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했다. 응급실의 경증 환자 쇄도, 낮은 처치 수가(건보공단이 병원에 주는 돈), 의료 소송 위험 등 의사들이 응급의학과를 기피하는 근본 원인을 없애지 않으면 의사 수를 늘려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전문가들은 우리도 해외처럼 환자들의 응급 수준을 구분해 생사 기로에 서 있는 중증 환자만 상급종합병원으로 이송하고, 나머지 환자는 1·2차 응급 센터로 나누어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러스트=양진경

응급실은 환자 생명과 직결된 ‘필수 의료 중 필수 의료’로 꼽히지만, 복잡한 문제들이 실타래처럼 꼬여 있다. 응급 의료에 대한 수가 인상은 다른 진료과의 수가 삭감을 부를 수밖에 없어 병원 단위에서 강하게 주장하거나, 단기간에 의료계 합의를 통해 결론이 나기 힘들다. 응급 의사들의 소송 부담 경감 방안은 정부가 추진 중이지만 국회를 거쳐야 해 상당히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당장 붐비는 응급실의 부담을 덜어주려면 정부 지침 개정 등을 통해 경증 환자를 막는 방법이 있지만 자칫 의료 접근성이 저하될 우려도 상존한다. 지금은 경증 환자라고 진료하지 않았다가 의료법상 ‘진료 거부 행위’로 처벌받을 수 있다. 응급 의료계에서는 “경증 환자 저감 등 가능한 조치부터 부분적으로 시작하고, 수가 조정과 응급 의료 인력 우대 정책을 도입해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실제 응급의학과는 돈이 안 되는 진료 과목으로 꼽힌다. 인력과 시설 투자에 막대한 비용이 들지만, 수익은 거의 내지 못한다. 응급실 심폐소생술은 수가가 15만원이다. 외국은 200만~250만원 수준인 데 비해 턱없이 적다.

그래픽=양인성

긴급 상황에 대응하는 진료과 특성상 소송 부담도 적지 않다. “응급 처치가 잘못됐으니 의사가 책임지라”며 소송을 제기하는 경우는 2012년 6건에서 2021년 22건으로 늘었다. 서울의 한 응급의학과 교수는 “법적 책임을 지기 싫어 응급의학과 전문의를 따고도 개원가 등으로 빠지는 경우가 해가 갈수록 늘고 있다”고 했다. 응급 의학의 특수성을 인정해 진료 과정에서 고의, 중과실이 없으면 형사적 면책을 받도록 해줘야 한다는 주장이 의료계에서 나온다.

이런 가운데 응급실 경증 환자 쇄도와 ‘앰뷸런스 뺑뺑이’ 문제가 다시 불거지고 있다. 전공의 이탈 사태 전인 2월 1~5일 전국 응급실을 찾은 경증 환자는 8285명이었다가 사태 직후(2월 20~23일)에는 80.2% 수준(6644명)으로 급감했었다. 하지만 지난달 3~7일에는 7387명으로 다시 사태 이전의 89% 수준으로 올라섰다. 우리나라 응급실에 내원하는 경증 환자는 전체 환자의 절반에 달하고, 자동차(71.5%)를 통해 응급실에 도착하는 환자가 구급차(26.9%)보다 훨씬 많다.

응급실에서 일하는 의사들의 ‘저보상 고위험’ 구조를 바꾸지 않은 상태에서 ‘의사만 늘리면 응급실 뺑뺑이가 줄어들 것’이라고 말하는 건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게 응급실 의사들의 지적이다. 서울 대형 병원의 응급실 의사는 “응급실에서 의사 멱살을 잡고 소란을 피우는 건 대부분 비응급 환자다. 중증 환자는 소리지를 힘도, 난동 피울 정신도 없다”며 “정부가 경증 환자만 막아줘도 의사들이 중증 환자에게 집중할 수 있다”고 했다. 지방의 한 응급의학과 교수는 “정부가 배가 아파도 국내 ‘빅5(5대 대형 병원)’ 응급실에 가려는 경증 환자들의 원성을 사기 싫어 이 문제를 수십 년간 방치해 왔다”고 했다.

그래픽=양인성

해외 주요국은 일명 ‘걸어 들어오는 환자’(경증 환자)는 중환자를 맡는 대형 병원의 응급실 이용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일본의 응급실은 1·2·3차 응급 센터로 나뉘어 있다. 경증 환자는 3차 응급 센터는 이용할 수 없고, 1·2차 응급 센터로 이송된다. 프랑스도 응급실을 중환자를 담당하는 대형 병원 응급실(SAU), 특정 장기를 다루는 전문 병원 응급실(POSU), 경미한 환자 담당 병원 응급실(UPA)로 구분해서 운영하고 있다. 독일은 응급 수준을 구분해 꼭 필요한 환자만 대형 병원으로 이송하고, 나머지는 소형 병원에서 진료를 보게 한다. 우리나라도 상급종합병원 등에 설치된 권역응급의료센터는 44곳이다. 종합병원 중에서 병상·인력 등 요건에 따라 지정되는 지역응급의료센터 136곳과 지역응급의료기관 228곳까지 포함하면 총 408곳이 운영 중이다.

의료계 인사들은 “정부는 경중에 따라 응급 환자들이 분산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며 “정부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사이 밀려드는 경증 환자들을 진료하고, ‘왜 수술을 해주지 않느냐’고 멱살을 잡히는 일은 응급실 전공의들이 떠안아 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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