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화 이뤘을 군주? 소현세자는 후대의 욕망으로 미화됐다”
“‘소현세자(1612~1645)의 죽음으로 인해 조선은 근대화의 기회를 잃고 말았다’는 서사(敍事)에 깜짝 놀랐습니다. 분명 제가 1차 사료에서 본 소현세자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말이죠.”
최근 연구서 ‘소현세자는 말이 없다’(푸른역사)를 낸 이명제(40) 전남대 역사문화연구센터 학술연구교수는 17세기 조선·청 관계사(史) 전공이다. ‘심양일기’ ‘심양장계’ 등의 원사료를 분석한 결과, 조선 16대 임금 인조의 맏아들로 병자호란 직후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간 소현세자의 실체는 대체로 이랬다. “신체적으로 나약했고, 정치적으로 조·청 양국으로부터 제약을 받았던 비극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드라마 ‘더 킹: 영원의 군주’ ‘연인’과 영화 ‘올빼미’ 등에서 소현세자는 ‘살아 있었더라면 영명한 군주로서 조선의 근대화를 이뤘을 인물’로 묘사된다. 심지어 ‘아버지 인조에 의 독살당하지 않았더라면 조선은 일찍 문명개화됐을 것’이라는 안타까움을 내비치는 경우도 있다.
이 교수는 “소현세자는 후대의 염원에 의해 지나치게 미화됐다”고 말했다. 세자가 베이징에서 독일 예수회 신부 아담 샬을 만나서 서양 문명 수용의 영감을 얻었다는 주장을 처음 펼친 사람은 1931년 일본인 야마구치 마사유키(山口正之)였는데, 그 뒤 국내에서 소현세자가 ‘외교관이었으며 노예를 해방하고 농장을 성공적으로 이끈 경영인’이라는 긍정적 평가도 나왔다.
과연 그것은 사실이었나? 아쉽게도 실제 역사는 그렇지 않다고 이 교수는 말했다. 압박과 견제로 인해 세자의 외교 활동은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조선인 포로를 해방시킨 뒤 농장을 경영한 것은, 200~300명에 이르는 세자 일행에 대해 청나라가 지원을 중단한 결과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다. 그나마 막대한 초기 비용 때문에 적자를 면치 못했다. 아담 샬의 기록은 ‘조선 왕과 만났다’고 했고 소현세자 일행에 없었던 역관(曆官·천문 관측 기술자)을 대동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실제로 만났더라도 깊은 교류는 없었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이 교수는 “당시 중국에 있던 서양 선교사가 근대 문명을 지니고 있던 것도 아니었고, 조선이 그렇게 꽉 막힌 나라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소현세자가 죽은 직후 조선 조정은 서양 역법인 시헌력을 수용했다. 조선왕조는 소현세자 사후에도 265년을 지속했는데 그 역시 다이내믹한 역사였다. 그럼 ‘독살설’은? 귀국 당시 세자는 극도로 건강이 악화된 상태였고, ‘인조실록’에 기록된 시신 상태는 최근 중견 법의학자가 ‘독살의 증거라기보다는 부패의 결과’라는 분석을 냈다.
결국 ‘소현세자 서사’는 조선이 근대화에 실패한 이유를 찾는 과정에서 나타난 후대의 욕망일 뿐이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소현세자는 21세기의 우리 대부분처럼 평범한 인간이었는데,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이 반드시 영웅이었을 것이라 여기는 것은 착각”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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